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비사(祕史) (2)
“…따듯한 피로 물들어진 내 손과 여식의 울음이었네.”
이성을 잃은 검치가 사위를 제 손으로 죽인 것이다.
그걸 깨달은 이백은 아무런 위로보단 그저 검치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진이가 내게 울먹이며 말하던. 자신은 알고 있었다고… 구혼(求婚)하며 모든 걸 고백했었다고…. 그 순간, 노부는 멍해졌네.”
아비의 복수보다 검치의 여식 사진진을 택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검치는 자신의 제자이자 사위를 죽이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이라 탓할 수 없는 아주 비참한 상황이었다.
“진이는 울며 노부의 곁을 떠났지만, 붙잡을 수 없었네. …그리고 뒤늦게 알았네. 진이가 정이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진이를 찾았을 땐 이미 죽고, 정이는 사라졌네. 수년간 찾아다닌 끝에 알게 되었지. 한천검랑(恨天劍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검치가 천문산장의 봉공이 되는 건 당연했다.
지척에서 볼 수 없지만, 최소한 손녀의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십 년 전, 악우(惡友)의 임종 소식을 듣고 산장을 떠났네. 그때 누군가가 노부에게 접근했네. 그는 노부에게 이십 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는 삼십 년 전의 비사가 알려지는 게 싫다면 명령을 따르라 했네. 너무 겁이 났네. 정이가 노부의 정체와 그날 있었던 비극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네.”
“그가 누굽니까, 혈제입니까?”
검치는 고갤 저었다.
혈제의 빚을 지고 초웅비를 죽일 뻔했다.
헌데 혈제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천의검(天意劍).”
“설마 천의문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백은 깜짝 놀랐다.
천의문(天意門)은 십 년 전, 멸문된 문파였다.
지금까지도 흉수가 알려지지 않았다.
천의문의 멸문이 검치의 소행이라는 깨달았다.
허나 의문이 든 이백이 물었다.
“그럼 혈제는 어찌 엮인 겁니까?”
“천의검을 죽이고, 혹시 모를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천의문에 잠입했지. 다행히 관련 증거를 확보했지만, 빠져나오는 길에 발각되고 말았고. …천의문은 알려진 것보다 크고 강했네. 그때 노부를 도와준 게 바로 혈제일세. 그때 알았지. 천의문의 정체를…….”
천의문이 제법 이름이 알려진 문파이지만, 검치를 곤란에 빠트릴 정도는 아니다.
십 년 전과 지금의 경지가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게 가능했다면 천의문은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검치는 말을 이었다.
“기찰국(譏察局)의 비밀문파라고 하더군.”
“기찰국? 그런 곳이 있습니까?”
들어본 적이 없는 집단이었다.
아무리 이백이 [영웅:무림전설]의 스토리 작가였다고 해도 모든 세계관과 정보를 아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신궁의 정보 역시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백은 당시 일개 대리일 뿐이었다.
기찰국은 어쩌면 이백도 모르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황실의 비밀기관 중 하나라더군. 무림을 감시하기 위한 황실의 포석이라 할까? 후우… 노부가 벤 칠살도(七殺刀) 역시 기찰국 소속 무관으로, 무림에 녹아들기 위해 사파고수의 행세를 한 것이지. 난 그것도 모르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어르신은 기찰국의 무관이 아닌 사파고수 칠살도를 벤 것이고, 복수를 위해 정체를 속인 자를 죽이신 겁니다. 그게 어찌 어르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백은 위로 아닌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검치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혈제는 그날 도와준 대가로 세 가지 일을 해달라고 청했고, 난 거부할 수 없었네.”
“혈제가 그 일을 황실에 전한다면…….”
이백의 우려에 검치의 눈빛이 단호하게 바뀌었다.
“그러진 못할 걸세, 혈제 역시 얽혀있으니 말일세. 그땐 노부가 어찌할지 모를 혈제가 아닐세.”
