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혈불(血佛)의 최후(最後) (3)
콰쾅!!
“어, 어어!!”
“모두 피해라!!”
조금 전까지 굳건했던 군사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혼세미궁의 술’에 보호받지 못한 탓이다.
이파일가의 고수들은 민첩하게 움직여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이건만, 걸왕과 야차왕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무너지는 군사전의 파편을 밟으며 더욱 화려한 전투를 벌였다.
그 모습은 이파일가의 고수들조차 질리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저게 화경인가…….”
자전도군은 격이 다른 그들의 전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공동파 최연소 장로인 그이건만, 재능을 한계를 엿본 것이다.
결코 자전도군의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니다.
분명 그 역시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무재(武才)를 가졌다.
허나 화경은 재능만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애초 초절정지경만 해도 재능과 그 재능을 극대화시켜줄 무공. 그리고 이를 가르칠 스승이 맞물려야 가능한 경지다.
여기에 천운(天運)이 닿은 자 혹은 천의(天意)를 받은 자만이 화경에 오를 수 있다.
그만이 아니다.
사천당가의 당자경, 종남파의 태백진인. 그리고 제갈세가의 제갈중경까지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다만 누군가는 허탈함을. 누군가는 감탄을. 그리고 누군가는 인정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최악의 마물(魔物)이라더니, 조사님들의 기록이 틀린 거 하니 없구나!”
과연 개방은 개방이었다.
많다고 할 순 없지만, 불사강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놀라운 건 개방의 정보력만이 아니다.
걸왕 역시 개방이 배출한 고수 중에서도 역대급이라고 불린 거인.
“허나 만물에 불멸은 없는 법!”
“캬!!”
용의 형상을 한 강기가 야차왕에게 쇄도했다.
금강불괴인 야차왕이지만, 걸왕의 항룡십팔장은 무시할 수 없는지 몸을 피했다.
이를 예상한 걸왕이 또다시 항룡십팔장을 펼쳤다.
쇄도하는 항룡십팔장의 강기를 모두 할 수 없는 야차왕은 한쪽 팔을 내주었다.
쾅!!
“캬아아악!!”
팔이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니지만, 덜렁거리는 게 움직일 수는 없어 보였다.
허나 손해를 본 건 야차왕만이 아니었다.
“헉… 헉… 헉…….”
걸왕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항룡십팔장은 개방이 자랑하는 절학 중에 절학이다.
그 위력은 소림의 백보신권에 뒤지지 않는다.
허나 그 강력한 위력만큼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
걸왕쯤 되니 몇 번이나 펼칠 수 있지, 후개인 항룡개(亢龍丐)조차 항룡십팔장을 연이어 펼치는 건 부담된다.
게다가 상대는 불사강시.
내공을 아껴가며 항룡십팔장을 펼칠 수 없다.
헌데 수십 합을 겨루었으니, 걸왕이 지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젠장!”
걸왕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야차왕이 달려들고 있었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강시답게 다시 몸을 일으켜 움직인 것이다.
걸왕은 피하지 못하는 대신 되받아치기로 결정했다.
콰쾅!!
“컥!”
안타깝게도 밀린 쪽은 걸왕이었다.
급한 마음에 항룡십팔장 대신 파옥권(破玉拳)을 펼친 탓이다.
파옥권만해도 강권(强拳)으로 유명하다.
허나 야차왕을 감당하기엔 손색이 있었다.
“방주!”
“빈도도 돕겠소!”
화경급 고수들의 격돌에 초절정고수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걸왕에게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제갈중경이 검을 휘둘렀다.
이에 태백진인 역시 거들었다.
비록 몸 상태가 온전치 않지만, 초절정의 끝자락에 오른 두 사람이다.
그들의 합공이라면 야차왕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쾅!
“크윽!”
“끄응… 괴, 물…….”
착각에 불과했다.
그들조차 시간을 벌어주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들만 내상이 깊어졌을 뿐이다.
“항룡…….”
걸왕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항룡십팔장을 펼쳤으나 야차왕이 더 빨랐다.
콰쾅!!!
“커어억!!”
단말마의 비명에 다들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림의 큰 별, 걸왕.
그의 죽음에 다들 감히 눈을 뜰 수 없었다.
“누, 누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던 이들이 눈을 떴다.
“어? 거, 걸왕 어른!”
“방주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걸왕이 무사했다.
반대로 그를 죽이려 했던 야차왕이 찢겨진 듯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이파일가의 고수들은 걸왕의 어마어마한 무위에 경외감을 들었다.
정작 걸왕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누군가. 십왕… 아니, 오존께서 오신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주님.”
걸왕의 중얼거림에 근처에 있던 제갈중경이 되물었다.
무림십왕, 우내오존?
그게 웬 말인가.
“갑작스러운 부탁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주님.”
“자네? 서, 설마… 자네가!”
이파일가의 고수들은 놀란 듯한 걸왕의 외침에 의아했다.
대체 왜 저리 놀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물음에 모습을 드러낸 한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 * *
반 시진 전.
“망할 것들!”
전세가 역전되었다.
‘혼세미궁의 술’이 해소되면서 더 이상 능력 제한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 되었다.
헌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크아앙!!”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협조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이백의 말에 혈불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끈할 수 없었다.
그럴만한 상황이 된 탓이다.
황소보다 큰 백호(白虎).
혈불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대단한 영물이었다.
소림의 항마신공을 익힌 것처럼 사술을 통하지 않았다.
신수(神獸) 백호 설군.
서방의 수호신이라고 불릴 때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이백과 달리 온전한 신기를 품고 있다.
사악한 사술은 그냥 말로 천적인 셈이다.
‘혈법당주 그 머저리가 곤륜의 마물만 잡아 왔어도!’
