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쥐덫 (3)
“헉… 헉… 헉…….”
거친 숨소리를 내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달리고 또 달랐다.
한시가 급했다.
혹시 모를 추적자도 추적자이지만, 붙잡힌 그를 구하기 위해선 한시라고 빨리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누군가가 추적하고 있다는 낌새는 없었다.
그렇게 산과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숨죽이며 주변을 경계했다.
‘허리띠! 그럼 개방!’
추레한 행색의 걸인(乞人)을 발견했다.
허리에는 걸인답지 않게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용두방주의 허리띠가 아홉 개인 걸 생각하면 고작 두 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각 분타의 분타주가 삼결제자다.
개방도 대부분이 이결 이하라는 걸 생각하면, 고수는 아니라도 이결제자를 무시할 건 아니다.
“이보시오.”
“누, 누구냐!”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개방의 이결제자는 깜짝 놀랐다.
하물며 복면까지 쓴 수상한 자이니, 경계심까지 드러냈다.
당연한 반응이기에 복면인은 불쾌한 기색 하나 들지 않았다.
경계하는 이결제자를 향해 복면인이 예를 갖추었다.
“무림맹 추암당주님을 모시는 비검(秘劍)이라 합니다. 본맹에 금지(金紙)를 보내야 하니, 분타주님께 안내해주시겠습니까.”
“그, 금지!”
이결제자는 깜짝 놀랐다.
무림맹의 전서 등급을 아는 자가 흔한 건 아니건만, 개방의 제자답게 금지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급하니, 빠르게 부탁합니다.”
“따, 따라오십시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멀지 않다는 이결제자에 그는 안도심이 들었다.
개방의 이결제자를 따라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개방은 다리의 밑이나 폐가, 능(陵)과 같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으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에 분타를 세웠다.
그렇기에 눈앞의 폐가가 개방의 분타라는 걸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분타주님은 안에… 큭!”
푸욱!
빨리 무림맹에 금지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비검은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보며 경악했다.
무엇보다 비수를 쥔 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아니… 왜…….”
“왜긴, 궁(宮)의 위치가 알려지면 안 되니까 그러지.”
비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결제자를 보자 그가 신궁에 포섭된 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개방도를 포섭한 탓에 신궁의 본거지가 이제까지 알려지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그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는 소름이 돋았다.
“젠…장… 안… 돼… 는…….”
“후우…….”
이결제자는 숨을 몰아쉰 후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비검의 몸 위에 뿌렸다.
치이… 치이…….
죽은 자가 점점 녹기 시작했다.
이결제자가 뿌린 건 시체를 녹일 때 사용하는 화골산(化骨散)이었다.
이러한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기 시작했다.
허나 그는 몰랐다.
이결제자와 접촉하기 전, 만약을 대비해 비검이 따로 흔적을 남겨두었다는 것을.
* * *
“무림맹? 무림맹에서 본좌에게 연락을 했다니, 별일이군.”
반백(半白)의 노인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파무림의 연합이라는 무림맹에서 자신에게 연락을 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탓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사도련, 혈궁 등과 함께 사파무림을 영도하는 패왕성의 성주, 패황(覇皇)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휘하에 있는 추암당(追暗堂)이라 합니다.”
“추암당이라면 그 신궁 놈들을 전담한다는 녀석들이지?”
패황의 물음에 진천각주(震天閣主)는 고갤 끄덕였다.
신궁에 유감이 많은 패황답게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린 시절 부친을 대신해 자신에게 권법의 기초를 가르친 인물.
천패(天覇)가 신궁과 손을 잡고 변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오패 용마창패(龍馬槍覇) 역시 이에 동조했다.
패황의 숨겨둔 한수. 진천각(震天閣)과 각주 덕분에 공백을 최대한 메꾸었다지만, 전성기에 비해 손색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한데 신궁에 유감이 없다면 그게 거짓일 것이다.
“추암당에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으음…….”
서신이라기보다는 쪽지라는 말이 더 적합했다.
[신궁 잠입, 미탈출. 지원…….]
쪽지에는 짧지만 엄청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전무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굵직굵직한 세력들이 눈에 불을 켜도 찾지 못한 신궁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잠입했으나 탈출에 실패했고 지원을 요청한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림맹이 아닌 본성에 전달되었다는 건…, 그만큼 위급하단 뜻이겠군.”
“그렇게 사료되옵니다. 주군.”
패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요청을 해왔다고 해도 굳이 들어줄 이유가 없다.
하물며 전달 과정마저 불확실한 서신(쪽지)이다.
패왕성의 입장에선 실(失)이 더 많은 일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본좌가 직접 움직이지.”
“……!!”
거절… 아니, 무시하기 마땅한 일이건만 패황은 오히려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패황의 호위를 맡은 진천각주로서는 만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패황의 의지는 확고했다.
“놈들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해서야 어찌, 본좌가 패황이라 불릴 수 있겠는가. 삼패(三覇) 모두 집결하라 전하라.”
“존명(尊命)!”
패황은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부족한 패왕성의 기둥인 사자도패, 청해검패, 광룡권패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에 진천각까지 움직인다면 패왕성의 8할에 해당하는 군세다.
생색나기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움직여 보겠단 뜻이었다.
“중원을, 본성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 * *
“커억!”