“반대로 그걸 숨기기 위해 어르신의 입을 막으려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 부탁으로 포장해 이백을 통해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노렸던 것일지 모른다.
부정할 수 없는지, 검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네에게 폐를 끼칠 뻔했군. 조만간 떠나겠네.”
“혈궁 때문이라면 떠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어르신이 아니라도 그들과 충돌한 운명입니다. 이미 악연을 맺었으니까요. 차라리 그때 한 손 거들어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혈궁 그리고 황실과 비사로 얽힌 검치의 존재는 분명 부담스럽다.
허나 천문산장은 물론 교정정의 외조부란 사실까지 알게 된 이상, 그를 이대로 내보낼 수 없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아닙니다, 어르신…. 갑자기 든 생각인데…….”
“뭔가? 말해보게.”
“어르신의 사위가 칠살도의 아들이라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그것도 천의문의 소행입니까?”
어찌 보면 발단이 된 건 검치가 칠살도를 죽인 것과 제자의 정체가 발각된 탓이다.
이 모든 게 천의문. 더 나아가 기찰국의 음모가 아닐까 싶었다.
허나 검치의 반응은 이백의 예상과 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악우(惡友)가 알려주었네.”
“혹시 조금 전, 임종하셨다는 그분입니까?”
이백의 물음에 검치는 고갤 끄덕였다.
검치는 젊은 시절 많은 연을 맺었다.
그중에는 칠살도와 같은 악연도 있지만, 친우라 불릴 연도 있었다.
“맞네. 괴짜 중에 괴짜지만, 의협심도 강해 괴협(怪俠)이라고 불린 친굴세.”
괴협이라는 말에 이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치는 고갤 끄덕였다.
“맞네. 월야당(月夜堂)의 괴협. 허나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자들이 아닐세. 탐관오리와 부도덕하게 부를 쌓은 자들만 협박한 것이니. 뭐 그 역시 옳다 할 수 없지만…….”
월야당은 개방이나 하오문과 같은 정보집단이다.
개방이 의협심을 기반으로 두었고, 하오문이 정보 장사를 했다면.
월야당은 수집한 정보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데 사용했다.
다만 검치의 해명처럼 탐관오리와 부도덕한 부자만 노린 탓이 월야당에 대한 평은 많이 달랐다.
허나 이백은 그러한 이유로 얼굴이 굳은 게 아니다.
“혹시 신궁(神宮)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 *
“너무… 크지 않소?”
만수문의 장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이백은 제자들을 이끌고 무란(茂蘭)에 입성했다.
만수문의 장원은 무란 입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무란은 원시림으로, 계곡과 숲을 지나 수많은 봉우리 사이에 만수문이 지어진 탓이다.
“하하! 크다니요, 앞으로 번성할 걸 생각하면 이도 작지 않겠습니까!”
“작다곤 할 수 없지만, 이 정도 아니라면 앞을 나가기 어려우실 겁니다.”
만수문의 장원을 지은 촌장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허나 이백이 생각하기에는 좀… 아니, 많이 과했다.
현재 만수문의 식구는 고작 열이 조금 넘을 뿐이다.
헌데 장원은 이,삼백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쓸고 닦고 관리할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플 정도다.
동시에 이백은 촌장들이 자신을 그리고 만수문은 과하게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좋게 생각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곳을 관리나 할 수 있을지…….”
“그래서 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대장원을 지은 게 아니었다.
여파현에서 가장 큰 포의족의 북촌장이 대표로 말을 꺼냈다.
“만수문의 제자로 들어간 아이들의 가족들도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곳의 개간도 그렇지만, 장원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더 많은 제자를 뽑는 것도 고려해주시면 좋고요.”
나쁘지는 않았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지어진 장원이라고 하지만, 그 주변 평지가 제법 넓었다.
