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여파현(荔波縣)
“검치(劍痴), 그자가 당해?”
화려한 적의(赤衣)를 입은 노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헛웃음에 대전 안에 있던 이들은 움찔했다.
노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는 건,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중년 미부에게 향했다.
“환요(幻妖), 확실해?”
“취접(醉蝶)의 보고입니다, 궁주님.”
중년 미부의 정체는 환요혈군이었다.
그녀가 사대혈군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던 건, 혈제의 애첩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뛰어난 정보력 덕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취접은 그런 환요혈군이 부리는 첩보원 중 손꼽히는 실력자다.
그 정확도는 혈제도 인정할 정도였다.
“취접의 보고라면, 틀림없겠군. 헌데 철혈방에 검치를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있단 보고를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야.”
“검치와 상성이 좋지 않은 철백(鐵伯)이라는 외공고수가 있습니다만, 그자는 아니라 합니다.”
혈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철혈방이 보잘 것 없는 방파는 아니다.
귀주를 관리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아니었다면 혈궁이 손을 쓸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철혈방이기에 방(幇) 내외로 눈과 귀를 붙여두었다.
“철혈방의 고수가 아니라면, 흑림인가 하는 고양이 새낀가?”
“흑림도 아니랍니다.”
묘족의 묘는 묘(苗:모)이나 얕잡아 보며 묘(猫:고양이)로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혈제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환요, 질질 끌지 말고 확실히 말해. 누구야.”
“백호왕(白虎王) 이백이라는 잡니다.”
취접의 정보수집 능력도 뛰어났지만, 이백도 굳이 자신의 신상을 숨기지 않은 탓에 그녀의 정보망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백호왕? 그런 자가 있던 건가?”
“패왕성주가 붙여준 별호입니다.”
패왕성주라는 말에 혈제는 흠칫했다.
그제야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아! 패황과 한판 붙었다는 그놈 아니야?”
“현재 그렇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 다들 깨달았다.
패황이 친히 왕(王)이 칭호를 붙였다면 그는 무림십왕 급의 강자란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라면 아무리 검치라면 당연히 상대가 될 리 없다.
허나 무림십왕 내에서도 격의 차이가 있다.
혈제는 검선과 패황을 자신의 위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이백이 백호왕이라고 불린다고 해도 눈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본궁의 일을 방해해.”
“…….”
혈제의 싸늘한 목소리에 좌중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독박 쓸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다.
연배나 무위를 봤을 땐, 혼세혈군이 나서는 게 맞지만 그라고 심기 불편한 혈제를 상대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결국 초로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명하신다면 장생전을 총동원하는 한이 있어서 처리하겠습니다, 사부님.”
“자신은 있고?”
혈뢰검군은 혈제의 은근한 물음에 쉬이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건…….”
“됐다, 굳이 본궁의 힘만 깎아 먹을 뿐이겠지.”
머뭇거리는 게 당연했다.
정말 상대가 십왕급 고수라면 장생전이라도 장담할 수 없다.
화경이라는 그런 경지였다.
헌데 예상과 달리 혈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혈제답지 않은 반응에 좌중은 의아했다.
하지만 혈제는 혈제였다.
“살막에 연락을 넣어라.”
“사부님, 살왕을 염두하시는지요. 그가 청부를 받지 않은 지 수년입니다!”
천하제일살문답게 죽이지 못할 자가 없다는 살막이다.
허나 십왕은 오직 십왕만이 상대할 수 있다.
살막에는 그런 십왕이 존재한다.
살수지왕 살왕(殺王).
패황이 인정한 자라도 살왕이라면 죽이는 게 가능하다.
그런 살왕을 움직이는 건 어렵다.
청부금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살왕이 청부를 받지 않은 지 수년이라는 게 바로 두 번째 이유다.
헌데 혈제는 그 이유를 알고 있고, 움직일 방법 역시 알고 있었다.
“구룡신단(九龍神丹). 청부금이라고 한다면 눈이 뒤집힐 게다.”
“……!!”
혈제의 말에 좌중은 눈이 커졌다.
무림성약이라고 불리는 대환단과 비견되는 황실의 신단이다.
황제를 위한 신단답게 온갖 진귀한 영약들이 다 들어갔고, 해독을 시작으로 활력 증진 등 거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러한 이유로 황실에서조차 한두 개밖에 보유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구룡신단이 혈제의 수중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도 자식 앞에서는 한낱 아비일 테지.’
* * *
“귀인,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소.”
귀양을 떠난 이백은 여파로 왔다.
그런 그를 마중 나온 자가 있었다.
망량의 전사장인 귀인(鬼刃)이었다.
“아니오. 이 문주께서 오셔서 시작하면 한참 걸리지 않겠소?”
“비용은 넉넉하게 지급하겠소.”
이백. 정확히는 만수문의 보금자는 여파에서도 안쪽에 있는 무란(茂蘭)이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으니, 모든 걸 처음부터 세워야 한다.
당연히 만수문의 장원 역시 마찬가지다.
헌데 귀인. 정확히는 흑림에서 무란에 만수문의 장원을 짓고 있었다.
검치가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 후에야 이곳 여파현에 내려올 수 있었다.
오는 시간까지 포함해 대략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만수문의 장원은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졌다.
이백이 무란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였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오, 그건 본림에서 책임지라고 림주께서 명하셨소.”
“아니, 본문의 장원을 짓는데 어찌 그걸 귀림(貴林)에서 진단 말이오?”
장원을 새로 짓는다는 비용이 한두 푼이 아니다.
