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청하지 않은 자(不請客)들 (1)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열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 때, 더 이성 거친 숨소리도 뜨거운 열락도 가라앉았다.
중년 미부는 매혹적인 나신은 가린 후 나직하게 말했다.
“…혈천뇌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옵니다, 궁주님.”
“9성이라… 제법 많이 숨기고 있었군.”
하부만 간신히 가려진 혈제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어려 있었다.
알려진 혈뢰검군의 성취는 7성.
허나 혈천뇌우는 혈뢰마검(血雷魔劍)을 9성까지 익혀야 펼칠 수 있다.
이성(二成)의 성취나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더 이상 무위를 숨기지 않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두고만 보실 것이옵니까, 궁주님.”
“두어라, 미몽(迷夢)에 깨어나는 순간 깨닫겠지. 본좌가 누구인지, 제가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
혈제는 다 알고 있었다.
혈뢰검군이 해남파에 은밀히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사도련과 거래를 했다는 것을.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비밀은 비밀일 때나 큰 힘을 발휘한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면 무의미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면 검치 쪽도 모른 척하나이까.”
“그 역시 두어라. 그조차 처리 못 한다면 녀석의 그릇이 그것뿐이라는 뜻일 테니.”
혈뢰검군이 검치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다.
혈제의 명에 따라 환요혈군이 은밀하게 정보를 흘렸다.
이 모든 건 혈뢰검군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혈뢰검군은 어리석지 않다.
그럼에도 혈천뇌우를 펼친 건,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동시에 그만한 준비가 되었단 의미이기도 하다.
해남파와 사도련이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
“네가 무얼 믿는지 보여주거라. 무엇이 숨죽이던 널, 그리 자신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
처음에는 사존(邪尊)을 의심했다.
그라면 혈뢰검군의 허파에 바람을 넣을 만하다.
하지만 사존의 수라기에는 너무 유치했다.
고작 혈뢰검군 따위로 자신을 치울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모를 사존이 아니다.
그러던 중 신궁(神宮)이라는 정체불명의 세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허나 모른 척했다.
진정 그러한 세력이 있고,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때려 부수면 그만이다.
혈제(血帝). 사도련의 사존과 패왕성의 패황에 가려졌으나 그 역시 사파의 절대자다.
“…기대하마.”
* * *
“끄응… 흔적이 사라졌다 하오.”
자신만만하게 지옥사자들을 움직였던 지옥사신.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추적에 실패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탓이다.
“살수 나부랭이가 그럼 그렇지. 고작 부상 입고 도망친 늙은이 하나 못 찾아내니…….”
“뭐라고 했나, 섬 촌놈.”
벽라검귀의 비아냥에 지옥사신은 자신의 대겸을 쥐었다.
그깟 비아냥에 흔들릴 그가 아니지만, 단순히 벽라검귀 한 사람이 아닌 해남파와 기싸움 중이기에 발끈한 것이다.
반대로 벽라검귀 역시 아무리 사도련 소속이라도 고작 지옥교에 밀려선 안 되었기에 검파에 손을 대었다.
양측의 경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경쟁이 아닌 충돌은 혈뢰검군에게 긍정적이지 못하다.
“…조력자가 있는 거 같습니다. 검치를 빼돌리고 흔적을 지운…….”
“본교(本橋) 사자들의 추적을 훼방 놓을 정도라면, 이쪽 계통이 아니라면 어려울 진데…….”
지옥사신 역시 조력자의 존재를 염두하고 있었다.
지옥교는 손에 꼽히는 살문이고, 지옥사자들 역시 뛰어난 살수들이다.
그런 그들의 추적에 훼방을 놓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살막?”
“…살막이라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러겠소? 귀궁과 본련을 방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진데…….”
분하지만 살막은 최고의 살문이다.
지옥교의 사자들보다 눈과 귀를 속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그게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렇기에 지옥사신은 부정했다.
하지만 혈뢰검군은 달랐다.
‘뭔가 있는 건가. 의뢰도 거절한 것도 그렇고…….’
그는 살막의 개입을 확신했다.
동시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허나 그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오. 그러니…….”
“되었습니다. 검치의 목이 그리 중한 건 아니니… 계획대로 놈의 목을 거두러 가시지요.”
정말 살막이 개입이 맞다면 검치의 목을 거두는 게 중한 게 아니다.
이쪽의 움직임이 살막에 의해 ‘그’에게 전해졌을지 모른다.
혈궁을 방해한 자. 그의 목은 혈뢰검군에게 더 위로 올라갈 명분을 줄 수 있다.
그걸 위해 혈뢰검군은 해남파와 사도련을 움직였고, 숨기고 있던 무위까지 드러냈다.
세 명의 절세고수와 그들이 이끄는 수백의 고수들.
상대가 화경고수일지 모른다는 전제로 준비한 이들이다.
‘이제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그 시각, 검치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 * *
“쿨럭… 쿨럭… 우웩!”
더 이상 참지 못한 검치가 결국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가 입은 부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당장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니까.
“누군…지 모르나… 고맙소. 도망치시오… 그대까지 위험…할 수 있소.”
“…….”
혈뢰검군에게서 도망쳤다지만, 완전히 따돌렸다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지체하는 동안 지옥사신이 이끄는 지옥교의 살수들이 뒤를 쫓고 있을 게 뻔하니 말이다.
