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청하지 않은 자(不請客)들 (2)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국주님.”
“집주인의 축객령을 객이 어찌하겠소, 제갈 소협.”
만수문의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왔던 북천표국과 제갈세가는 여파현에 와 있었다.
원래라면 용무를 마친 지금, 사천과 호북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떠나지 못한 채, 여파현에 남아 있었다.
귀가 있어 혈궁이 들이닥치려 한다는 걸 들은 탓이다.
“그럴 수 없으니 국주님께서도 남으신 거 아니십니까?”
“…….”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기 때문인지, 적무산은 반박하지 못한 채 뺨을 긁적였다.
따지고 보면 적문산과 이백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
사천당가의 의뢰로 선물(물자)를 전한 것뿐이다.
이백이 질녀인 당령의 의숙이라지만,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다.
헌데 이상하게 그게 되지 않았다.
고작 며칠 본 사이일 뿐인데.
“저는 돌아갈 생각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자네의 그 결정이 제갈세가에 어떤 폐가 될지 모르는가?”
작게는 소가주와 세가의 고수들을 잃는 것이고, 크게는 제갈세가가 혈궁과 직접적인 원한을 맺는 일이다.
아무리 제갈세가가 오대세가라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다.
“백 아우는 사사로이 제 의제고, 가주께서도 의자(義子)로 생각하십니다. 어찌 녀석의 어려움을 알고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난 북천표국의 국주일세. 표국이 위험해지는 걸 알면서 도울 수 없네.”
안타깝지만 적무산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이 일로 북천표국이 위험해질 수 있다. 아니, 위험해질 것이다.
헌데 어찌 강요하겠는가.
허나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십대표국에 꼽히는 북천표국의 전력은 대문파에 비견된다.
게다가 적무산은 사천십이대고수 아닌가.
그가 도와준다면 큰 도움이 될 줄 알기에 아쉽기만 했다.
적무산은 철전협표(鐵錢俠鏢)를 향해 말했다.
“국주로서 명령이오. 총표두는 표사들을 이끌고, 표국으로 복귀하시오.”
“국주!”
적무산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깨달은 총표두는 노성(怒聲)을 질렀다.
허나 적무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반문은 허락지 않겠소! 만약…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표국과 소운이를 부탁합니다. 형님.”
“자네 정말! 하…….”
발끈한 총표두이지만,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제 말이라면 어느 정도 수용해주는 적무산이지만, 이리 나올 땐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런 적무산이니, 사천무림의 명문세가인 금천세가와 척을 지면서까지 자신을 의형으로 모시지 않았겠는가.
“마음 같아선 한 손 거들고 싶지만, 소운이가 표국을 이끌 때까지 보잘것없이 이 늙은이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미안하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이런 상황에 당황스러운 건 제갈천기였다.
자신의 이기적인 청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고갤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국주님 저는…….”
“책임을 느꼈으면, 귀가(貴家)에 서신이나 보내주시오. 북천표국을 잘 부탁한다고.”
적무산이 없다고 한들, 금천세가나 평소 북천표국을 고깝게 본 이들이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천무림의 패자 사천당가의 공녀가 그의 질녀 아니던가.
허니 적무산의 이 말은 제갈천기의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한 농에 가까웠다.
그때 누군가 들이닥쳤다.
“흑림의 귀인이라 하오! 한 무리가 무란에 들어갔다 하오!”
“이런! 갑시다!”
* * *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게 맞소?”
보이는 것이라곤 숲과 계곡뿐이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섬인 해남도에서 나도 자란 벽라검귀로서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그만이 아니다.
혈뢰검군조차 자신이 잘못 알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광서의 계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무란(茂蘭) 속을 들어가니, 이젠 수많은 봉우리만 보일 뿐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도(道)를 닦는 도인이라도 이런 환경에 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오문 놈들이 날, 농락해!’
혈궁의 눈과 귀를 담당한 환요혈군의 도움을 받는 대신 하오문을 통해 정보를 취득했다.
그녀가 궁주의 애첩이니, 일부러 외부 정보집단인 하오문을 택한 것이다.
개방과 함께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하오문이니, 마냥 의심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럼 정말 이런 곳에 산다고?’
다행히 하오문은 그를 기만한 게 아니었다.
끝없이 많은 봉우리가 보이나 인적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일군 농지와 사람이 거하는 장원이.
아직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자 지옥사신이 의견을 내놓았다.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은밀하게…….”
“청하지 않은 자(不請客)들이로군.”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
기감이 예민한 지옥사신만이 아니다.
혈뢰검군과 벽라검귀 역시 이리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헙!”
“누구냐!!”
그들은 검을 겨누며 경계했다.
당장이라고 달려들 기세였다.
“청하지 않은 자들이, 집주인을 보고 누구냐 하는가.”
“네놈이 이백이라는 자더냐!”
벽라검귀는 사내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실제로 불청객들을 마중 나온 자는 이백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수백의 검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흡사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삼세(三勢)의 고수들은 불쾌함까지 느꼈다.
