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비사(祕史) (1)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오!!”
복면을 쓴 수십여 명이 초로의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럼에도 초로의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난 막주님을 뵈어야겠다. 괜한 피를 보지 말고 비켜라.”
“건방진! 막주님이 뵙고 싶다고 해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복면인들은 섬뜩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럼에도 초로 사내는 여전히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복면인들은 당장이라고 달려질 기세였다.
그때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러나라.”
“명!”
노인의 명에 수십의 복면인들은 반박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 조직은 상하관계가 엄격해 항명은 즉살대상이었다.
노인들은 초로 사내를 보며 차갑게 노려봤다.
“아무리 혈궁의 혈뢰검군(血雷劍君)이라도 무례하군.”
“혈뢰검군이 천살공(天殺公) 님께 인사드립니다.”
초로의 사내는 혈궁의 혈뢰검군이었다.
그는 혈제의 명을 받고 살막에 청부를 넣었다.
헌데 거절당했다.
수년이나 청부를 받지 않은 살왕이니, 거절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혈뢰검군이 직접 살막을 찾아온 것이다.
허락도 없이 침입한 그를 막는 게 당연했다.
만약 혈궁의 혈뢰검군이 아니었다면 이미 피를 봤을 게 자명하다.
“인사는 되었으니, 그만 돌아가게.”
“그럴 수 없습니다. 막주님을 뵙고 청부하라는 궁주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궁주.
즉, 혈제의 명령이었다고 은연중에 협박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살막이고 살왕이라도 이제(二帝)의 혈제의 이름이 주는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헌데 천살공은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라버니의 말씀을 똥구녕으로 들었느냐! 어디 협박질이야!”
“우리 공주님은 어찌하고 이리 왔는가.”
웬 노파가 모습을 드러났다.
허나 혈뢰검군은 긴장했다.
노파의 정체가 천살공과 함께 살막쌍살이라고 불리는 지살후(地殺后)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살막쌍살(殺幕雙殺) 혹은 천지쌍살(天地雙殺)이라고 불리는 노괴들.
일선에서 물러난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노인들이지만, 그들이 무림에 남긴 공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살막의 원로이자 살왕과 동시대에 활동한 절대살수들이다.
개개인이 혈뢰검군의 밑이 아니다. 그건 무인으로서 기준이고, 암살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런 노괴들의 등장에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제가 조른 것이니, 천살 할아버지는 지살 할머니께 화내지 마세요.”
“공주님의 명이시라면…….”
천살공은 십여 살쯤 되는 소녀의 말에 과장되게 행동했다.
하지만 소녀의 지위는 결코 가볍게 볼 게 아니다.
살왕의 손녀이며, 피붙이 없는 살막쌍살이 친손녀처럼 생각하는 소녀이니까.
소녀는 혈뢰검군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살막의 천소약이, 혈궁의 혈뢰검군께 인사드립니다.”
“혈뢰검군이오, 살막의 공주를 뵈어 영광이오.”
살막의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천하의 살왕조차 뜻을 꺾게 만든다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천소약이었다.
그녀만 설득하면 살왕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허나 어리다 해 살왕의 핏줄이다.
호락호락하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할아버지이신 막주님께선 폐관수련 중이시어요. 그러니 혈궁주님께는 혈뢰검군 님께서 잘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 소저, 궁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막주님께서도 폐관을 끝내실 거라 생각하오.”
살왕의 폐관수련.
허나 혈뢰검군은 폐관수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살왕의 아들이자 소막주의 주화입마를 치료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극비 중에 극비지만, 혈제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소막주의 주화입마를 치료할 길을 제시한다면 살왕은 거절하지 못할 거란 뜻이기도 하다.
너무 자신만만한 탓에 혈뢰검군은 놓친 게 있다.
천소약은 소막주의 여식.
크게 놀라거나 기대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혈뢰검군은 그녀가 어리기에 진의를 깨닫지 못했다고 치부했을지 모른다.
“…막주님의 폐관수련을 끝내실 만한 선물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원래는 막주님께 직접 말해야 하지만, 천 소저이시니 알려드리겠습니다. …구룡신단(九龍神丹)입니다.”
천소약은 물론 살막쌍살마저 놀랐다.
그들의 반응에 혈뢰검군은 득의했다.
자신조차 놀랐는데, 구룡신단이 절실한 그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구룡신단은 내공증진도 증진이지만, 황제의 호신을 위한 영단이다.
해독은 기본이고 원기회복, 심신 안정에도 탁월하다.
즉, 주화입마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주화입마의 치료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무림인에게는 보물 중에 보물이다.
무엇보다 살왕의 후계자를 생각하면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황실에도 한두 알밖에 없다는 구룡신단을 귀궁이 보유하고 있다는 걸 어찌 믿지요.”
“…황실에 구룡신단이 한두 알밖에 없다는 게 알려진 건, 바로 무영신투(無影神偸) 때문이오. 그가 빼돌린 구룡신단을 궁주님께서 갖고 계시오. 이제 설명이 되었소?”
삼대신투라는 공공신투(空空神偸), 야래향(夜來香), 비천편복(飛天蝙蝠) 이전에 활동한 인물이 바로 무영신투다.
그의 입에서 구룡신단에 대해 알려진 이후 무영신투는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일설에는 황실고수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쫓겨 중원을 떠났다고 한다.
헌데 이제 보니 혈궁과 관계가 있는 거 같다.
구룡신단은 소막주를 치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단이다.
그럼에도 천소약의 태도가 너무 침착하자 혈뢰검군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구룡신단이 뛰어난 영단이지만, 무림십왕이신 막주님의 무공 증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네요. 안 그런가요, 천살 할아버지.”