어차피 자신은 틀렸다.
자신을 구해진 복면인까지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
허나 그는 거절한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복면인이 나타나 고갤 끄덕였다.
“…흔적은 지웠소.”
“……!!”
복면인의 말에 검치는 눈이 커졌다.
사라졌던 또 다른 복면인이 어디 갔나 싶었는데, 추적자들을 상대로 도주 흔적을 지우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지옥교… 살수들이… 움직였을… 쿨럭…….”
“괜찮소.”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상대는 지옥교의 살수들인데 말이다.
검치는 그들의 방심을 지적하려 할 때, 또 다른 복면인이 말했다.
“떠났소.”
“쿨럭…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순간 검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자들이 아니다.
헌데 떠나다니, 납득하기 어려웠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귀주.”
“안 돼! …우웩!!”
한 단어였지만, 그 뜻을 알아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혈뢰검군 등이 귀주(貴州). 정확히는 이백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검치는 격정을 드러냈다.
그러한 탓에 다시 한번 피를 토하고 말았다.
허나 복면인들은 전혀 감정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흡사 감정이라는 게 없다는 듯.
검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아, 알려야 하오! 당장 알려… 으윽!”
“이미 보고했소.”
복면인은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을 부여잡던 검치는 대체 누구에게 보고했다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최소한 적에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들은…. 무사해야 할 텐데…….’
* * *
“임(臨)! 병(兵)! 투(鬪)! 개(皆)!”
어린 소녀의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고 날아가 버릴 거 같은 새가 멈칫했다.
“진(陣)! 열(列)! 전(前)! 행(行)!”
새와 소녀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태상노군(太上老君)! 급급여율령봉칙(急急如律令奉敕)!”
그 순간, 새의 눈빛이 바뀌었다.
소녀는 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자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소녀의 손 위에 올라탔다.
“우와~!!”
“저도 알려주세요! 소문주님!”
“저도요! 저도요!”
소녀가 새를 조련하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소년, 소녀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걱정 마세요! 다들 수련을 열심히 하면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저, 정말요! 정말 저희도 배울 수 있는 거죠!”
소문주라고 불린 소녀의 말에 그녀보다 나이가 조금 더 위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눈에 새를 조련하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도 신비로웠다.
아니, 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라도 충분히 놀랄 만한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본 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청년이 우쭐했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웃겨, 누가 보면 백수조련술을 터득한 줄 알겠어?”
또래 소녀의 말에 어린 청년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누, 누가 그렇데!”
“발끈하긴.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 강인호.”
강우혁을 제외한 만수문 제자들 중 백수십팔식(百獸十八式)의 성취가 가장 빠른 강인호이건만, 백수심법의 성취가 유난히 느렸다.
그러니 백수조련술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뒤처지긴 누가 뒤처져! 그깟 뱀 좀 부린다고 잘난 척은! 백수십팔식도 엉성한 게!”
“죽을래, 강인호! 엉성하긴 누가 엉성해!”
강우혁, 강우희 남매를 제외하고 대호족 출신 강유화가 백수조련술을 유일하게 익혔다.
그녀가 조련에 성공한 짐승은 바로 뱀이었다.
덕분에 같은 시기에 만수문의 제자가 된 이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백수십팔식의 성취가 가장 떨어졌다.
짝!
“집중 안 하십니까? 청랑조법은 안 배우실 거예요?”
“아, 아닙니다! 소문주님! …너 때문에 혼났잖아!”
“이게 진짜 죽을라고!”
이제 막 만수문의 제자가 된 여파현 출신들은 강우희가 가르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주목적이었다.
자의보다는 타의로 만수문 제자들이 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진해서 만수문의 제자가 된 야수족 출신들은 강우혁이 가르치고 있었다.
백수심법과 백수십팔식의 기본이 잡힌 이들이기에 숙련 위주로 수련하고 있었다.
그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청랑조법을 내세웠다.
8성의 경지에 오르면 살상력을 가진 청랑조법을 전수해주겠다고 말이다.
소문주들의 지도하에 만수문의 체계가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이백이 의도한 대로.
심산유곡에 위치한 만수문은 너무도 평온했다.
이러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건 구 총관을 위시한 살막의 살수들 뿐이다.
“문주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혈궁! 혈궁이 움직였습니다!”
“알고 있소, 구 총관.”
광서성에 나가 있는 지살들에게 혈궁의 움직임을 보고 받은 구 총관은 이백의 느긋한 반응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상대는 혈궁이다.
게다가 보고 대로라면 해남파와 사도련의 고수들까지 동행했다.
이백이 대단한 고수라지만, 그 외의 전력은 자신들이 전부다.
아무리 살막의 정예라지만, 다섯이서 판도를 바꿀 수 없다.
주변의 도움을 청해도 부족한데, 북천표국과 제갈세가의 고수 등을 돌려보내는 기행까지 벌였다.
살막의 특급살수로서 감정을 잊었다 생각했건만, 만수문에 온 이후로 자주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천살 본인조차 당혹스러울 만큼.
이백은 나직하게 말했다.
“무엇이 그리 두렵소. 내가 있는 이상 만수문의 식구,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