허나 그러든 말든 이백은 제 말만 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네놈이 이백이냐 물었다!”
노성과 함께 벽라검귀의 검이 이백에게 향했다.
중원에서는 생소한 좌검(左劍)을 처음 접한 자는 대부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하물며 해남파에서 손꼽히는 벽라검귀의 검이다.
검이 목을 향했음에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벽라검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거친 해적들을 상대로 해남을 지켜온 검이다.
좌검이라는 걸 떠나 그의 검은 강하다.
“왜 사람들은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할지는 모르겠군.”
“……!!”
그들은 눈을 의심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질 이백을 예상했거늘, 오히려 벽락검귀의 검날을 잡고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두 손가락으로.
얼굴이 시뻘게진 벽라검귀가 소리를 질렀다.
“미친! 사술을 익혔나 본데! 손가락을 베어주마!”
“사술이라… 왜 무림인들은 자신보다 강하면 항상 사술을 운운하는 거지? 자신이 약한 건 인정하지 않고?”
벽라검귀를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백의 손가락에 잡힌 그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벽라검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자, 잠깐!”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이백은 검날을 잡은 채 벽라검귀를 날려 버렸다.
검을 놔야 한다는 걸 알지만, 벽라검귀는 그러지 못했다.
검수가 검을 놓는 건 수치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백의 시선이 벽라검귀에게 쏠렸을 때를 놓치지 않은 자가 있었다.
‘단숨에 벤다!’
언제 움직였는지, 지옥사신의 대겸이 이백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인간인 이상 목이 떨어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법.
챙!
대겸이 이백의 목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물론 지옥사신의 의지가 아니다.
대겸과 이백의 목 사이에 한 자루의 검이 가로막고 있던 탓이다.
그 검은 나가떨어진 벽라검귀의 것이다.
이백이 손목을 튕겨 검날에 충격을 주자 대겸을 쥔 지옥사신 역시 튕겨 나갔다.
허나 그는 벽라검귀와 달리 안정적으로 땅에 안착했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주는 이백을 향해 혈뢰검군이 한걸음 다가왔다.
“과연 강하군. 허나 혼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버텨? 그리고 혼자라니, 누가 혼자라는 거지.”
이백은 영문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응에 혈뢰검군은 어이없단 반응이었다.
“본문이 왜 만수문(萬獸門)인지 모르나 보군.”
“금수(禽獸) 따윌 부린다 듣긴 했지만, 제정신이 아니군.”
맹수가 가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민첩한 움직임은 분명 인간보다 월등하다.
허나 어디까지나 범부에 한해서다.
삼세의 고수들 중 검기를 다루지 못한 자는 없다.
그 수가 사백이다.
그들에게 맹수는 오히려 사냥감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백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백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짜 무서움이 뭔지 보여주지.”
이백의 돌발행동에 삼세의 고수들은 움찔했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자 오히려 조소를 지었다. 그들의 조소는 너무 일렀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본능적으로 고갤 들어 하늘을 확인하는 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저것들은 뭐야!”
“미친! 전부 새는 아니겠지!”
수백 마리의 새가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누가 저리도 많은 새를 한 번에 봤겠는가.
조류 공포증이 없는 자라면 움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고작 새 따위에 긴장하느냐!”
“다가오면 베어 버려라!”
지옥사신과 벽라검귀의 호통에 삼세의 고수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통처럼 고작 새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푹!
“음?”
“큭!”
무언가 다리를 감싸는 기분이 들어 아래를 내려보는 순간, 삼세의 고수는 기겁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고 말았다.
하나둘씩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있으니 말이다.
“썅! 웨, 웬 뱀이야!”
“내공으로 독이 못 퍼지게 해!!”
하늘을 메운 수백의 새 떼 때문에 수백 마리의 뱀 떼가 접근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새 떼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들이 뱀의 존재를 눈치챘을 땐, 그들의 다리를 옭아매거나 물고 있었다.
독을 품고 있는 뱀이었지만, 극독은 아니기에 대처 못 하고 쓰러진 자는 고작 수십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삼세 고수들 사이에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백은 그들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내가 아쉽지.”
* * *
‘젠장! 지옥사자인 내가 애새끼들이나 인질로 잡아야 하다니!’
삼세(三勢)의 고수들이 이백에 의해 발이 묶이자 지옥사신이 휘하 살수들 일부를 움직였다.
만수문 장원에 어린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명이었다.
살막에도 굴복하지 않은 살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지옥사자들에겐 굴욕적인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불복 따윈 불가능하지만,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푸욱!
“……!!”
가슴에 검날이 툭 튀어나오고, 상의가 피에 물었다.
허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가려진 입은 신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지옥사자는 자신이 암살을 당한 순간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죽음은 그 한 명만의 일이 아니다.
만수문에 잠입한 모든 지옥사자들이 하나둘씩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모두 제거했습니다. 구천살(九天殺) 님.”
고작 다섯에 불과하지만, 살막의 살수들은 차원이 달랐다.
지옥사신의 수는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지옥교 쥐새끼들이 날뛰지 못 하게 해라.”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