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별궁(別宮) (1)
“그럼 설마 신궁이 아니란 뜻인가.”
신궁의 본거지로 알고 움직였던 패황으로서는 힘이 빠질 일이었다.
허면 이곳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네놈은… 누구냐!”
“흘흘흘 패황의 목이라면, 별궁이 발각된 걸 무마시킬 수 있겠지.”
신궁은 신궁이지만, 본궁(本宮)이 아닌 별궁(別宮)이었다.
오랜 시간 준비한 대계가 실패할 리 없으나 만약을 대비해 준비된 그야말로 별궁이다.
신궁의 뒤를 쫓으며 귀찮게 하는 쥐를 잡기 위한 쥐덫으로 잠시 사용했는데, 이리도 꼬리가 길 줄 몰랐다.
“허… 어이없군. 감히 본좌의 목을 운운해? 신궁의 종자인 혈뢰음사의 땡중 같은데 주제를 모르는구나.”
“흘흘흘, 하찮은 중원의 무부(武夫)에게 본 법왕이 하늘의 이치를 알려주마.”
패도의 황제라고 불리는 패황이거늘, 우법왕은 그를 너무 하찮게 보고 있었다.
아니, 중원의 무학 자체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천하무공출소림(天下武功出少林)이라는 말이 있듯, 중원무학은 소림. 정확히는 달마대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달마대사는 천축 출신이니, 중원무공은 결국 천축무림의 아류로 생각한 것이다.
그에 비해 혈뢰음사는 천축무림의 전설 뇌음사의 한 갈래.
중원의 무부 따윈 눈에 들지 않았다.
“감히 성주님을 모욕해!”
“어디 사이비 땡중이!!”
오만한 그의 반응에 패왕성 고수들은 당장이라고 폭발할 기세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패황을 모욕당했으니 당연하다.
허나 우법왕은 오만한 자격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강력한 사술을 펼쳤다.
“파순(波旬)의 칼이여. 내 눈앞의 적을 베어라!”
우~웅!
허공이 갈라지며 거대한 칼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운은 사람을 움츠려지게 만든다.
우법왕이 패황을 가리키니, 거대한 칼이 치켜세워지더니 그대로 내리찍었다.
후~우~웅~!
당장이라도 패황을 둘로 쪼갤 기세였다.
“가소롭군.”
마왕 파순의 칼답게 허공을 가르는 위용이 대단했지만, 패황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파지직! 파지직!!
칼과 주먹이 충돌하는 순간 수많은 뇌전의 불꽃이 피어났다.
패황을 베지도, 칼을 부수지도 못한 채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결국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칼과 주먹이 떨어졌다.
“그 무식한 놈 말고 또 막아낸 놈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베어주마!”
우법왕의 최대 적수는 바로 좌법왕.
두 사람은 항상 경쟁하며, 서로를 누르고 오르는 게 목표였다.
혈뢰음사의 사술과 마공 중 뭔가 더 뛰어나냐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펼친 ‘파순의 칼’의 술을 막아낸 자는 좌법왕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도 연이어 막아내지는 못했다.
쾅!
파지직!
쾅!
파지직!!
칼과 주먹이 몇 번이나 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말뿐이군.”
“이익!! 이번에야말로 죽여주마!!”
좌법왕도 이렇게까지 막아내지 못한 채 피해 버렸다.
헌데 패황은 파순의 칼을 연이어 맞받아쳐 냈다.
발끈한 우법왕은 전력을 다해 파순의 칼을 휘둘렀다.
패황이 아니라 그 할애비가 와도 막아낼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허나 패황 역시 이번에는 기필코 부수겠다는 일념이었다.
“패왕…진천(覇王震天)!”
패황이 창안한 진천패왕권(震天覇王拳) 중 두 번째로 강력한 권초를 펼쳤다.
뭐든 베려는 파순의 칼과 뭐든 부수려는 패왕진천이 격돌했다.
콰쾅!
파지직!!
