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신궁(神宮)의 공세(攻勢) (1)
“윽! 으윽!!”
영겁의 세월 동안 성화봉(聖火峰)에 피어올랐던 불길이 점점 사그라졌다.
기름을 붓고, 장작을 집어넣어도 성화의 불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성화마제는 마지막 수를 썼다.
자신의 기운, 성화마기(聖火魔氣)를 성화에 쏟아냈다.
효과가 있었는지, 약해지던 불길이 살짝이지만 살아나는 듯했다.
희망을 품은 성화마제는 계속 성화마기를 쏟아냈지만, 애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마경의 고수라도 마기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성화마제의 얼굴이 핼쑥해졌고, 하얗게 질렸다.
겉으로 이 정도이니, 그 속이라고 멀쩡하겠는가.
현기증이 일어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아, 안… 쿨럭… 쿨럭…….”
결국 미약하게나마 살아 있던 성화마저 꺼지고 말았다.
이를 본 성화마제는 절망하며, 연신 거친 기침을 했다.
검은 피가 섞여 나올 정도이니, 그의 몸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대, 대주님! 괜찮으십니까!”
“이대로 안… 우웩!!”
주변을 경계하던 성화수호대는 피를 흘리는 성화마제를 보곤 기겁했다.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는 걸 넘어 이젠 아예 피를 토하고 말았다.
임시로 성화수호대를 이끄는 성화구위가 성화마제를 부축했다.
성화마제는 그 와중에도 그를 미치며 성화단(聖火壇)에 다가가려 했다.
허나 성화구위를 밀칠 기력조차 없었다.
“대…주님…….”
공적으로 상관과 수하지만, 사적으로 숙질지간이기도 하다.
그런 성화마제의 이러한 모습은 그를 울컥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푹! 푸푹!
“너…….”
“죄송합니다, 대주님.”
성화구위의 검지가 성화마제의 혼혈(昏穴)을 눌렀다.
억지로라도 기절시켜, 기력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거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반탄력에 의해 오히려 성화구위의 손가락에 튕겼을 텐데, 그러하지 않을 정도로 성화마제의 기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성화구위는 성화수호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대주님은 제가 모실 테니, 그대들은 그만 쉬셔도 좋소.”
“명(命).”
성화구위의 지시에 성화수호대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화마제처럼 극단적으로 무리한 건 아니지만, 다들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니 성화구위의 지시에 반발은커녕 다들 반기는 게 당연했다.
혹시 지시를 거둘까 싶은 마냥 다들 빠르게 흩어졌다.
그러자 성화단(聖火壇) 주변엔 더 이상 아무도 없이 고요하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화가 꺼져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화단 안에서 무언가 뛰쳐나갔다.
허나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졌다.
애초 성화단에서 뛰쳐나온 게 없었다는 듯.
* * *
“사도련이 무너지다니! 그게 사실이오!!”
중원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특히, 무림맹이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림맹주 검제의 물음에 총군사직에 복귀한 제갈중경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비각(秘閣)이 확인한 바로… 그렇습니다.”
“허… 그럼 정말, 신궁의 소행이 맞단 말이구려.”
제갈중경은 고갤 끄덕였다.
비각과 개방의 교차 검증까지 마쳤으니, 틀릴 수 없다.
검제만이 아니라 무림맹의 수뇌부 전체가 침울해졌다.
신궁의 군사전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들떠 있는 게 고작 몇 달 전의 일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신궁의 호법원이 천마신교와 상잔했다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신궁에 대한 근심이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헌데 자신들을 농락했다는 듯 버젓이 사도련을 무너트렸다.
사도련은 사파무림의 연합체.
무림맹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그런 사도련이 무너졌다는 건, 약해졌다 생각했던 신궁의 힘이 건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허니 모두가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그때 제갈중경의 말이 이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을 신궁이 흡수했다 합니다.”
“설…마 사존도 그들에게 굴복했단 말이오!”
검제의 눈이 커졌다.
사도련은 세력도 세력이지만, 련주인 사존의 비중이 상당하다.
우내오존이 괜히 왜 우내오존이겠는가.
신궁의 편에 서서 사존이 중원무림에 칼을 겨눈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 자명하다.
그걸 알기에 검제가 이릴 당황하는 것이다.
“사존의 행방은 파악되지 않습니다. 군사부의 분석으로는 그가 죽은 걸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하아….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제갈중경의 입에선 확실하지 않다 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다.
사존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그리 표현했을 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이러한 표현을 할 자가 아니다.
그걸 알기에 검제와 수뇌부는, 사존이 죽은 것으로 보았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다행이라 할 수는 없다.
사존만 못하지만, 사도련에 소속된 초절정고수가 스물이 넘고 절정고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중 일부만이라도 신궁에 흡수되었다 해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소?”
안도하기도 무섭게 다시 심장이 아려왔다.
