195화. 파죽지세(破竹之勢) (1)
“…젠장.”
흑마를 탄 사내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멀리 보이는 대장원.
수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한 위용을 보여주었던 곳이건만, 지금은 훼손된 흔적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내는 자신의 옷을 꽉 쥔 손길을 느끼곤 고갤 숙였다.
“아, 미안하구나. 이 사부가 너흴 생각 못 하고 욕을 했네.”
“아니어요, 사부님.”
아직 어린 소년, 소녀였다.
그들의 품에는 작은 개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애완동물의 개념이 없는 시기임을 생각하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어느덧 그들을 태운 흑마가 대장원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경계심을 드러내는 자들이 앞을 막았다.
“본가는 외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소, 돌아가시오.”
“이백이라 하오, 령이…를 만나러 왔소.”
살기등등한 그들의 모습에도 이백은 제 용무를 밝혔다.
습격을 당한 지 며칠밖에 안 된 만큼 외인의 접근에 경계심이 심각했다.
특히 축객령에도 이백이 물러나지 않으니, 당장이라고 공격할 기세였다.
“이백이고 나발이고… 꺼지란 말을…….”
“이, 이 대협이십니까!”
무사 중 한 명이 화를 내고 있을 때, 곁에 있던 또 다른 무사가 이백을 알아봤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동료의 반응에 무사는 짜증을 냈다.
상부의 명으로 외인의 방문은 불허했다.
헌데 상부의 명도 잊은 듯 당장이라도 들이려는 동료의 반응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아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가주 대리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신 명을 잊었는가!”
“이 대협이시네! 이 대협!”
자신을 질책하는 동료를 보며 그를 이를 악물어 이백의 존재를 언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료는 이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게 왜! 가주 대리님의 명보다 중요해! 이 일은 당주님께 보고하겠네!”
“이 머저리가! 죄송합니다, 이 대협님. 본가의 상황이 이래서…….”
자신의 잘못을 상관인 당주에게 보고하겠단 동료의 말도 무시한 채 이백에게 사과를 했다.
이런 모습에 동료를 질책했던 무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백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괜찮소, 귀가의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니. 가주… 대리께서 내리신 명은 알겠지만, 안에 기별을 넣어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저희… 소가주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대협.”
“왜 소가주님을… 어, 어, 어!!”
그제야 이백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동료 무사는 눈이 커졌다.
동시에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닫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허나 이백은 그가 잘못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귀하께서 잘못한 게 아니오. 귀가의 입장에선 당연한 조치였고, 귀하는 그걸 따르신 거 아니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백은 되려 그를 위로해주었다.
‘령아… 괜찮은 게냐.’
* * *
“삼…촌…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이백의 품에 안긴 당령은 독선은 언급하며 울먹거렸다.
출관 후 지난 며칠간, 그녀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너무도 많이 잃고 말았다.
그중에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준 조부 독선도 있었다.
이백은 말없이 당령의 등만 토닥였다.
그녀가 슬픔을 다 쏟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때문인지 당령은 울고 또 울며,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슬픔을 쏟아냈다.
우는 것도 체력 소모가 크다.
며칠간 실의에 빠져 식사도 거른 당령이기에 울다 지쳐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이백은 그녈 조심스럽게 눕혔다.
“너희가 보살펴 주거나.”
“예, 사부님. 아가씨는 걱정 마세요.”
당령을 제자들에게 맡긴 후 이백은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고맙구나, 백아.”
“아닙니다, 형님. 이기적일 수 있지만… 형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백의 말에 장철우는 물론 그의 곁에 있는 여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탓하지 않았다.
산 자는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란 죽은 자들의 희생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나쁘게 봐선 안 된다.
“다행은… 나 때문에 형님들이…….”
“그게 어찌, 가가 때문이에요. 그런 말씀 마셔요.”
자책하는 장철우를 위로한 여인은 당외삼비의 홍일점 당은이었다.
이백이 사천당가를 떠난 후 그들은 결국 맺어졌다.
다만 그들의 뜻에 따라 식은 치르지 않았다.
그러한 탓이 이백도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만 아니었어도 형님들께서…….”
“가가… 아니에요, 가가 때문이 아니에요.”
당외삼비의 당혼과 당묵은 그날 죽임을 당했다.
그게 꼭 장철우를 구하기 위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얽히긴 했다.
그러니 장철우의 죄책감이 적지 않았다.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평생 함께해온 당은에게 너무 미안해서.
당은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참, 가주 대리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가주… 대리입니까?”
독선이 죽었으니, 가주 자리가 공석이 된 건 이해가 되었다.
그런 가주 대리를 누가 맡았고, 자신을 왜 만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만남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곧 알게 되었다. 가주 대리가 누구인지.
“각주셨구려, 가주 대리가…….”
이백은 행정적인 처리로 정신이 없는 초로의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백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와주셔서 고맙소, 이 대협.”
“아니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령이는 제 조카이니 당연하오. 그보다 축하… 드려야 하외까? 가주 대리가 되신걸.”
이백의 물음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위만 본다면 영전이지만, 가문의 환란으로 독선은 물론 소가주 등 직계혈족들이 다수 죽었다.