굉음만큼이나 강한 반발력이 주먹을 타고 패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듯 고함을 쳤다.
“아~아~악!!”
이번에도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체념하려는 순간, 파순의 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꽈직! 꽈지직~!
콰콰쾅! 콰쾅!!
패왕진천의 위력을 버텨내지 못한 파순의 칼은 결국 부러지면서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큭! 으윽… 미친…….”
펼친 사술이 강제 소멸되면서 그 충격이 우법왕에게 역류되었다.
강력한 사술일 수록 강제 소멸시 역류되는 충격이 더 큰 법이다.
‘파순의 칼’은 고위 사술인 만큼 우법왕은 칼이 몸을 쑤시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독이 바짝 오른 우법왕은 이를 악물었다.
“옭아매어라! 쇄인지옥(鎖印地獄)!”
“어디 그런 하찮은 수작질이더냐!”
바닥에서 사슬들이 솟구쳤다.
패황은 가볍게 피했다.
허나 바닥에서만 사슬이 솟구치면 지옥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장과 주변에서도 뻗어 나와 패황에게 향했다.
피하려 한다면 못 피할 것 없지만,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 판단했다.
애초 사술로 구현한 사슬 따윈 부수면 그만이다.
그 순간 사슬은 뱀처럼 유연하게 패황의 다리와 허리를 옭아맸고, 그의 팔과 목 역시 옭아매기 시작했다.
“가소롭…다!”
챙! 챙! 채챙!
패황의 오른팔을 옭아맨 사슬이 끊어지며 동시에 소멸했고, 이어서 왼팔을 옭아맨 사슬도 같은 절차를 밟았다.
목을 죄인 사슬마저 끊는 사이 새로운 사슬이 다시 그의 팔과 목을 옭아매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 당해줄 패황이 아니다.
“으~으~으아악!!”
패황은 내공을 전신에 퍼트린 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그 힘을 사슬들이 버텨내지 못한 채 일제히 소멸하게 되었다.
이제 패황이 반격할 차례였다.
“고작 이딴 수작이…….”
“통했지. 시간을 벌었으니. 혈계(血界)의 문(門)이여, 열려라!”
언제 나타났는지, 거대한 문이 보였다.
악귀의 문양이 새겨진 핏빛의 문이 열리자, 암동 전체가 핏빛에 물들어졌다.
애초 쇄인지옥(鎖印地獄)의 술은 ‘혈계(血界)의 문(門)’의 술을 펼치기 위한 시간 벌이용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개수작을 부린 것인지 모르지만 소용없다.”
“흘흘흘 과연 그럴까.”
암동이 불길한 핏빛으로 변한 게 거슬렸지만,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허나 혈계의 문을 연 우법왕은 여유가 넘쳤다.
여기저기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음?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하아… 조금 피곤한데?”
패왕성 고수들은 왠지 모르게 몸에 부하(負荷)가 생겼다.
몸이 조금 피로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혈계의 문’의 술이 무서운 점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운을 조금씩 빼앗기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패황이 외쳤다.
“모두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라! 기운을 빼앗는 사술이다!”
“헛! 존명!”
“존명!”
그제야 패왕성 고수들은 내공으로 제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혈계의 문’의 술로부터 기운을 지키는 건 어렵다.
‘혈계의 문’의 술은 과거 혈법주가 펼쳤던 혼세마전(混世魔殿)의 술과 삼라만상(參羅萬像)의 술이 합쳐진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 초고위 사술이니 말이다.
오래 끌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챈 패황의 눈빛이 번쩍였다.
“단숨에… 죽여주마!”
콰콰쾅!!
패황이 휘두른 권격에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를 감당 못 한 우법왕 역시 신음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크윽! …쿨럭.”
널브러진 우법왕의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났다.
압도적인 위력으로 앞세워 몰아붙이는 패황.
우법왕도 열심히 대적하고 있지만, 연신 밀리고 있었다.
정작 승기를 잡은 패황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허억… 허억…. 망할 새끼!”
