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청하지 않은 자(不請客)들 (3)
“미, 미친…….”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사백이나 되던 삼세(三勢)의 고수 중 멀쩡히 서 있는 자는 고작 수십에 불가했다.
대부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 아니, 한 마리의 짐승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새 떼와 뱀 떼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것도 잠시.
고수들답게 신색을 회복한 후 전열(戰列)을 가다듬었다.
진정한 절망은 그 후에 일어났다.
한 마리의 거대한 백호가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헤집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삼세의 고수들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을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데 든 시간은 고작 이다경(二茶頃:30분)에 불과했다.
아무리 영물이라지만,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빠드득… 백호…왕이라더니…….”
이를 갈던 혈뢰검군이 검을 들었다.
단순히 검만 든 게 아니다. 그의 검에서 당장이라고 피가 뚝뚝 떨어질 거 같은 핏빛의 기운이 번들거렸다.
그러자 벽라검귀와 지옥사신 역시 각자의 애병을 꽉 쥐었다.
자존심이 상하나 저 괴물을 혼자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혈뢰검군은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가 일격을 가하면 두 분이 발을 묶어주십시오. 혈천뇌우를 펼치겠습니다.
―……!!
―맡겨주시오.
웬만한 절초로는 안 될 거라 판단한 혈뢰검군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수를 꺼내기로 했다.
혈천뇌우(血天雷雨).
검치를 사경에 헤매게 만든 혈뢰마검의 절초 중에 절초다.
위력만큼이나 내공을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혈야검뢰(血夜劍雷)!”
핏빛의 검강이 설군을 향해 내리꽂혔다.
혈천뇌우처럼 일대를 초토화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호신강기조차 파괴할 정도로 가공한 위력을 자랑하는 절초다.
그럼에도 혈뢰검군은 확신하지 않았다.
“크…아아앙!!”
설군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단순한 울부짖음이 아니라는 듯 핏빛의 강기 혈야검뢰가 흔들렸다.
은은한 백광이 혈야검뢰를 찢어버렸다.
보검을 넘어선 예기와 강도를 자랑하는 설군의 발톱에 신기(神氣)가 어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이 애병을 휘둘렀다.
쾅!
그들의 애병은 설군에게 닿지 못했다.
그 전에 설군이 사라진 탓이다.
그로 인해 찰나의 틈이 생겨났다.
설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은 급히 애병을 회수하려 했지만, 설군이 한발 빨랐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들을 훑기 위해 허공을 갈랐다.
“제, 젠장!!”
“혈천(血天)!”
핏빛의 비가 설군에게 쏟아져 내렸다.
쾅! 콰쾅! 콰쾅! 콰콰쾅!!
그 틈을 타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은 몸을 피했다.
“뇌우(雷雨)!!”
“크앙! 크아앙!!”
괴로운 듯한 설군의 비명이 들려 왔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내공을 모조리 쏟아부은 혈뢰검군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헉… 헉… 헉…….”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다시 한번 혈뢰검군의 강함을 인지하며, 혈궁의 저력에 실감했다.
“수고 많으셨소, 혈뢰검군.”
“역시 혈궁의 후계답소.”
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어야 한다 생각했는지, 두 사람은 혈뢰검군을 치켜세웠다.
혈뢰검군은 제2의 혈제를 기대해도 될 정도로 강했다.
허나 그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어이없군.”
이백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들은 아차 했다.
상대는 거대한 백호(설군)만이 아니다.
그제야 그들은 아차 하며 성급했다는 걸 깨달았다.
백호왕 이백이 건재한데, 축배는 일렀다.
“설마 이 정도로 내 친구를 이겼다 생각하는 건가?”
“크…아앙!!”
그 순간 세 사람은 등골이 오싹했다.
건재한 건 이백만이 아니었다.
혈천뇌우의 폭격 속에서 백호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것이다.
고작 목숨을 부지한 정도가 아니었다.
털이 약간 타고 그을렸지만,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
“마, 말도 안 돼!!”
경악하는 그들을 향해 이백은 차가운 선고를 내렸다.
“너희의 목을 받으면 어찌 반응할지 궁금하군.”
* * *
“허…….”
눈앞의 광경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자가 있었다.
허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립은 조금 지난 듯한 장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제가 잘못 보는 거 아니지요, 국주님.”
“나야말로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걱정되오, 제갈 소협.”
그들은 만수문을 돕기 위해 여파현에서 달려온 적무산과 제갈천기 등이었다.
큰마음 먹고 달려온 이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대는 거대사파 혈궁이니, 목숨을 걸어야 했다.
헌데 막상 무란의 숲과 계속을 지나 당도하니,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니, 그게…….”
제갈천기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잘못한 게 없으나, 이 황당한 광경에 당황한 탓이다.
그래도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듯 적무산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 이 문주를 너무 모르고 헛걸음만 했군.”
“걱정해 이리 와주신 거 압니다. 감사합니다. 국주님, 형님.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감사의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 나타난 건 적무산과 제갈천기를 위시한 제갈세가 고수들만이 아니다.
흑림과 철혈방에서도 한 손 거들기 위해 와주었다.
헌데 그 모든 게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허탈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문주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대를 걱정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소.”
이백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철혈방은 여파현에 지부를 세웠다. 정확히는 휘하 귀양상단의 지부다.
원래는 철백이 오려고 했지만, 아직은 정양할 때라 철혈쌍혼의 도혼이 내려와 있었다.