그만큼 제갈중경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 같이 충격적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번 역시 낙관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도련을 무너트리고 행적이 묘연해졌던 신궁의 고수들이, 광서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
“광서(廣西)? 광서에는 왜… 헉!”
제갈중경이 하려는 말의 요지를 깨달은 검제는 기겁했다.
그만이 아니다.
각파의 대표들답게 무림맹의 장로, 호법들은 대부분 검제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혈궁(血宮)!!”
“이, 이 미친 것들!!”
혈궁은 사도련, 패왕성과 함께 사파무림을 영도하는 거대세력이다.
궁주인 혈제(血帝)는 검제와 함께 이제(二帝)이고, 휘하에 있는 오대혈군 등 기라성 같은 사파고수들이 즐비했다.
그런 혈궁마저 신궁에 흡수된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가…능한 일이오? 신궁이라도 사도련을 상대로 무사할 리 없을 텐데…. 게다가 혈궁이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나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파제일세라는 사도련에 비해 혈궁이 모든 면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힘이 분산된 사도련과 달리 혈궁은 힘이 본궁(本宮)에 밀집되어 있다.
기습과 각개격파의 묘를 살려 사도련을 무너트렸다고 해도, 혈궁은 그 입장이 다르다.
그러니 희망적인 기대가 가진다는 게, 마냥 이해 안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런 그들의 기대를 와장창 깨버렸다.
“신궁이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다른 사람이라면 반박하겠지만, 그들의 기대를 깬 자는 제갈중경.
신산(神算)이라고 불리는 총군사다.
그가 이리 말을 한다는 건, 신궁 역시 승산이 있다 판단해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걸 알기에 분위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 사파놈들을 도울 수도 없고…….”
“그걸 말이라고 하십…….”
“나쁘지 않은 제안이오.”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하나 같이 고수답게 중얼거림조차 놓치지 않았다.
중얼거림에 반응한 자는 제갈중경이었다.
그의 말에 좌중은 기겁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군사님.”
“맞습니다. 상황이 좀… 그렇다지만, 어찌 사파놈들을 지원한단 말입니까.”
다들 신궁의 세가 커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사파를 돕는다는 것에는 거부감부터 드러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필두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 정파 출신이기에 이러한 부분에선 고지식하고 완고한 모습들을 보였다.
그런 그들을 답답했지만, 제갈중경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신궁은 지금껏 상대했던 사파나 마교. 그들과 다르다는 걸 아시지 않소.”
“그렇다고 해도…….”
예상대로 반발이 시작되었다.
수백 년간 쌓인 사파에 대한 감정은 쉬이 무뎌지지 않았다.
평생 수양을 쌓은 도가(道家)의 진인(眞人)이라도.
“이번만큼은 총군사님의 의견을 따르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흠흠… 빈도도 같소.”
“총군사님의 뜻은 이해하나, 본파 역시…….”
예상처럼 거센 반발이었다.
천하의 신산이 그들의 이러한 반발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 건, 이유가 있었다.
“혈궁이 신궁에게 넘어가선 아니 된다는 걸 모두 아시지 않소.”
“분명 말하지만, 본파는 그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없소.”
너무도 단호한 반응이었다.
제갈중경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귀파가 도우실 필요 없소.”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상대가 발끈하려 하자 제갈중경이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막았다.
자신의 말을 막은 자가 제갈중경만 아니었다면 쏘아붙였을 것이다.
“오해들 마시오. 본맹이 혈궁을 도운다고 말하지 않았소. 애초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럼 대체 누가 그 일을 한단 말이오?”
다행히 반발하려는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나 가증스러운 사파를 돕지 않는 것에 마음이 풀린 것이다.
제갈중경은 좌중을 스윽 훑고는 입을 열었다.
“사파는 혈궁만 있는 게 아니지 않소.”
“서, 설마… 패왕성!”
패왕성이 움직였다면 승산이 있다.
성주인 패황은 무당의 검선과 함께 무림십왕의 수좌를 앞다투며, 패왕성 역시 혈궁과 비견되는 거대 사파 아닌가.
혈궁과 패왕성이 손을 잡았다면 신궁의 공세를 막아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제갈중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적이었다.
“그러하면 좋겠지만, 패왕성이 움직이기에는 거리가 멀지 않소.”
“패, 패왕성 말고 혈궁을 도울만한 사패세력이 있단 말입니까?”
의아해하는 좌중을 보며 제갈중경이 씨익 웃었다.
“살막이 있지 않소.”
“아! 살막!!”
사도련, 패왕성, 혈궁을 사파의 삼대세력이라 보는 경향이 있다.
허나 제갈중경은 살막을 합쳐 사파사세(邪派四勢)라 칭한다.
세력만 본다면 살막이 삼대세력에 비해 손색이 있지만, 그들은 살수다.
동일한 시선으로 가치를 판단하면 오산이다.
‘고작 살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 자리에 있겠지만, 살막을 마냥 무시하지는 못한다.
살막은 ‘고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갈중경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신궁에 유감을 가진 세력이 살막만 있는 게 아니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