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군사전(軍師殿) (2)
“비틀어진 이치를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이상의 힘으로 부수면 되겠군요.”
원하는 대답이라는 듯 제갈중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의 말을 받아 이은 자는 이립도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가 제갈중경의 말을 받아 이었다는 것에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해보면 알겠지요.”
청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자신 없는 표정은 아니었다.
죽림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혜안이 발동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빽빽이 심어진 대나무의 숲이 보이지 않았다.
수십 그루의 대나무에 둘러싸인 칠층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보였다.
[‘삼라환상죽진’ 생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성공합니다.]
사람들의 감각을 속이고 있는 삼라환상죽진(森羅幻像竹陣)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갈 수 있는 길이 이백의 눈에 황금의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 길대로만 움직이면 되지만, 군사전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다른 이들은 위험할 수 있기에 아예 기문진을 해제하는 게 낫다.
[‘삼라환상죽진’의 근원을 파헤칩니다.]
[‘삼라환상죽진’의 축을 발견했습니다.]
고루거각을 둘러 심어진 수십의 대나무 중 한 그루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백은 그 대나무가 삼라환상죽진의 핵심이 되는 축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힘으로 삼라환상죽진을 억지로 부수는 것보다 축이 되는 대나무만 베는 게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후우… 합!”
이백의 손에 새하얀 백광이 어렸다.
강기(罡氣)였다.
그 순도나 집약도가 초절정고수의 강기를 상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백은 초절정고수가 아니니 말이다.
이백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새하얀 늑대가 무서운 속도로 삼라환상죽진에 달려들었다.
그리곤 수많은 대나무 중 한 그루를 물어뜯었다.
서걱~!!
그 순간 빽빽했던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고작 수십 그루의 대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눈이 커졌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황했다.
고작 수십 그루의 대나무뿐이라니.
“죽림이라 할 수는 없군.”
“이런… 이곳이 아니었나? 그럼 대체 신궁의 군사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파일가(二派一家)의 고수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수십 그루의 대나무는 몰라도 칠층의 고루거각이 보이지 않은 탑이다.
이파일가의 고수들과 달리, 판세를 읽는 군사(軍師)답게 제갈중경은 뭔가 낌새를 느꼈다.
“기문진만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이번에는 사술이 걸려 있네요.”
[굴절된 기운을 발견했습니다.]
[굴절된 기운을 분석합니다.]
[분석을 성공하였습니다.]
[혼세미궁의 술을 파헤칩니다.]
‘혼세미궁(混世迷宮)의 술(術)’은 과거 혈법주가 시전했던 ‘혼세마전(混世魔殿)의 술(術)’의 단점이 보완된 사술이다.
애초 ‘혼세마전의 술’은 혈법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내부에서 버틸 수 없다.
헌데 ‘혼세미궁의 술’은 특별한 심결만 익히면 지장을 받지 않는다.
혈뢰음사의 법황(法皇)이라고 불리는 혈불이기에 가능한 사술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칠층으로 구성된 고루거각이 있습니다. 감각만 속일 뿐 존재하고 있으니 저를 따라오시면 출입이 가능합니다만…….”
“다만이라니, 문제가 있는가?”
이백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한 자는 제갈중경이었다.
그의 타당한 의문에 이백은 고갤 끄덕였다.
“사술에 의해 내공과 체력 등 모든 능력에 제한이 생길 겁니다. 과거 비슷한 사술을 겪어 본 적이 있거든요.”
“사술을 푸는 방법은 없나?”
이백은 잠시 주저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술을 시전한 주체를 제거하거나 사술을 유지할 수 있게 내력을 주입하는 자를 제거해야 합니다.”
“시전자라면 혈불이라는 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럼 내력을 주입하는 자를 제거하는 게 낫지 않겠나?”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본능적으로 고갤 끄덕이고 있었다.
정답에 가깝지만, 문제가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닐 겁니다. 일전에 제가 상대했을 때, 그곳에 있는 모두가 내력을 주입 아니, 사술에 의해 빼앗으니까요.”
“……!!”
즉, 군사전 내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여야 사술이 풀린다는 뜻이다.
해결책이라 하긴 어려웠다.
무척이나 불리한 싸움이 될 거란 걸 알기에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설군이를 데려왔어야 했나.’
과거 이백은 설군과 함께 혈법주가 이끄는 혈법당을 무너트린 적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설군이 없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천문산장 출신이 하나 같이 뛰어난 고수들이지만, 신궁의 또 다른 무림 혹은 혈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할아버님과 이파일가의 고수들을 믿어야겠지.’
자신이 혈불을 꺾을 때까지 다들 버텨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느꼈는지 제갈중경이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만, 공동과 종남 그리고 당가의 정예들인데 지기야 하겠는가. 중원무림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자 말일세. 안 그런가들.”
“무량수불 맞습니다. 저희 종남이 보여주겠습니다.”
제갈중경의 말을 받아 이은 자는 종남파의 노진인으로, 이백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전(前) 천문산장의 총관으로, 종남파로 돌아간 태백진인. 바로 그였다.
종남파 장문인을 대신해서 그가 천하검수(天下劍手)들을 이끌고 왔다.
