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예언(豫言) (2)
“방해하지 마라, 창마(槍魔). 노부는 교주님을 뵈어야 한다.”
성화마제는 노년의 창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팔대호법을 옭아맨 기운을 해소시킨 자는 바로 천마신교의 장로 수라창마였다.
아무리 그라도 성화마제를 막아설 수 없다.
평소라면 말이다.
신마(神魔)를 상대로 극심한 부상을 입은 성화마제다.
성화의 기운을 흡수해 급한 불을 껐다지만, 온전치 못했다.
그에 비해 수라창마는 무사했다.
마동(魔童)이 도망친 이후 전의를 상실한 앙천독마(仰天毒魔)는 항복한 덕분이다.
그러하다 보니 성화마제는 수라창마를 힘을 누르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이곳은 조사동이오! 게다가 교주께서 내상을 다스리고 계신데,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게요!”
“그건! 끄응…….”
수라창마의 호통에 그제야 성화마제는 이성이 돌아왔다.
성화의 기운이 약해진 탓에 반쯤 이성을 잃어, 평소와 달리 시야가 좁아졌던 것이다.
그라고 몰랐겠는가.
천마궁이 사라질 정도로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그로 인해 교주 천마가 자신 이상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이대로 성화가 꺼지기라도 한다면 그땐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가시오, 성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교주께서…….”
“그렇게는 안 되겠네.”
“성마!!”
이쯤 되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성화마제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생각지 못한 그의 막무가내에 수라창마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결국 그는 창(槍)을 들었다.
진마(眞魔)의 대치에 팔대호법은 침을 꼴깍 삼켰다.
팔대호법만 해도 어디 빠지는 자들이 아니지만,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진마는 격이 다르다.
중원무림에 무림십왕이 있다면 천마신교에는 그들이 있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배교자들과의 격돌이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들로서도 당혹감이 들었다.
그것도 이제 흔들린 천마신교를 추슬러야 하는 주역들이 이리 대치하고 있으니 팔대호법이 당혹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었다.
“갈(喝)!”
달려들기 위해 수라창마가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누군가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평범한 호통이 아니었다.
내공이 가득 담긴 탓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던 그들이 멈칫했다.
그리고 진원지를 향해 바라보았다.
그는 천마의 곁에 있어야 할 호법원주 마군자(魔君子)였다.
“교주께서 입동(入洞)을 허락하셨소.”
“교주께서 깨어나셨단 말이오!”
마군자의 말에 먼저 반응한 자는 수라창마였다.
그의 물음에 마군자는 고갤 끄덕였다.
천마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에 수라창마는 창을 거두었다.
더 이상 막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천마가 허락했는데, 그가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당연했다.
성화마제는 그를 지나쳐 조사동의 입구에 발을 디뎠을 때, 마군자의 책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습니까, 성마(聖魔).”
“노부 역시 알고 있네, 원주(院主). 그럼에도 교주님을 뵈어야 하네.”
조사동에 들어가는 성마의 마음도 무거웠다.
허나 어쩌겠는가.
천마신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성화가 꺼져가고 있는데.
“성마가 교주님을…….”
“예(禮)는 되었네.”
천마를 대면한 성화마제는 부복한 채 극상의 예를 갖췄다.
허나 천마는 그것을 저지했다.
한가롭게 그의 인사를 받을 때가 아니었다.
성화마제가 아니었다면 애초 입동도 허락하지 않았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천마는 심기가 불편한 듯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자네가 이리도 경거(輕擧)할 친구가 아니거늘.”
“…죄송합니다. 교주님!”
천마의 질책에 성화마제는 머릴 숙였다.
유일한 마제(魔帝)급이라도 천마신교의 주인 앞에선 일개 교도일 뿐이다.
허나 이런 질책이나 하자고 그의 입동을 허락한 게 아니었다.
진중한 성화마제가 이리 반응했다는 건 그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말하거라, 성마. 본 교주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성화(聖火)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교주님.”
“……!!”
그의 말에 천마는 물론 곁을 지키고 있는 마군자 역시 눈이 커졌다.
그제야 성화마제가 천마의 상황을 모르지 않음에도 성급히 행동한 이율 알 수 있었다.
성화마제에겐 일생을 건 성화다.
그런 성화가 약해지고 있으니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을 것이다.
성화마제와 달리 천마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유가 뭔가.”
“그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옛 문헌에서도 이러한 기록이 없는지라…….”
애초 대처가 가능했다면 무리해서 천마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천마라고 해서 이 상황에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아무런 조치도 없단 말인가!”
“…급한 대로 기름 등 땔감을 준비시켰습니다.”
“회생(回生)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답하던 성화마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반적으로 불이 약해지면 땔감을 더 집어넣고 불씨를 키운다.
하지만 성화가 어디 보통 불인가.
단순히 땔감만으로 약해지는 기운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허나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으니, 땔감이라도 준비시킨 것이다.
“그럼 본 교주가 어찌해주길 바라나.”