신령한 기운을 품은 신수와 천적이라면, 사악한 기운을 품은 마물과는 상성이 좋았다.
그렇기에 곤륜산에 봉인되었던 흉수 혼돈을 잡아 오라고 혈법당주를 보냈던 것이다.
헌데 혼돈을 잡아 오긴커녕 혈법당만 전멸하고 말았고, 자신의 오른팔인 혈타마저 잃었다.
혈불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건방진 놈, 조금 유리해졌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혈문관살의 술을 시전했습니다.]
득의하던 혈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패황을 상대로 우법왕을 펼쳤던 혈계(血界)의 문(門)은 일정 지역을 자신의 권역으로 만드는 사술이다.
혈문관살(血門關煞)은 그 혈계의 문을 몸 안에 개방해 막대한 기운을 손에 넣는 초고위 사술이다.
물론 이런 막대한 장점이 있는데,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건 그만한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기운을 육신이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혈불은 두 번째 사실을 펼쳤다.
[금강혈신의 술을 시전했습니다.]
혈불의 전신이 붉게 변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술(術)’을 능가하는 또 다른 초고위 사술이다.
지금 이 순간 혈불은 금강불괴가 되었다.
‘반 시진, 반 시진 안에 죽인가!’
혈불의 눈동자가 피가 뚝뚝 떨어질 거 같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반 시진밖에 없기에 속단속결해야 했다.
‘혈문관살의 술’로부터 ‘금강혈신의 술’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혈문관살의 술’의 부작용은 심각했다.
“죽, 어라!!”
“어림없… 큭!”
목숨을 건 이유가 있다는 듯 혈불의 손속이 더 독날하고 위력적이었다.
외금강신을 이룬 이백의 가슴에 붉은 장흔(掌痕)이 남을 정도였다.
허나 붉은 장흔은 서서히 사라졌다.
[‘신수 백호 설군’의 가호가 깃듭니다.]
[‘신수 백호 설군’과 계약자 ‘이백’이 공명합니다.]
“고마워, 설군아.”
―흥, 별거 아니야.
설군은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이백의 말에 쑥스러워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은 츤데레한 매력의 설군이었다.
“성가신 호랑이 놈이!”
혈불은 장흔이 사라진 게 설군의 소행인 걸 눈치챘다.
그 순간 핏빛의 뇌우가 마구 쏟아졌다.
법뢰다라수(法雷多羅手)였다.
하나 같이 위력적이라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이백이 설군의 앞에 섰다.
“내 친구를 괴롭히게 둘 줄 알고!”
쏟아지는 뇌우(雷雨), 법뢰다라수를 향해 이백이 양손을 뻗었다.
참으로 무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쏟아 내리던 뇌우가 빗겨 나기 시작했다.
복천청룡(覆天靑龍).
일종의 차력미기(借力彌氣) 수법으로, 모든 뇌우를 되돌려 보낼 수는 없지만 경로를 벗어나게 하는 건 가능했다.
그 틈을 타 설군이 혈불을 노렸다.
“캬아아!!”
“헉! 망할!”
혈불은 뇌음보(雷音步)를 펼쳐 설군의 발길질을 피했다.
허나 완벽하지 못했는지, 가슴에 세 줄기의 혈선이 생겨났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금강혈신의 술로 금강불괴와 다름없는 상태였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위력이라 할 수 있다.
“파순(波旬)의 칼이여!”
혈불은 무형의 칼을 구현해 휘둘렀다.
본능적인 휘두름이 아니다.
혈라구천뢰음도(血羅九天雷音刀).
혈뢰음사의 절세도법으로, 그 위력은 패왕성의 패왕칠도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서걱!
“끼이잉!!”
“설군아!!”
도검이 통하지 않는 설군의 거죽이 베이며 피를 흘리고 말았다.
이를 본 이백이 기겁했다.
[‘신수 백호 설군’과 계약자 ‘이백’이 공명합니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의 일부가 ‘신수 백호 설군’에게 전이됩니다.]
더 이상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고, 상처 역시 더디긴 하지만 아물기 시작했다.
불완전하다고 해도 신기는 신기였다.
허나 혈불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림없지!! 검총(劍塚)의 비검(悲劍)들이여!”
허공에 수십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했다.
과거 우법왕이 펼쳤을 때에 비해 현저히 적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비탄(悲嘆)하여라!”
그 순간 수십 자리의 검이 이백과 설군을 향해 쇄도했다.
피하려고 한다면 피할 수 있지만, 설군이 뒤에 있기에 그럴 수 없다.
이백은 양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비검들을 흘려 버리고 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탓에 혈불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푸우~욱!
“이런 망할……!”
“아, 안 돼!!”
‘검총(劍塚)의 술(術)’로 구현한 비검(悲劍)의 수가 적었던 이유는, 파순의 칼을 거두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파순의 칼이 이백의 심장을 노렸으나 이를 눈치챈 설군이 그를 대신해 막았다.
사술은 시전하는 자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는 법.
우법왕이 구현한 ‘파순의 칼’도 위력적이었지만, 혈불의 ‘파순의 칼’은 그 이상이었다.
새하얀 설군의 거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반쯤 이성을 잃은 이백이 전력.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해 혈불을 후려쳤다.
“……!!”
그 위력이 얼마나 가공했는지, 혈불의 입에선 단말마의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에서 피가 쉴새 없이 흘러 아니, 쏟아져 내렸다.
뻥 뚫린 가슴에서.
허나 이백은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혈불을 무시한 채, 설군을 부여잡았다.
거대했던 설군의 육신이 점점 작아지더니, 새끼 고양이의 크기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부족해 숨 역시 약해져 갔다.
그걸 느낀 이백은 절규했다.
“아, 안 돼!”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