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개파식(開派式) (3)
“처음 뵙겠습니다, 국주님.”
어찌 알았는지, 만수문의 개파를 축하하러 온 자들이 있었다.
천문산장이 아니었다.
“령이 녀석이 그리 뛰쳐나가 많이 궁금했는데, 이리 만나게 되었구려.”
북천검(北天劍) 적무산.
북천표국(北川鏢局)의 국주이자 사천십이대고수.
그리고 당령의 외숙이기도 하다.
“령이… 그러고 보니 국주께서 령이의 외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이 문주 덕분에 나도 못 본 지가 꽤 되었소.”
북천표국에 거하던 당령이 수년 전, 이백의 소식을 듣고 호북(형주상단)으로 떠났다.
곧 돌아올 줄 알았던 당령은 형주상단에서 이백을 만나지 못했다.
그를 기다리겠다고 형주상단에서 수개월을 지내다 독선의 부름을 받고 사천당가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적무산은 조카를 몇 년째 보지 못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걸 느꼈는지 이백은 화제를 바꾸었다.
“뭘 많이 가져오셨다 들었습니다.”
“당가의 의뢰요.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다 전해달라 하더이다.”
당자원의 일로 어수선했던 일은 정리되었지만, 당령과 함께 독선이 폐관수련을 든 이후, 사천당가는 외부 활동을 자제해왔다.
그렇다고 봉문한 건 아니다.
그저 폭풍전야와 같은 상태였다.
게다가 이곳은 혈궁과 지척인 귀주의 최남단.
사천당가의 고수들이 움직이면 혈궁에서 어찌 반응할지 모르는 탓에 북천표국을 통해 안부와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과한 거 같습니다.”
“그건 당가에 따지시오. 우린 의뢰에 따라 전달했을 뿐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적무산의 말투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악의는 아니지만, 적의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때 적무산보다 서넛은 더 나이 많이 보이는 사내가 끼어들었다.
“이 문주께서 이해해주시오. 딸 같은 령이를 빼앗긴 거 같아 저러는 것이니.”
“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적무산은 말까지 더듬었다.
북천표국의 식솔 중 그에게 이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총표두뿐이다.
철전협표(鐵錢俠鏢).
무림세가의 위협을 받아 모두에게 외면받은 자를 고작 철전 한 개를 받고, 무사히 호위했다는 보표(保鏢)다.
그 의기에 반해 적무산이 의형으로 모셨고, 그 일로 북천표국와 금천세가는 원수지간이 된 건 사천에서 무척 유명한 일이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소운이랑 똑같군 그래.”
“커험…….”
적소운은 북천표국의 표사다.
그렇다고 평범한 표사는 아니다.
적씨 성을 가졌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적무산의 아들이면서도, 밑바닥부터 경력을 쌓기 위해 표사로 활동 중이다.
무뚝뚝하기로는 제 아비보다 더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유일하게 고종사촌인 당령에게만큼은 무너지는 누이바보다.
이번 표행도 따라오겠다는 걸 총표두가 간신히 말렸다.
제 아비처럼 이백에게 시비를 걸까 싶어서 말이다.
“먼 길 오셨는데, 며칠 쉬시다 가시지요. 빈방도 많고, 술도 넉넉히 준비해두었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지만, 흑밀주(黑蜜酒)도 있…….”
“흐, 흑밀주!!”
흑밀주라는 말에 적무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성을 질렀다.
남만의 흑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꿀, 흑밀(黑蜜).
그 흑밀로 만든 술이 바로 흑밀주다.
흑밀만 해도 보양(補陽)으로 유명한데, 그 흑밀로 만든 술이니 부르는 게 값이다.
다만 남만 흑봉일족만이 만들 수 있기에 시중에 구할 수 없어 그 가치는 더욱 높다.
헌데 그런 흑밀주가 있다니, 주당(酒黨)인 적무산이 고성을 지르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커험… 바쁘긴 하지만 먼 길 왔으니 며칠 쉬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국주, 자네 속 보이네만…….”
당령의 외숙인 적무산의 반응이 괜찮아 보여 이백은 안도했다.
남만을 떠날 때, 흑봉주(黑蜂主)가 돈 부족하면 팔아 쓰라며 한 수레나 실어주었다.
실제로 철혈방주를 통해 몇 동 팔아 만수문의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문주님, 나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또 누구 오셨소?”
적무산과 이야기를 잘 끝냈나 싶을 때, 구 총관이 왔다.
이백은 본능적으로 또 누가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호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설마… 먼저 나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우리도 이만 나갑시다.”
이백은 적무산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호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 행수 아니십니까.”
형주상단의 행수 현욱이었다.
그만이 아니다. 호위단의 부관 양진과 이백의 가르침을 받았던 호위단원들.
지난 이들이 떠올라 더욱 반가웠다.
허나 반가운 얼굴은 형주상단만이 아니었다.
“혀, 형님!”
“잘 지냈는가, 현 아우.”
호북하면 빼먹을 수 없는 또 다른 인연. 아니, 형주상단 이상의 인연인 제갈세가.
이백의 의형 제갈천기와 그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한 호연대(浩然隊) 고수들.
호연대는 원래 제갈현호의 친위대이지만, 그가 추암당(追暗堂)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잠시 제갈천기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이백은 마냥 반길 수 없었다.
“허허, 우형(愚兄)이 반갑지 않나 보구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반길 수 없던 건, 죽은 제갈중경이 떠오른 탓이다.