그는 이백의 강함을 몸으로 겪어봤지만, 혈궁까지 이리 뭉갤 줄 몰랐는지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에 비해 흑림 망량의 전사장 귀인(鬼刃)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척했지만, 내심 허탈해하고 있었다.
적무산은 널브러진 삼세의 고수들을 흘기며 나직이 말했다.
“목숨…은 거둔 것 같진 않군. 다 가둘 곳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곳곳에 혈흔이 낭자했지만, 시산혈해(屍山血海)라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삼세의 고수들이 부상을 입긴 했지만, 숨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게 수배 어려운 법.
저 많은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했다는 건 이백의 경지가 자신들이 가늠할 수 없는 경지라는 뜻이었다.
이백의 말에 좌중은 움찔했다.
“가두다니요, 식충이들을 거둘 생각 없습니다.”
“뭐! 그럼 다 죽을 생각인가!”
놀란 적무산이 되물었다.
비록 적이라지만, 이미 불능상태가 된 자들이다.
이제 와서 잔혹하게 숨을 거둔 필요가 있나 싶었다.
허나 칼자루를 쥔 자는 이백이다.
자신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놀라는 그들을 보며 이백은 피식했다.
“죽이다니요, 제가 살인마도 아니고…. 응급처치만 한 후에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 죽으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백쯤 되어 보이는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반대로 그냥 돌려보낸다는 말은 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포로인데, 몸값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제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목숨들인데 몸값을 받아 뭐하겠습니까, 국주님. 아, 북천표국에 의뢰해도 되겠습니까? 형주상단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면 함께 의뢰하고 싶습니다.”
뜬금없이 의뢰를 한다는 이백의 말에 적무산은 의미를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자들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이백은 별거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말했다.
“혈궁에 저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대금은 혈궁에서 내주지 않겠습니까?”
“허…….”
적무산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혈궁(삼세)의 고수들을 돌려보내달라는 의뢰도 어이없지만, 대금은 혈궁에서 받으라니.
택배비용을 착불(着拂)로 지급해본 이백이나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허나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사파라고 해도 혈궁의 체면이 있지, 떼거리도 가서 두들겨 맞은 것도 쪽팔릴 텐데 표국 의뢰대금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포로들의 몸값이나 마찬가지이니까.
“형주상단은 귀주의 물자를 구매한다고 했으니, 아직 떠나지 않았을 거네. 내 이야기해둠세.”
“…북천표국도 의뢰를 받아들이지.”
양측에서 가져온 수레가 부족하겠지만, 그 정도는 이곳에서 얼마든지 조달이 가능하다.
이 정도면 잘 처리된 셈이다.
굳이 목숨을 거둬, 돌이킬 수 없는 원한만 맺는 것보단 훨씬 깔끔하다.
‘이 정도 망신을 당했다면 정신을 차리겠지.’
* * *
“쯧쯧쯧, 성급하군. 아직 때가 아니거늘…….”
붉은 가사를 입은 노승 혈불은 혀를 찼다.
혈궁의 움직임을 어느 세력보다 먼저 알아차린 곳은 개방이나 하오문이 아니다.
신궁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군사전이었다.
“제법 숨길 줄 안다 생각해 키워주었더니, 주제도 모르고.”
혈뢰검군은 혈제의 제자이지만, 그에게 인정받은 건 아니다.
혈궁의 정수라는 혈마경(血魔經)의 마학을 전수받지 못한 게 그 증거다.
그가 익힌 혈뢰마검은 혈마경의 마학이 아닌 파생된 검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낼 정도이니, 혈마경의 마학은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그런 혈뢰검군이기에 신궁의 손을 거부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역시 혈제인가. 이리될 줄 알면서도 모른 척하니 말이야.”
혈불은 혈제가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혈제는 독랄한 손속보다 혀가 더 매서운 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혈뢰검군은 가진 잠재력은 크나 사부인 혈제를 너무 의식했다.
적의를 숨긴다고 숨겼을 테지만, 결국 혈제의 눈을 피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쉽군, 쥐새끼가 들쑤시지만 않았어도 이참에 제거하는 건데 말이야.”
신궁 내에서 이백을 역천자라 칭하며, 살생부 상단에 이름은 올렸다.
그렇기에 기회만 된다면 제거할 요량이었다.
남만에서야 오독의 입수가 더 중했기에 어쩔 수 없다.
혈뢰검군이 조금만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신궁에서 은밀하게 손을 썼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섣부른 것도 있었고, 신궁의 협력자 혹은 안가 등이 적발되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혈불은 신궁의 군사로서 후자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혈뢰검군의 움직임에 발맞춰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법황이시여, 이참에 야차왕(夜叉王)을 시험해 보심이 어떠하십니까.”
“야차왕이라…….”
혈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복장의 노승에게 고갤 저었다.
“아니, 야차왕을 꺼낼 때가 아니네. 우법왕.”
혈뢰음사의 사술을 계승한 우법왕답게 결국 야차왕의 제강에 성공했다.
야차왕은 불사강시의 일종으로, 그 위력은 화경고수에 버금간다.
이로써 그간 입은 피해를 단숨에 회복한 셈이다.
그럼에도 혈불은 야차왕을 움직이는 것을 꺼렸다.
야차왕의 힘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필요할 때를 위해 잠시 숨겨둘 뿐이다.
혈불의 눈에서 혈광이 번쩍였다.
“오히려 자네가 직접 나서줘야겠네. 이참에 쥐덫을 놔야겠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