그러한 탓에 얻은 지위이니 축하받고 기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은 직계혈족 중에서 서열이 높고, 무위가 가장 뛰어난 그가 가주 대리를 맡은 게 당연했다.
호천각주(護天閣主) 당자경, 그가.
“잠시 맡을 뿐이오, 제 주인에게 돌려줄 때까지만…….”
“그보다 본인을 청했다 들었소만, 도와드릴 일이 있소?”
가주의 자리를 누구에게 돌려주겠단 건지 모르겠지만, 이백에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당자경은 고갤 끄덕였다.
“설득해주셨으면 좋겠소.”
“설득이라 하면…….”
“령이가 폐관에 들 수 있게 말이오.”
“지금 그걸!”
당자경의 말에 이백은 울컥했다.
소중한 이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당령이다.
그런 조카가 눈에서 치우려는 당자경에게 화가 났다.
이백의 분노에 대기가 요동을 쳤다.
그의 경지를 알고 있는 당자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시오, 가주님… 그러니까 당문후 전(前) 가주님께서 남기신 명이셨소. 지금은 유언이 되었지만…….”
“…성급했소, 사과드리오.”
이백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당자경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조카를 위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괜찮소, 이해하오. 그리고 그분께선 만약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령이를 어디로 보내라 하셨소. 아, 자세한 건 귀하께 말할 수 없는 걸 양해해주시오.”
“그건 알겠지만, 어딘지도 모르고 령이를 설득하란 말이오까?”
독선의 유언이자 안배였다니, 설득이야 하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슬픔에 잠긴 당령을 어찌 설득한단 말인가.
이해한다는 듯 당자경이 고갤 끄덕였다.
“개파조사님의 유산이오. 만약 령이가 그분의 유산을 익힌다면… 이 자리를 온전히 물려받는 게 가능할 것이오.”
“이… 자리라니… 설마!”
놀라는 이백을 보며 당자경은 다시 한번 고갤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이백은 놀랐다.
당자경은 당령에게 가주위를 승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가주가 아닌 가주 대리를 맡은 것이다.
“본인의 뜻이며, 그분의 뜻이기도 하오. 그러니 령이가 여인이라는 장애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소.”
“그게 유산이란 말이구려.”
독존암제(毒尊暗帝) 당세기.
독과 암기의 조종(祖宗)이라고 불리며, 사천당가를 세운 절대자.
독과 암기를 모두 익힌 자는 많지만, 그처럼 두 가지 모두 절대자의 경지에 오른 자는 없다.
독선(毒仙) 당문후조차 이종(二宗) 중 독종(毒宗)만 계승하지 않았는가.
하나만 대성하기도 어려운 길인데, 당령에게 가시밭길을 걸으라 설득하라니.
이백으로서는 쉽게 승낙하기 어려웠다.
“귀하는 날 모질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아이를 위한 길이고 본가를 위한 길이오.”
“으음… 말은 해보겠지만, 설득까지는 장담할 수 없구려.”
당자경 역시 이해하는지 그 이상 부탁하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령이를 위함이 맞나.’
* * *
“흐읍… 하…하…….”
독선과의 격전이 결코 쉽지 않았던 듯 무존의 행색이 좋지 못했다.
특히 운기행공을 하는 그는 검녹색의 땀을 흘렸다.
그 땀이 닿는 옷이나 흙이며 모두 녹아버렸다.
놀랍게도 무존은 강한 독성을 지닌 땀을 흘리고 있던 것이다.
“후우… 후…. 지독하군. 보름 동안 배출했음에도 전부 배출하지 못하다니.”
무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당문후는 독선(毒仙)이라는 별호보다 수라(修羅)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지독했다.
특히 그의 독공은 만독불침(萬毒不侵)을 이룬 무존조차 중독시켰다.
그럼에도 결국 승리한 건 무존이었다.
중독되긴 했지만, 그를 절명시키지 못한 탓이다.
무존은 무(武)의 지존(至尊)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독(毒)을 제외한 내공, 보법, 백타(白打:맨손격투) 등 모든 면에서 그를 앞섰다.
만약 독선의 독이 조금 더 강했거나 중독된 무존이 악화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면 싸움의 향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허나 독선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맞섰고, 그게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궁주님을 뵐 면목이 없군.”
자신 때문에 보름이나 발이 묶였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궁주는 이미 그곳을 떠났다.
오직 그의 호법을 서고 있던 십인(十人)뿐이었다.
“십대신군이 부궁주님을 뵙습니다.”
“궁주께선…….”
“소림에서 기다리신다 하셨습니다. 운기행공이 끝나시면 화산과 종남을 정리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끄응… 소림은 직접 정리하시려나 보군.”
무존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독선을 죽인 대가로 중독된 건, 결코 비싼 대가가 아니다.
허나 그로 인해 소림. 정확히는 성승을 상대할 여력이 없다.
물론 몸을 완전히 회복한 후라면 가능하겠지만, 궁주는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궁주의 목표는 소림. 나아가 중원무림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우… 가지, 섬서에 들렀다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할 테니.”
혈사(血史)는 사천(四川)에서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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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