“쿨럭… 아쉽겠어. 이번에는 정말 본 법왕을 죽일 뻔했는데 말이야.”
무지막지한 위력을 맞았음에도 우법왕은 무사했다.
불괴(不壞)의 술(術) 덕분이다.
고위급 사술만큼 큰 내력 소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허나 우법왕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혈계의 문’의 술을 통해 패왕성 고수들의 기운을 빼앗아 보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기에 많은 기운을 빼앗을 수 없지만, 수백이나 되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패황의 입장에서 최선은, 일권(一拳)에 우법왕을 즉살시키는 것이다.
불괴(不壞)라 칭했지만, 그 이상의 위력이 가해지면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구중뢰(九重雷), 패왕진천(覇王震天), 패왕진천하(覇王震天下)까지.
‘패왕진천하까지 죽이지 못할 줄이야.’
진천패왕권의 절초들을 모조리 퍼부었고, 결국 오의라고 할 수 있는 패왕진천하까지 펼치고도 실패하고 말았다.
우법왕을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지만, 숨통을 완전히 끊지 못한 이상 무의미하다.
‘혈계의 문’의 술 때문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패황은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뇌패(雷覇)!”
“존명!”
패황의 외침에 진천각주가 한 자루의 칼을 던졌다.
허공을 가른 칼은 정확히 패황의 손에 빨려들 듯 쥐어졌다.
한손을 들 수 없는 크기의 거도(巨刀)였다.
허나 패황은 너무 가볍게 쥐었다.
“다시 이 녀석을 쥐는 날이 올 줄이야.”
패도적인 권법으로 유명한 패황이지만, 애초 패왕성주는 대대로 도법을 익혔다.
패황은 칼을 익히지 않은 게 아니라 놓았을 뿐이다.
더 이상 칼을 쥘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게 적합하다.
우법왕 역시 느낌이 좋지 않은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검총(劍塚)의 비검(悲劍)들이여!”
우법왕의 외침에 허공에서 수많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제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파순의 칼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기운을 담지 못했으나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기에 결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비탄(悲嘆)하여라!”
우법왕의 외침에 수백 자루의 검이 패황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패황 역시 칼을 휘두르며 대응했다.
그의 칼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적게는 두세 자루, 많게는 예닐곱 자루의 검이 소멸했다.
허나 우법왕이 날린 검은 수백.
베어도 베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은 패황은 결단을 내렸다.
수많은 검을 베던 패황의 칼이 어느 순간 둔해졌다.
푹! 푸푹!
결국 패황은 검에 찔리고 말았다.
“서, 성주님!”
“아, 안 돼!!”
패왕성 고수들의 기겁했다.
그때 패황의 칼이 움직였다.
그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을 결심한 것이었다.
“…무적!!”
후웅!
서걱!
그 순간 허공이 갈라졌다.
패왕무적(霸王無敵).
하후세가를 패왕가로 만들어준 패왕칠도(霸王七刀)의 마지막 초식이다.
갈라진 허공의 끝에는 우법왕이 있지 않았다.
대신 핏빛의 문이 있었다.
패왕무적은 단숨에 ‘혈계의 문’을 베었다.
그렇기에 ‘혈계의 문’의 술이 소멸되면서 핏빛으로 변한 암동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쿨럭… 말도 안… 우웩!!”
초고위 사술이 파훼된 후유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장(斷腸)의 고통에 우법왕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사실상 그 역시 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허나 그건 패황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혈계의 문을 베기 위해 펼친 패왕무적으로 인해 내공을 탕진뿐만 아니라 검총의 비검에 수없이 찔렸으니, 우법왕보다 낫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탓에 패황은 방심하고 말았다.
후욱~!
언제 움직였는지, 누군가 패황을 향해 검을 찌르고 있던 것이다.
패황은 눈치챘지만, 몸이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허나 더 놀라운 점은 검을 찌르는 자였다.
채앵!!
“살아계신 건 반갑지만, 정신은 차리셔야지요. 할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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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