피범벅이 된 노인은 두 손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목숨이 부지하고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말하면 편해질 것이다, 신산(神算).”
“으…으윽, 으…….”
매달려 있는 인물은 무림맹 전(前) 총군사 제갈중경이었다.
혈뢰음사의 우법왕은 그를 죽일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숨을 거두지 않았다.
동정이 아니다.
오히려 무림맹의 정보를 얻기 위해 고강도 심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법왕의 주먹이 제갈중경의 복부를 가격했다.
퍽! 철컹~!
그 충격에 매달린 제갈중경의 허리가 반쯤 접혔다.
“커억!!”
“의식을 잃은 척한다고 속아줄 생각은 없다.”
제갈중경이 신음을 흘리는 건 고통 때문인 건 사실이지만, 의식을 잃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순순히 우법왕의 뜻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탓이 의식을 잃은 척했을 뿐이다.
헌데 그걸 우법왕이 귀신처럼 알아차린 것이다.
“그냥 죽여라. 노부의 입에서 무언갈 얻어낼 생각은, 기대하지 마라.”
“달아둔 꼬리는 이미 제거했다 했건만,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는군.”
“…….”
우법왕의 말에 제갈중경은 입을 다물었다.
만약을 대비해 남겨두었던 비검(秘劍).
비각(秘閣) 휘하 특무조장 한 명으로 제갈중경을 보좌하기 위해 차출된 인물이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무조 출신답게 제가 약조한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을 것이다.
물론 제 뒤에 붙을 추적자 역시 염두하고 말이다.
헌데 그런 그가 제거당했다고 한다.
‘비검, 자넬… 믿네.’
비각에도 몇 없는 특무조장 중 한 명이다.
우법왕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정말 비검이 죽었다고 해도, 그 상황을 대비했을 거라 믿었다.
그게 바로 평범한 무력대와 비각 특무조의 차이다.
우법왕은 그런 제갈중경의 작은 기대조차 자근자근 밟아 희망의 끈을 끊어 버릴 작정으로 말했다.
“왜 궁(宮)이 지금까지 발각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 기관장치로 치밀하게 숨겨져 있어서? 이곳을 자네만 발견했을 거라 생각하나?”
“……!!”
명석한 제갈중경은 우법왕의 진의를 눈치챘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반응에 우법왕은 조소를 지었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포기하고, 편해지라고 말이다.
“이 일대는 모두 궁의 눈과 귀가 심어져 있네. 그러니 이 일대에서 벌어진 일이 밖으로 전해질 일은 없지. 뭘 기대하는지 몰라도 한 가지 확실히 말하면, 꿈 깨게.”
“…개방도…….”
제갈중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개방의 용두방주 걸왕(乞王)은 자유롭고 철없이 보이지만, 오히려 치밀하고 지도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눈을 속이고, 개방의 분타를 집어삼켰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신궁의 능력을 생각하면 아예 불가능하다 확신할 수는 없다.
“이제 현실이 보이는가. …무림맹에선 어디까지 파악했지. 더 묻지 않지, 그것만 말하면 편안하게 해주마.”
“…….”
우법왕의 말에 제갈중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제갈세가 그리고 무림맹을 위해 달려왔다. 더 나아가 중원무림의 평화가 자신의 두 어깨에 있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죽음으로 위장하면서까지 베일에 싸인 추암당주 역할을 수행했다.
헌데 이리 몸과 마음이 궁지에 몰리니,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의지문(俠義之門)이라는 개방(丐幇)에서까지 변절자가 나왔으니.
미묘한 표정 변화이지만, 우법왕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흘흘흘… 심마(心魔)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나 보군.’
우법왕은 제갈중경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동시에 은밀하게 사술을 시전했다.
심신을 온전히 굴복시키기 위함이다.
허나 제갈중경도 만만치 않은 자다.
무림맹의 총군사였다는 사실 이전에 제갈세가의 태상가주다.
오대세가의 일원답게 많은 절학을 보유했고, 그 중 현원전단신공(玄元栴檀神功)이라는 희대 비공이 존재한다.
현원전단신공은 무학의 측면만 본다면 상승무공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신공절학이라 보기엔 손색이 있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무학의 측면일 뿐, 그 외의 부분에서 또 다르다.
뇌를 활성화시켜 이해력은 물론 사고력 역시 넓혀주고, 정신을 보호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제갈세가가 대대로 지자의 가문이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현원전단신공 덕분이다.
그 때문에 우법왕의 섭혼술을 먹히지 않았다.
‘씨앗이 완전히 발화하면 끝이지.’
‘심마(心魔)의 씨앗(種)’이라는 사술은 의심을 일으켜 점점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
종래에는 심마. 정확히는 주화입마까지 빠지게 만드는 무서운 사술이다.
그만큼 사술이 완성되는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그러한 이유로 우법왕은 직접 강도 높은 심문을 진행한 것이다.
물론 우법왕은 단순히 제갈중경의 심지가 무너트리려는 게 아니다.
보호받고 있는 정신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심지를 장악할 생각이다.
‘꼭두각시(傀儡)의 실(絲)도 슬슬 준비해야겠어.’
과거 혈법당이 소항(蘇杭)에서 부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던 혈법술과 비슷한 사술이다.
“…노부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