그중에는 이백과 몇이나 충돌했던 벽하도장도 있었다.
무표정이긴 하지만, 냉막했던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본파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겠습니다.”
“본가 역시…….”
일전에 신궁의 장로원에 당한 공동파의 자전도군은 벼르고 벼렸다는 듯 전의를 불태웠다.
이를 사천당가의 당자경이 받았다.
독선의 조카일 뿐만 아니라 암절(暗絶) 당자명과 차기 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다.
당자명이 소가주라도 왕좌가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분위기를 타자 이백이 앞장을 섰다.
‘이제… 진짜 시작이지.’
* * *
“음?”
대계(大計)를 위한 부수적인 소계(小計)를 구상하고 있던 혈불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움찔했다.
그렇게 무섭울 정도로 수하가 달려왔다.
“군사님! 삼라환상죽진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축이 저절로 파괴되었을 리 없으니, 불청객인가.”
혈불의 눈에서 살광(殺光)이 번쩍였다.
수하가 보고하기 이전에 삼라환상죽진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느낀 것이다.
살광에 수하는 움찔했다.
혈불은 군사답게 이성적이지만, 결코 선한 자가 아니다.
사람을 목숨 따윈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생각하는 자이니까.
공포는 바로 그의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
혈불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불청객을 맞이할 준비하라.”
“존명!”
수하는 살았다는 심정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이곳은 신궁의 네 기둥 중 하나인 군사전이다.
고루거각 내에는 혈불을 보좌하는 소군사, 정보분석관 등만 있는 게 아니다.
수백의 고수들이 포진해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혼세미궁의 술로 보호되고 있다.
삼라환상죽진은 파진 시켰다고 한들, 군사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알아차리고 잠입한다고 한들, 그들은 섶 지고 불 구덩이에 스스로 들어온 셈이다.
혼세미궁의 무서움을 알지 못할 테니까.
“헌데 어찌 좌법왕이 떠나자마자 들이닥친 거지?”
혈불은 신궁의 두뇌답게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우법왕을 구하기 위해 떠난 좌법왕.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곳에 들이닥친 적.
아니, 애초 군사전의 위치를 어찌 알아냈단 말인가.
“…병신 같은 놈, 설마 배신한 것이더냐.”
혈불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번뜩였다.
우법왕의 배신 따윈 염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 그의 배신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우법왕의 배신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보망에 구멍이 생긴 건가. 그건 좀 곤란한데…….”
곧 죽을 불나방들 따윈 문제가 아니다.
허나 정말 정보망에 이상이 생겼다는 그건 문제다.
군사전의 최대 능력은 바로 정보에서 나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숙성.
나아가 이곳 난주까지 적이 들이닥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크나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혈불은 불나방들을 처리한 후 정보망부터 점검해야겠다 결심했다.
그러는 사이, 적이 군사전에 침입하고 있었다.
* * *
“쿨럭…….”
거친 기침을 내뱉은 좌법왕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놀라나. 본좌는 패황일세.”
“…….”
너무도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수 없기에 좌법왕은 이를 악물었다.
패황은 그러한 말을 할 만한 힘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몸으로 깨닫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찌… 법황에 버금가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고작 중원놈 따위가 어찌…….’
주제도 모르고 패황(霸皇)이란 별호를 사용한다고 비웃었다.
혈뢰음사의 법통을 전승한 법황이야말로 진정 황(皇)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혈뢰음사의 무맥을 이은 자신이 압도당하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우내오존도 아닌 무림십왕 따위가.
하지만 압도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이대로 당할 수 없어.’
패황의 강함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허나 혈뢰음사의 좌법왕으로서 패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패배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 대가가 너무도 잔혹하다고 해도.
뚝! 뚜둑! 뚝! 뚝!
무언가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그 소리는 좌법왕 이외에는 들을 수 없다.
그의 기맥(氣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호? 발악을 해보시겠다?”
“발악… 틀리지 않지만, 넌 죽는다.”
좌법왕의 얼굴이 냉막해졌다.
그것과 달리 좌법왕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점점 끈적하고 섬뜩해져 갔다.
강제로 선천진기(先天眞氣)를 끌어 쓴 덕분이다.
패황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운이 좋은 줄 알거라. 오존을 상대할 때를 대비한 절초에 처음으로 죽는 것이니까.”
“죽는 건… 너다.”
그들에게선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한 탓에 대기가 불안하다는 듯 울어대고, 대지는 두렵다는 듯 부들부들 떨어댔다.
오직 일격(一擊)에 생사가 갈리게 될 것이다.
“패황…군림(霸皇君臨)!”
“혈수인(血手印)!”
패황의 칼과 좌법왕의 손이 충돌하자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그들을 감싸았다.
그 빛은 이미 반파된 별원만이 아니라 그 일대까지 집어삼켰다.
콰콰콰쾅쾅!!
빛이 소멸되었을 때, 거대한 패왕성의 3할을 소멸시켰다.
“쿨럭… 법, 황께…서… 복…수…….”
“카악~ 퉤!”
쉬운 승리는 아니라는 듯 패황이 뱉은 건 핏덩이였다.
하지만 표정은 묘했다.
“기대하지 마라, 그쪽에도 괴물이 갔으니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