유언일지 모를 그의 청을 거절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이백의 그러한 반응을 눈치 못 챌 제갈천기가 아니었다.
“아우의 잘못이 아닐세. 그러니 자책하지 말게.”
“형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기쁜 날 아닌가.”
“예! 형님!”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에 이백은 기뻤다.
허나 반가운 얼굴들만 볼 수 있던 게 아니다.
불청객 역시 귀주로 향하고 있었다.
* * *
챙! 채채챙!!
검귀(劍鬼)란 별호가 무색하지 않게, 벽라검귀의 검은 무서웠다.
게다가 중원무림에선 쉬이 볼 수 없는 좌검수라는 점이 더욱 상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허나 검에 미친 자라고 불리는 검치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이리 버티다니, 검치라 불리는 자답군!”
나선(螺旋)을 그리며 몰아치는 검에 검치는 반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막거나 피하는 데 급급했다.
벽라검귀는 중원의 이름난 검호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흥이 올랐다.
과한 자신감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틈을 만들어내는 법.
수세에 몰려 있던 검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흐흐, 얼마나 더… 헉!”
검치의 검격은 완벽했다.
오랜 인내의 결실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채앵!
검치의 검은 벽라검귀의 가슴에 닿지 못했다.
닿기 전에 검치가 검로를 바꾼 탓이다.
“이런 아쉽군, 목을 거둘 수 있었는데…….”
“후우…….”
검치가 검로를 바꾼 건, 예상치 못한 암습 때문이었다.
그의 검이 벽라검귀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검치의 목을 노렸다.
뒤늦게 깨달은 검치는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을 노린 건, 대겸(大鎌).
“네, 네놈!!”
“살았으면 됐지, 뭘 사소한 걸 따져? 해남 촌놈.”
지옥사신은 벽라검귀를 살리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니다.
벽라검귀를 제물 삼아 검치의 목을 거두려 했을 뿐이다.
비록 혈궁이라는 공동의 협력자 때문에 동행하고 있을 뿐, 해남파와 사도련은 동맹관계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구명한다는 개념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자 중재하려는 자가 있었다.
“벽라검귀 님, 지옥사신 님. 검치는 본궁에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혈뢰검군께서 양보해달라면 해드리겠소만, 가능하시겠소?”
얼핏 그를 무시하는 발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벽라검귀의 의도를 그렇지 않았다.
애초 그는 사대혈군 중에서 환요혈군과 함께 말석으로 알려졌다.
지쳤다고 한들, 홀로 검치를 감당할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씨익~
혈뢰검군은 대답 대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협력관계이지만, 그의 목숨까지 신경 써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혈뢰검군에게 양보했다.
혈뢰검군은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자신의 검을 겨누었다.
“그만, 죽어줘야겠습니다. 검치 어른.”
쾅! 콰쾅!!
굉음과 함께 연신 폭발했다.
“끄윽!”
“흐흐… 아쉽습니다. 온전하신 상태로 베어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혈뢰검군은 신음을 흘리는 검치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강했다.
사대혈군의 말석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면 사대혈군의 무위가 잘못 알려진 것이다.
궁지에 몰린 검치의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철백에게 입은 내상이 도진 탓이다.
압도적인 전투를 본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작 이순도 안 된 자가 저리 강하단 말인가!’
‘이래서 부련주께서 제안을 받아들이신 건가.’
혈뢰검군의 나이를 생각하면 초절정지경에 오른 것만도 대단하다.
헌데 그는 초입은커녕 완숙의 경지도 아니다.
이미 초절정의 극에 올라 있었다.
내상을 입기 전, 검치와 비견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위력만 본다면 검치보다 낫다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가 이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헌데 그러한 사실을 왜 지금 드러낸단 말인가.
“쿨럭… 이런 실력을… 쿨럭… 숨기고… 있었군…….”
“더 이상 사대혈군이란 이름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무공을 전수해주었다고 해서 진정 사부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혈제에게 자신은 그저 무공을 시험할 실험체에 불과했다.
수많은 실패작 중 유일하게 성공작?
혈제에게 자신은 그러한 존재다.
그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혈뢰검군은 자신을 숨기고, 힘을 길렀다.
허나 마냥 숨기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가 되었다.
“이제 그만… 죽어주십시오.”
혈천뇌우(血天雷雨).
혈뢰검군의 검강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쾅! 콰쾅! 콰쾅!!
아무리 검치라도 저 속에선 살아남지 못 하리라.
검치가 있던 일대는 크고 작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헌데 검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단 말인가.
“젠장! 찾아라!”
“존명!”
그의 직속인 혈뢰각(血雷閣) 고수들이 움직였다.
놀란 벽라검귀와 지옥사신이 달려왔다.
“설마 그 속에서 살아 도망쳤단 말이오!”
“본교(本橋)의 사자(使者)들이 돕겠소!”
지옥사자는 살수답게 추적에 능했다.
이 정도로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허허… 우리 사이에 무슨 말입니까.”
지옥사신은 이 짧은 순간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혈뢰검군이 혈제의 허울뿐인 제자가 아니라면 빚 하나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발 늦은 벽라검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애초 자신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벽라도(碧螺島)의 검수(劍手)들은 지옥사자와 달리 추적에 능하지 못하니 말이다.
‘다 잡은 검치의 목을 이대로 놓칠 순 없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