자재의 비용은 물론 인건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헌데 흑림에서 지불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귀인은 씨익 웃었다.
“귀문(貴門)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건 혈궁 때문이라 들었소. 그들을 견제해주고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본림은 큰 이득이오. 장원 하나 지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닌 거 같소.”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이 사용되었다.
이는 마음의 빚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건 언젠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돈 대신 다른 걸 들어주면 안 되겠소?”
“…말해 보시오.”
이백이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건 봐온 귀인이기에 무엇을 요구할지 들어나 볼 생각이다
허나 만약 원치 않은 일이라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우선, 소개해 드릴 분들이 있소.”
귀인의 말에 이백은 고갤 끄덕였다.
애초 이백은 다른 이들의 기척을 느꼈기에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잠시 후 몇몇 사람들이 들어왔다.
중원인은 아니었다.
귀인은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이곳 여파현을 다스리시는 포의족(布依族), 수족(水族), 요족(瑤族) 그리고 본림의 장로님이시오.”
“만수문을 맡고 있는 이백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소수민족의 촌장들이 다들 연장자이기에 이백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귀인에게 이백이 어떠한 존재인지 들은 그들은 먼저 인사하는 그를 보면 살짝 놀랐다.
중원인이라는 걸 떠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자존심만 세울 텐데 이백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북촌의 촌장입니다. 포의족의…….”
“우리 요족의 마을인 남촌의 촌장이오.”
포의족, 요족, 수족, 묘족은 여파현을 구성하는 네 민족이다.
물론 그들 민족이 여파현에만 거주하는 게 아닌 귀주, 광서, 호남 등 퍼져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네 민족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여파현의 촌장들인 셈이다.
묘족만 해도 남만의 백묘, 귀주의 흑묘, 호남의 적묘 등 다양한 만큼 다른 민족이라고 다를 리 없으니 말이다.
“촌장님들께서 자재는 물론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소.”
“그들이 장원을 짓는 동안 생계는 어찌하라고, 비용이 들지 않는단 말이오.”
이백의 말에 촌장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마을 사람들을 신경 써주는 모습에 놀랐다는 게 맞다.
덕분에 이백에 대한 호감이 확 올라갔다.
“그건 각 마을에서 책임지고 처리하기로 했소. 안 그렇소?”
“남촌장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니 문주님께서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풍요롭지 않은 귀주이며, 소수민족들의 재정이 그리 높지 않을 텐데 이리 챙겨준다니 이백으로서는 당혹스러웠다.
그때 귀인이 입을 열었다.
“만수문의 제자를 더 받아주시면 안 되겠소?”
“…제자 말이오?”
그제야 이백은 귀인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수문의 제자를 더 받을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본문은 무관(武館)이 아니오.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하시는 말이오?”
“물론이오.”
무관(武館)은 관비(館費)를 지불하고, 무술을 가르치는 방식이다. 사승이 아닌 선생과 학생의 관계다.
허나 무림방파는 사승(師承) 관계를 맺게 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처럼 사부를 그리고 문주를 아비나 황제처럼 여겨야 한다.
어쩌면 가족보다 사문을 먼저 생각해야 할 수 있다.
이백은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문주님.”
“저희 수족 역시 같은 입장이니, 기회를 주십시오.”
북의 포의족, 남의 요족, 동의 수족까지 만수문과 깊은 관계를 맺길 원했다.
정확히는 이백의 그늘에 들어가고 싶었다.
흑림이라는 구심점이 있는 묘족과 달리 그들은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탓이다.
허나 만수문은 제자고 고작 열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문파에 불과하니 그들의 반응은 의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촌장에게 귀주를 양분한 흑림과 철혈방이 그의 눈치를 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헌데 오늘 흑림의 장로인 서촌장의 반응과 귀인의 태도를 보니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많은 제자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소.”
이백의 말에 다들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많이는 어렵소. 마을당 넷이 안 넘었으면 하오.”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하리다!”
거절인 줄 알았던 촌장들은 이백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많은 제자를 받겠다는 것보다 더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백의 시선이 서촌장에게 향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서촌장이 입을 떼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망량의 전사가 되는 게 꿈이니 괜찮소.”
“알겠소.”
이백으로서는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제자를 더 늘리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이로써 여파현 토착 마을과 관계 조율은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앞으로 무란에 뿌리를 내릴 걸 생각하면 여파현의 토착 마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철혈방 여파 지부는 협의되었소?”
“철혈방의 지부는 반대되었소. 대신 귀양상단의 지부를 공동구역에 세우기로 협의했소.”
흑림만큼이나 소수민족들 역시 철혈방이 껄끄러운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부 건설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철혈방 휘하에 있는 귀양상단의 지부를 세우는 것으로 서로 양보했다.
여파현 입장에서도 상단을 통해 외부 물자를 유입된다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만수문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공동구역? 그런 곳이 있소?”
“…….”
다들 언급하길 껄끄러워했다.
여파현은 네 민족이 자리 잡고 있다.
중원인들만큼은 아니지만, 서로가 마냥 편한 건 아니다.
그렇기에 네 마을로 나뉘어 지내는 것이다.
동서남북.
결국 중앙이 빈다는 의미다.
서로의 눈치 때문에 결국 네 마을에 둘러싸인 중앙은 아무도 차지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여파현의 치부와 같은 내용인 탓이 먼저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나중에 설명해드리리다.
―알겠소.
귀인의 전음에 이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파의 특수성 덕분에 오히려 귀양상단이 자리 잡는 게 수월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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