이십여 가구가 농사를 지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이곳만이 아니다. 봉우리를 지날 때마다 이곳보다 작아도 평지가 곳곳에 있으니, 개간만 할 수 있다면 사람이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계곡이 가까우니 농사에 사용할 물을 공급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아직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만큼 개간을 통한 자급자족을 염두해야 한다.
물론 이백의 계획에 있는 내용이었다.
없었다면 이런 곳에 자리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제하고 싶지 않소. 자의로 함께 지내실 가족이었으면 하오. 그리고 당장은 제자를 더 받을 생각이 없소.”
“이곳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사람이 더 필요하실 겁니다.”
촌장들의 우려에 이백은 씨익 웃었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자, 촌장들은 의아해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날씨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
그건 먹구름이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은 될 법한 새들이었다.
그 모습은 공포심을 줄 정도였다.
헌데 이백의 손짓에 모여든 새들이 흩어졌다.
“본문은 만수문이오. 부릴 수 있는 짐승이 새만이 아니외다.”
“그, 그렇습니까…….”
촌장들은 수백의 새를 부리는 이백이 두렵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백은 미소를 지었다.
“멧돼지들을 부려 땅을 뒤집고, 은서(隱鼠)들로 수로를 팔 수 있소. 조금 전, 보다시피 새들을 움직일 수 있으니 볍씨를 옮겨 뿌리는 것도 가능하오. 물론 농사가 그것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 거란 뜻이오.”
“가, 가능한 일입니까!”
이백의 말에 촌장들은 경악했다.
만약 그의 말처럼 가능하다면 소수로 대규모 농지를 운영할 수 있다.
이백은 씨익 웃었다.
“예전에 몇몇 마을을 몇 해 동안 그리해준 적이 있소. 무란에 짐승이 없다면 몰라도…….”
“하, 하하…….”
촌장들은 너무 놀라 헛웃음 밖에 안 나왔다.
무란과 같은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원시림에 짐승이 없을 리가 없다.
이백의 말처럼 이미 그러한 경험이 있다면 이곳 역시 가능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촌장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우리 마을 사람을 이리 이주시키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 남촌도…….”
먹고 살기 바쁜 시대다.
굶주림에 힘겨운 시절이기에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하지만 이백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안 되오. 본인의 눈에서 벗어나는 지역까지 도울 수 없소. 본인이 무란의 존재한 모든 짐승을 관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맹수가 습격하면 어찌할게요?”
“그, 그건…….”
봉우리 하나만 넘어도 십여 가구가 지낼 수 있는 평지가 나오고, 또 봉우리를 지나면 또 평지가 나온다.
그곳에 민가들이 생겨나도 그곳까지 치안이 확보되지 않는다.
이후 제자들이 성장해 더 넓은 지역까지 치안을 담당할 수 있기 전까지는.
인적이 드문 이곳에 산적이야 없겠지만, 무란 안에 어떤 맹수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백은 그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대신 여파의 개간이 필요한 땅은 도와드리리다.”
“저, 정말이십니까!”
“저, 저희 마을에…….”
실망했던 촌장들의 반응이 싹 바뀌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선 촌민들이 분산되는 것보다는 모여 있는데,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이주시키지 않고도 농지를 넓힐 수 있다면 최고인 셈이다.
“그건 차차 도움을 드리리다. 이리 장원도 지어주셨는데,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본문의 내부 정리부터 해야 하니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하오.”
“무, 물론입니다!”
이백은 기왕 시작한 일, 탄탄하게 만들어갈 생각이었다.
제자들 양성은 물론 대규모 농지 운영을 통해 재정확충.
짐승들의 관리를 통해 병력도 확대할 생각이다.
게다가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만큼 어떤 좋은 약초들이 있을지 기대가 될 정도다.
그러니 무란행은 어리석은 도박이 아니었다.
최소한 이백에게는 말이다.
‘사람은 천천히 모으면 되니까.’
이백은 생각지 못한 인재를 빠르게 얻게 되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