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별궁(別宮) (2)
훅~! 후후훅!!
검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빠름도 빠름이지만, 세밀하면서도 효과적인 검의 움직임은 그야 말로 검술의 정석과 같았다.
“허… 대단한 노인네군, 대체 누구이기에 저런 검술을 익힌 거지.”
“검술이 아니오, 검의 운용이 대단한 것이오, 권패.”
감탄하는 광룡권패에게 의견을 정정해준 자는 패왕성을 대표하는 검객, 청해검패였다.
검(劍)으로 청해무림에서 가장 큰 성세를 이룬 청해검문의 문주답게 청해검패는 단순히 노검객이 익힌 검술이 뛰어난 게 아님을 알아봤다.
광룡권패는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검패는 저 노인네가 누군지 아시나 봅니다.”
“권패도 들어 보셨을 게요, 무림맹의 총군사…….”
그들을 감탄하게 만든 검술을 펼치는 자는 바로 제갈중경이었다.
그는 우법왕의 ‘꼭두각시(傀儡)의 실(絲)’에 의해 이지(理智)를 상실한 채, 그의 비밀무기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이런 뛰어난 검의 운용을 보여주다니.
무림십왕에 가장 가까운 검객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광룡권패, 청해검패와 달리 다른 부분에서 감탄하는 자가 있었다.
“허허 그새 더 성장했군.”
감탄하며 대견스럽게 지켜보는 자는 바로 패황이다.
뛰어난 검의 운용을 보이는 제갈중경보다 그런 그를 능숙하게 상대하고 있는 인물을 본 패황이 감탄하는 게 당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이라도 제갈중경의 검세를 저리도 능숙하게 상대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십왕의 수좌를 앞다투는 패황이, 제갈중경을 쓰러트리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제갈중경을 상하지 않게 쓰러트리는 건 쉽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갈중경을 상대하는 자는 그러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이리 나약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청년의 외침에 그를 향해 마구 검을 휘두르던 제갈중경은 움찔했다.
하지만 언제 움찔했냐는 듯 더욱 예리하게 검을 찔러왔다.
[이상 상태 해제가 실패했습니다.]
황금빛으로 물든 이백의 눈에는 제갈중경의 심신을 조종하는 무형(無形)의 실(絲)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형의 실들의 끝이 우법왕에게 닿았다는 것 역시 보였다.
사술을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전자를 죽이는 방법이다.
허나 우법왕을 죽이면 신궁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없다.
그게 아니라도 그의 죽음으로, 제갈중경에게 가해진 사술이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땐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이백은 제갈중경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게 도우려 한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나.’
제갈중경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가 다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백은 피하거나 검을 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수십 합이 지속되니 마냥 제갈중경이 스스로 이겨내길 기대할 수 없다.
‘단번에… 단번에 간다!’
이백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손에 불길이 일었다.
남들의 눈에는 삼매진화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상단전에 자리 잡고 있는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다.
불완전하다고 해도 신기(神氣).
사술(邪術)과 같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힘에는 그야말로 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힘을 본인의 육신에 발휘하는 것과 타인의 육신에 발휘하는 건 다른 문제다.
아무리 ‘불완전한 신의 불꽃’의 본질이 신기라도 이백이 아닌 타인.
즉, 제갈중경에게까지 무해(無害)하다는 증거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백은 ‘불완전한 신의 불꽃’을 활용해 제갈중경을 깨우는 걸 보류했다.
‘실수는 없어야 해!’
이백은 빠르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제갈중경의 품에 파고들었다.
빠르거나 강하면 필연적으로 파공음이 발생해야 정상인데, 이백에게선 그러한 게 없었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 건 이백이 바람의 결을 타고 움직인 덕분이다.
퍽!
이백의 손이 제갈중경의 가슴을 가격했다.
“큭!”
제갈중경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육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백의 손속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 정확히는 제갈중경의 중단전을 통해 그가 신기를 주입한 탓이다.
그렇게 주입된 신기가 중단전에서 상단전으로 전해졌다.
사실 상단전에 직접 신기를 주입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그럼에도 이백은 중단전을 통해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건 상단전이 바로 머리에 위치한 탓이다. 사술을 깨려다가 자칫 뇌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림없지!’
이대로 그냥 당하지 않겠다는 듯 제갈중경의 심신을 장악한 ‘꼭두각시의 실’이 신기에 저항했다. 정확히는 저항하려 했지만, 괜히 신기를 천적이라 표현한 게 아니다.
‘꼭두각시의 실’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끊어져 갔다.
지금까지 고생시킨 사술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窮鼠囓猫).
‘어… 이런 젠장!!’
이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기에 저항하려던 ‘꼭두각시의 실’이 방향을 바꿔 제갈중경의 뇌를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지가 마비된 제갈중경의 육신이 이를 느끼고 요동칠 정도였다.
제갈중경이 요동치면서 그의 가슴에 닿았던 이백의 손이 순간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꼭두각시의 실’은 제갈중경의 심신을 더욱 옭아매려 했다.
“망할!”
더 이상 혹시 모를 후유증 따윌 걱정할 여유가 없다.
이백은 더욱 강한 불길이 일어난 오른손으로 제갈중경의 윗머리를 후려쳤다.
백회혈(百會穴)을 통해 직접적으로 신기를 밀어 넣기 위함이었다.
퍽!
부르르~!
제갈중경의 육신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때였다.
화아악!!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은 사악한 기운이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듯 일순간 강하게 피어올랐으나 한순간 사그라졌다.
