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만용(蠻勇)의 대가(代價)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사파제일인(邪派第一人) 사존이었다.
뇌공에게 축객령을 내린 이후 그는 명상에 드는 시간이 많아졌다.
왠지 모를 찜찜함이 그를 그리 만들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상에 잠겼던 사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사도련주이지만, 일선에 손을 떼었기에 그를 귀찮게 할 일이 없다.
헌데 명상에 잠긴 지금, 익숙한 기운이 자신을 방해하니 짜증이 일었다.
그의 외침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이닥쳤다.
“지옥사신(地獄死神)이, 련주님을 뵙…….”
“무슨 일인지 물었네.”
사존의 싸늘한 목소리와 섬뜩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명상을 방해받은 사존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두려워만 할 시간이 없었다.
“려, 련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 무림맹이라도 움직였느냐!”
사존의 목소리라 더욱 차가워졌다.
사파무림의 연합체인 사도련(邪道聯).
그런 사도련이 습격을 당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무림맹이나 천마신교 정도나 가능하다.
허나 천마신교일 리 없다.
세상에 알려진 건 아니지만, 사존쯤 된다면 천마신교에 일어난 일쯤은 알 수 있었다.
하찮은 일이라면 몰라도 천마신교가 휘청일 정도로 큰일이니,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그럼 결국 남은 건 무림맹이다.
헌데 무림맹이 미치지 않았다면 사도련을 습격할 리 없다.
그랬다가 정사대전으로 이어질 것이고, 무림맹이 그걸 원할 리 없으니 말이다.
“무, 무림맹이 아니라…….”
“그럼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부련주는 뭘 하기에 본좌에게까지 왔는가.”
사존은 사존이었다.
그가 짜증을 내자 주변이 반응해 흔들흔들거렸다.
지옥사신은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두려움만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 신궁입니다!”
“뭐라!!”
사존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염두하지 않았던 신궁이 움직였다니.
사지(四肢)를 잃은 신궁이다.
어찌 사도련을 습격할 수 있겠는가.
그때 뇌공의 서슬 퍼런 눈빛이 떠올랐다.
―후회할 것이다. 궁주께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실 테니!
축객령이 물러나던 뇌공의 마지막 외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아니, 생각하려던 그 외침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젠장! 궁주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겠지!’
* * *
“컥! 컥!”
적발의 중년인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내려보며 뇌공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양노괴(陰陽老怪), 부련주가 되었다고 무공 수련을 안 하나 봐.”
뇌공의 비아냥에도 중년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적발이었던 게 아니다.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당한 탓에 머리카락이 붉게 물든 것이다.
불가해(不可解)의 마학, 음양마공(陰陽魔功).
천무지체조차 익힐 수 없는 마학이다.
인간의 몸으로 극음(極陰)과 극양(極陽)의 마기를 동시에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게 가능한 존재가 바로 음양노괴다.
그는 사내이면서 여인인 음양인(陰陽人)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양인은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
설사 태어난다고 해도 그러한 괴물을 평범한 인간이 그냥 둘 리 없다.
대부분의 음양인은 주변의 두려움을 사 제대로 성장하기 전에 죽고 만다.
“기대했는데 재미없군.”
뇌공은 음양노괴를 내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우드득!
그 순간,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도련의 부련주, 음양노괴의 머리가 으깨지며 피와 뇌수가 흘러내렸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비록 무림십왕에 꼽히지는 않았으나 음양마공의 괴이한 힘으로, 그들과 비견되는 힘을 발휘하던 음양노괴다.
그렇기에 사도련의 부련주가 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런 음양노괴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사존, 어디에 있느냐. 그만 숨고 나와라!!”
뇌공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은 두려움이 떨었다.
무시무시하던 부련주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뇌공이 이끌고 온 괴물들에 의해 이미 사도련의 고수 일천(一千)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말이 쉬워 일천이지, 엄청난 수다.
게다가 하나 같이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부련주까지 죽였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사존에, 뇌공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덜 죽였단 말이지.”
“비, 빌어먹을!!”
“사, 살려줘!!”
나지막한 목소리였는데, 사도련 고수들의 귓가에 꽂혔다.
이류부터 초절정고수까지 다양했지만, 어느 한 명 제 목숨 안 소중한 자가 있겠는가.
모두 살기 위해 도망치려 했다.
“모두… 죽여.”
“명!”
뇌공의 명이 떨어지자 장로원의 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장로들과 그들이 이끄는 칠무단(七武團)의 고수들이었다.
사도련이 사파제일세(邪派第一勢)지만, 동시에 사파무림의 연합체다.
사도련에 속한 모든 고수가 본련(本聯)에 상주한 게 아니란 뜻이다.
수는 사도련 본련 고수가 많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칠무단의 상대가 아니다.
챙! 채챙! 챙! 챙!
푹! 푸푹! 서걱!
“커억!”
“으아악!!”
칠무단의 도검을 막거나 반격하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도망치다 등을 찔러거나 베였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일부는 동료들에 의해 밟혀 죽기까지 했다.