“맞습니다, 공주님. 분명 대단한 영단이지만, 화경고수에겐 의미가 없지요.”
그들의 말처럼 구룡신단이 대단해도 화경고수에게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구룡신단은 살왕이 아닌 그의 아들을 위한 영단이자 치료제다.
아직 어린 천소약은 몰라도 천살공까지 구룡신단의 진정한 가치를 모를 리가 없다.
헌데 이러한 반응을 보이니, 혈뢰검군은 혼란스러웠다.
“천 소저, 막주님이 아닌 소막주께…….”
“혈뢰검군 님! …막주님께서는 폐관수련 중이십니다.”
살왕이 주화입마에 빠진 소막주의 치료 중임을 모르지 않다.
그럼에도 천소약은 이러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어려 아비의 상황을 모른다?
허나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다는 뜻이구나!’
당연했다.
혈뢰검군.
아니, 혈제도 살왕의 손에 제마범종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 제마범종을 내어준 자가 이백의 제자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제마범종은 천살혼(天殺魂)을 제어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법기다.
천살혼은 천살심공의 정수이자 일종의 심마(心魔)다.
즉, 제마범종이라면 주화입마에 빠진 소막주를 치료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구룡신단이 있다면 좋겠지만, 목을 맬 정도는 아니란 의미다.
헌데 이백의 목을 살막에 청부했으니, 거절당하는 게 당연했다.
천소약은 살막의 장중보옥이 아닌 살왕의 직계로서 위엄을 담아 말했다.
“구룡신단이라니, 참 귀한 영단이지만 아쉽군요. 허나 감히 막주님의 폐관수련을 방해할 수 없음을 양해해주셨으면 해요. 혈뢰검군 님.”
“…살막의 뜻, 궁주님께 전하겠습니다.”
“마중은 나갈 수 없어요.”
천소약의 축객령에 혈뢰검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혈궁과 혈제의 이름이 먹히지 않는다.
아무리 그라도 살막의 본진에서 소란을 피우고 살아 돌아갈 수 없기에 축객령을 받아들였다.
혈뢰검군이 떠나자 천소약이 나직이 말했다.
“천살 할아버지, 그분께 이 사실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구천살(九天殺)과 지살(地殺) 열을 보냈습니다, 공주님.”
살막 휘하에 수많은 살수들이 존재하지만, 그 정점에 있는 게 살왕의 직속인 삼십육천살(三十六天殺)과 살막을 수호하는 칠십이지살(七十二地殺)이다.
그런 삼십육천살과 칠십이지살을 움직였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특히 한 자릿수의 삼십육천살은 십왕급을 제외하곤 암살하지 못할 자가 없다 알려진 자들이다. 그런 구천살까지 움직였다는 건, 단순히 상황만 전하겠다는 게 아니란 뜻이다.
“역시 천살 할아버지이시네요. 본막은 은원이 확실해야죠.”
“소공(小公)을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공주님.”
지살후의 말에 천소약이 얼굴을 붉혔다.
돌아온 살왕이 조건 없이 제마범종을 내어준 소년을 칭찬하며 매우 흡족해했다.
평가에 있어서 냉철한 조부답지 않기에 천소약은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 소년을 소공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공녀(小公女) 천소약의 짝으로 삼자는 의미로.
천소약을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두근거렸다.
‘어떤 분이려나…….’
* * *
“돌아가셔도 되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백은 한 노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산장을 떠난 지 십 년일세, 이제 와 돌아갈 면목이 없네. 그리고 혈제가 산장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네.”
“…많이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검치 어른.”
검치는 떠나지 않고 이백을 따라 여파현으로 왔다.
철혈방과 그의 은원을 푸는 조건으로 이백이 귀주에 남은 것이다.
무란으로 바로 내려오지 않은 건 검치의 거동이 가능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는 그가 떠날 수 있게 하려는 이백의 배려인 셈이다.
헌데 검치는 천문산장이 아닌 이백을 따라 여파현으로 왔다.
“불편할 게 무엇 있는가. 노부가 불편해서 그러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저… 교 소저를 보고 싶으실 거 같아…….”
교정정을 언급하자 검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허나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눈치챘는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교 소저와 특별한 관계이시라는 건…….”
검치가 천문산장과 검모궁보다 교정정에게 더 과민한 반응을 보였기에 두 사람 사이에 뭔가 특별함이 있구나 싶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이는 노부의 손녀일세. 이 늙은이 때문에 죽은 여식의… 여식이지.”
“…….”
설마 했는데 두 사람은 조손지간이었다.
다만 교정정의 어머니가 검치 때문에 죽었다는 대목 때문에 쉬이 반응할 수 없었다.
그만큼 민감한 주제였다.
“정이는 노부가 할애빈지 모르네.”
“그런… 비밀을 제게 하셔도 됩니까.”
조심스러운 이백의 물음에 그는 고갤 끄덕였다.
검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렇기에 교정정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을 이백에게는 전하고 있었다.
“정이의 아비는 노부의 제자였네. 노부도 내심 두 사람이 잘 되길 바랬지. 헌데 뒤늦게 알았네. 놈이 노부의 손에 죽은 사파고수 칠살도(七殺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비의 복수를 위해 정이를 유혹했다는 말에 눈이 뒤집히고 말았네!”
허공을 향해 바라보는 검치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검치를 분노케 만든 탓이다.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네! 그렇게 아꼈는데, 날 배신하고… 내 딸을 배신은 그놈을! 죽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네!!”
교정정의 친부는 검치가 제자로 삼을 정도로 재능 넘치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여식과 맺어주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거짓임을 알았으니 그 배신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 늙은 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