“그건…….”
성화마제는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원해 찾아온 건 아니다.
그렇기에 천마의 물음에 이렇다고 할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성화가 약해졌다. 아니, 막말로 꺼진다고 한들 천마신교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성화가 피워진 천산에 시조천마가 터를 잡았기에 그곳이 천마신교의 근간이라고 불렸을 뿐이다.
물론 천마 역시 천마신교의 전통을 지켜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성화는 그 정도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 교주가 해줄 게 있다면 해주겠네. 허나 본 교주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네.”
“…….”
성화마제로서는 가슴이 답답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할 말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동시에 천마가 성화를 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이대로는 안 돼!’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닐지라도, 천마의 관심조차 벗어나게 되면 성화는 끝이다.
그러한 생각을 한 성화마제는 다급하게 말했다.
“구전이… 있습니다! 교주님!”
“구전(口傳)? 그게 뭔가.”
다행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천마가 반응했다.
작은 관심이지만, 최소한 의도대로 되었다.
성화마제는 성화의 수호자에게만 전해지는 구전을 밝혔다.
이를 들은 천마와 마군자는 눈이 커졌다.
“재앙… 멸망이라…….”
중얼거리는 천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입에 담기에 불길한 단어들이 아닐 수 없다.
성화마제로서도 성화의 수호자에게만 구전되는 예언을 밝힐 생각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않고 천마의 외면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밝힌 것이다.
‘제발… 제발…….’
성화마제는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그런 그를 보며 천마는 피식거렸다.
“본 교주의 꼴이 말이 아니지?”
“아, 아닙니다.”
천마의 뜬금없는 말에 성화마제는 당황했다.
난데없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의도를 알지 못해 당혹스러웠다.
천마는 성화마제는 바라보며 오만하게 말했다.
“이 꼴이 되었다고 해도 본 교주는, 천마(天魔)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성화마제의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들렸다.
실제로 천마의 눈동자에선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당황하는 성화마제를 향해 천마가 말을 이었다.
“재앙이니 멸망이니 하는 말, 두렵지 않네.”
“교, 교주님. 노신(老臣)은 그러한 의미로…….”
성화마제는 제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나 싶어 다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 했다.
허나 천마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함과 확신이 서려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아네. 그리고… 이번 일로 잃은 것만 있는 게 아닐세.”
“……?”
성화마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의문을 가진 채 입을 다물었다.
허나 곁에 있던 마군자는 아니었다.
그는 급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경하드립니다! 교주님!”
“허허, 아직 작은 단서를 얻었을 뿐이네. 축하받긴 이르지.”
마군자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천마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우내오존(宇內五尊). 화경의 끝자락이자 현경의 언저리에 있는 무림의 절대자들.
그런 이가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작은 단서라 칭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천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든다면 결국 전설의 탈마경(脫魔境)에 오른다는 뜻이다.
천마신교는, 나아가 무림은 새로운 전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성화마제의 재앙이니 멸망이니 하는 말에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다고 할 증거도 없는 오래된 예언. 아니, 경고 따위이지 않은가.
‘틀…렸어. 그 어떤 말을 해도 교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성화마제라고 이해 못 할 게 아니라 더욱 씁쓸했다.
초마경(超魔境)만으로도 극상(極上)의 힘을 발휘하는데, 탈마경이면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허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혼자라도… 해봐야 해…….’
* * *
“사, 사존 그자가…….”
종심(從心:7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부복한 채 머리를 바닥에 향해 바짝 숙였다.
신궁을 떠받치는 네 기둥의 하나이자 이젠 유일한 기둥이 된 장로원.
장로원주이자 대장로인 뇌공(雷公)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런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한 명 존재했다.
신궁(神宮)의 주인.
오직 그뿐이다.
“…….”
“죄, 죄송합니다! 궁주님! 신(臣)이 부족해 명을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궁주의 입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자, 뇌공은 눈을 질끈 감고 죄를 청했다.
구질구질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만 늘어날 뿐이다.
잘했다면 상을, 잘못했다면 벌을 내린다.
그게 바로 궁주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뇌공은 벌을 청함으로써 한 번의 기회를 기대할 뿐이다.
“…죽여달라면 죽여줘야지.”
“큭! 으윽!!”
한순간에 뇌공의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우내오존만 못하지만, 무림십왕의 일선일황과 비견되는 뇌공답지 않은 너무 허무한 죽임이 아닐 수 없었다.
“죽여달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열아.”
“허억… 허억… 허억…….”
뇌공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생각했지만, 그는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부, 분명 난 죽…었는데…. 어떻게…….’
죽었다 생각했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뇌공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단순히 환각에 빠졌던 것일까?
‘그… 고통은 진짜였는데…….’
사술의 대가라면 환각을 통해 허상을 진실로 믿게 만들 수 있다.
허나 뇌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느낀 고통은 결코 환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 두려움을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사존이 정신을 못 차렸다면, 정신 차리게 해주어야지 않겠느냐. 열아.”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