지옥(地獄) 그 자체였다.
짧은 사이 수십이 죽고, 수백이 죽어가고 있었다.
“흐흐흐… 죽어… 컥!!”
“으아악!!”
콰쾅!!
그 순간, 수십여 명이 폭발에 휘말려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중에는 사도련의 고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칠무단의 고수였다.
일천이 넘는 생명이 죽은 걸 생각하면 고작 수십이라 할 수 있지만, 분위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려, 련주님!”
“련주님께서 오셨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던 사도련 고수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무림은 군부(軍部)와 다르다.
특별한 존재 한 명만으로도 전황을 바꿀 수 있다.
사존(邪尊). 그는 절망하던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절대자였다.
허공을 밟고 하강한 그의 모습은 너무도 신비했다.
그 신비했던 모습과 달리 사존의 표정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뇌공, 지난번에 살려 보내줬더니 죽고 싶나 보구나.”
“너야말로 노부가 했던 말을 잊었느냐.”
흠칫!
사존은 뇌공의 말에 기를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신궁주가 직접 왔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수천의 기척이 감지되었으니, 그로 추정되는 기척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제야 사존은 안도했다.
그 모습을 본 뇌공은 사악하기 웃었다.
“두렵긴 했나 보군.”
“개소리 그만해라, 죽여줄 테니까.”
속내가 들킨 사존은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뇌공을 죽일 생각이었다.
아주 처참하게.
“어차피 노부를 죽일 생각 아니었나?”
“오냐, 죽여주마!”
사존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에 반응하듯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뇌공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아무리 뇌공이라도 저할 수 없는 기운, 의념기(意念氣)였다.
그걸 모를 리 없음에도 뇌공의 표정에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던 게 무의미하듯 뇌공은 의념기에 대항하지 못한 채 짓눌렸다.
‘그럼 그렇지… 네깟 게 뭘 할… 음?’
푸욱!
피육(皮肉)을 뚫고 지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고, 등에서 불에 지져진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사존의 기감을 속이고, 그의 등에 검을 꽂은 자가 있었다.
“개… 같은!”
“크윽!!”
일순간 사이한 기운을 받은 손이 암습자에게 꽂혔다.
사라지존수(邪羅至尊手).
사존의 성명절기이자 천사진경 최강의 무공이다.
전력이 담기지 못했다고 한들, 그 위력은 충분히 가공하다.
“영왕(影王), 괜찮나.”
“쿨럭…….”
뇌공의 물음에 그는 거친 기침에 섞여 나온 피를 닦으며 고갤 끄덕였다.
사존을 상대로 암습을 성공하는 신궁의 이장로 영왕.
과거 혈뢰음사의 우법왕이 살왕을 보고 착각한 인물이기도 하다.
칠무경의 하나인 음영(陰影)을 익힌 절대살수다.
살왕에 비견되는 영왕이다.
그의 존재를 모른 채, 뇌공에게 정신이 쏟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쥐…새끼가 숨어 있었군.”
으드득!
영왕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두 번의 실수는 없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실수가 너무도 컸다.
심장이 찢기진 않았으나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로 인해 운신의 폭이 확 줄어들고 말았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 의념기가 사실상 봉인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존을 노리고 있는 두 명의 화경고수.
뇌공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죽어라, 혈제(血帝)도 잡으러 가야 하니…….”
* * *
[‘성스러운 불’을 흡수했습니다. (99.7/100)]
지옥의 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공한 열기를 피워냈던 불길이 거의 사그라졌다.
성화가 꺼진 게 아니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 옮겼을 뿐이다.
천산의 정기(精氣)가 모인 성화봉(聖火峰)이 아닌 인간의 몸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허나 인간의 몸이되 인간의 몸이 아니다.
반선지경에 오른 반선지체(半仙之體).
인간으로서 존재를 반쯤 벗어, 신선에 반쯤 걸친 상태다.
그렇기에 성화가 새로운 둥지로 삼은 것이다.
[‘성스러운 불’을 흡수했습니다. (99.8/100)]
성화는 조금의 남김없이 이사를 맞춰갔다.
오랜 둥지였던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허나 성화가 새로운 둥지로 이사한다고 해서 천산의 정기가 메마른 건 아니다.
[‘성스러운 불’을 흡수했습니다. (99.9/100)]
[‘성스러운 불’의 마지막 불씨가 잠이 듭니다.]
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날을 고대하며, 마지막 불씨가 잠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백에게 깃든 성화에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니다.
[‘성스러운 불’의 흡수를 완수했습니다.]
[특수능력 ‘신안’을 이루었습니다.]
그 순간, 설군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허나 그 불은 설군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새끼 고양이만 했던 설군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늑대만 해졌다가 더욱 커져 황소만 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집채만큼 커졌다.
[‘신수 백호 설군’이 동면에서 깨어납니다.]
감고 있던 설군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드디어 설군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런 설군을 향해 이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설군아. 깨어나 줘서.”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