그제야 격렬하게 떨던 제갈중경의 육신이 잠잠해졌다.
“후우… 재회 인사가 너무 과하지 않으십니까, 할아버님.”
* * *
“으으…….”
신음과 함께 닫혔던 눈꺼풀이 스스륵 올라갔다.
제갈중경은 당혹스러운 한편, 냉철히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깔끔한 침소.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깨끗한 의복.
몸이 쑤시긴 하지만, 자유로운 손발.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신궁…은 아닌 거 같은데…….”
강도 높은 심문을 받은 것까지 기억나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흡사 누군가 기억을 지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구금되어 있어야 할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이곳은 신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강자가 많다고 해도 자신 정도 되는 자를 아무 조치도 없이 풀어놓을 리가 없으니까.
“맞습니다. 이곳은 곤륜파 속가인 종학장(從鶴莊)입니다.”
“너, 너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제갈중경의 눈이 커졌다.
놀란 그를 보며 이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절 깜짝 속이셨더군요, 할아버님.”
“백이…로구나. 미안…하구나.”
일부러 속인 건 아니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허나 그 일로 이백에게 죄책감을 주었고, 마음을 짐을 지게 만들었다.
결국 이백은 소중한 걸 두고 떠나야 했다. 신궁의 뒤를 쫓았다.
덕분에 몇 번이나 신궁의 발목을 잡았지만, 이백에겐 몹쓸 짓을 한 것임이 틀림없다.
허니 이백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
그의 말에 제갈중경은 오히려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걸 느꼈는지, 이백은 말을 돌렸다.
“우법왕이라는 자,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하더군요.”
“잡았…느냐.”
제갈중경의 눈이 커졌다.
그런 반응에 이백은 씨익 웃었다.
“할아버님이 목숨을 거셨는데, 소손이 놓쳐서 되겠습니까.”
“허… 녀석…….”
여전히 자신을 할아버님이라고 칭해주는 이백이 고맙기만 했다.
제갈중경은 나직하게 말했다.
“놈은 어디에 있느냐.”
“성주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이백의 대답에 그는 고갤 끄덕였다.
패황이라면 우법왕을 데려갈 자격이 있다.
제갈중경은 몸을 일으켰다.
“가자꾸나. 패왕성에…….”
* * *
“커억!”
노승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그런 그를 보며 강도 높은 심문을 하던 자가 오히려 화를 냈다.
“젠장! 쇠힘줄 같은 늙은이!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아훅!”
결국 분통이 커진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노승은 괴로운 와중에도 히죽거렸다.
“개 같은 것들… 언젠가… 다… 죽여…주마.”
피떡이 된 노승의 정체는 혈뢰음사의 우법왕이다.
사파인 패왕성의 심문이 어찌 거칠지 않겠는가.
우법왕의 입을 열기 위해 너무도 거친 심문이 진행되었다.
허나 더 이상 사술을 펼칠 수 없음에도 거친 심문을 받으면서도 저들이 원하는 걸 밝히지 않았다.
혈불이라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의 사제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혈뢰음사를 받드는 두 기둥, 마공과 사술.
그중 사술을 계승한 자가 바로 자신이다.
그것만으로도 혈불은 자신을 구해야만 한다.
혈뢰음사의 영광스런 사술의 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좌…법왕 이놈은, 왜 이리… 늦는 거야.”
패왕성에 끌려온 지 수일이 지났다.
신궁 군사전(軍師殿)의 정보력이라면 자신이 붙잡혀 왔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을 리 없다.
미운 정(情)도 정(情)이라고, 항상 티격태격해도 자신을 구해줄 자는 좌법왕밖에 없다.
반대로 그가 이런 상황이라도 결국 자신이 나설 테니까.
그걸 알기에 우법왕은 강도 높은 심문에도 이를 악물고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원한은 꼭 갚아주겠다는 심정으로.
그때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어느새 인간의 형태(人形)를 띠기 시작했다.
검은 복면과 야행복을 입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허나 경계가 강화된 패왕성에 소리소문없이 잠입했다는 것만 봐도 보통 실력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좌법왕…놈 대신 보내셨나 보군. 빨리 풀어.”
“…….”
우법왕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복면인이 검을 뽑아 든 탓이다.
철로 제련된 검이건만, 광택이 죽어있었다.
평소 검 관리를 게을리한 게 아니라면 일부러 광택을 죽인 것이다.
전자가 아닌 후자라면, 그는 철저한 살수라는 의미다.
“네놈, 법황께서 보내신 게 아니구나!”
“…….”
우법왕은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님을 눈치챘다.
자신을 구속한 족쇄와 사슬을 끊기 위한 검을 뽑은 게 아니다.
그는 제 입을 막기 위해 검을 뽑은 것이다.
“법황께서! 네놈과 네놈의 배후를 용서치 않을 것…….”
호통을 치며 발악하던 우법왕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복면인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군사께서도 동의했다.”
“……!!”
우법왕의 눈이 커졌다.
복면인은 예상대로 신궁에서 온 자였다.
헌데 자신을 구하는 게 아닌 입을 막으러 왔다. 그걸 법황(혈불)의 동의했다?
그는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본 법왕의 배신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절규하고 저주하는 우법왕을 무시한 채, 복면인은 검을 휘둘렀다.
살수다운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살검(殺劍)이었다.
복면인의 검이 우법왕의 가슴에 향했다.
챙!!
“망할 놈들, 이럴 줄 알았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