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검치(劍痴) (1)
“명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철혈방주는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기녀로 만들었던 묘족 여인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루의 수 역시 대폭 축소시켰다.
매음굴 역시 없앴으며, 전장(錢場) 역시 재정비해 더 이상 염왕채(閻王債)라 불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한 변화에 묘족만이 아니라 귀주 민초들은 숨통을 트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철혈방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긍정적으로 바뀐 건 아니다.
“수고했네.”
“…….”
보고를 마친 검혼이 멀뚱히 서 있자 철혈방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 검혼(劍魂).”
“이대로라면 재정 상태가 기존의 2할 수준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방주님.”
2할. 즉, 8할이나 감소하게 된다는 의미다.
철혈방과 같은 사파방파는 힘과 돈, 두 가지로 운영된다.
주머니가 가벼워졌다는 게 알려지면 많은 이들이 떠나고 말 것이다.
이는 철혈방의 세력이 급감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검혼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노부는 2할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네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실 게…….”
철혈방주가 너무 쉽게 생각하다고 판단한 검혼은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철혈방주는 오히려 그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돈이 혈궁으로 안 빠져나가지 않나? 그리고 이미 돈만으로 움직이던 자들은 모두 떠났네. 그러니 2할로도 충분해. 노부의 말이 틀렸는가?”
“…그렇긴 하지만…….”
혈해노조를 포함해 혈궁에 입김이 닿는 자들은 모두 쫓겨나면서 그들이 붙었던 변절자들 역시 정리했다.
그리고 철혈방의 위세를 빌려 패악을 저지르는 자들 역시 정리 대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철혈방의 규모 기존의 3할 수준까지 축소되었다.
더 이상 귀주제일세(貴州第一勢)의 위엄은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력이 줄어든 만큼 관할하던 지역도 축소해야만 했다.
침체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의외로 철혈방은 중소방파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철혈십걸 중 넷이 남았고 잔류한 인력을 재정비하니 삼당(三堂)이 유지될 수 있었다.
덩치만 줄어들었을 뿐 아직 철혈방의 저력은 충분했다.
흑림과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좋게 생각하게. 노부는 예전보다 마음이 편하고 좋네.”
“…….”
철혈방주는 왠지 후련해 보였다.
그라고 해서 예전에 비해 초라해진 철혈방의 모습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민초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온갖 욕설과 저주를 듣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왜 진즉에 이럴 수 없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방주님, 도혼(刀魂)입니다.”
“아, 들어오게!”
철혈쌍혼 중 자리를 비웠던 도혼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온 그의 표정은 다행히 밝았다.
철혈방주는 물었다.
“어찌 되었나!”
“이 문주께서…….”
도혼이 쉬이 결과를 밝히지 않고 뜸을 들이자 철혈방주는 조바심이 났다.
“이 사람, 그만 애태우고 말하게!”
“성사시켰다 하셨습니다!”
흑림과의 중재.
세력이 급감된 지금 철혈방에겐 흑림과의 관계가 가장 우려되는 일이다.
헌데 그게 해결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혈궁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내 이리 있을 수 없지. 어디에 계시느냐.”
“예, 이 문주께서는…….”
* * *
뚜벅 뚜벅 뚜벅.
마차와 수레가 마을을 벗어나 소로(小路)로 지나고 있었다.
그들 이외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을 골랐으니 당연하다.
마차와 달리 수레를 이끄는 건 놀랍게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맹수였다.
수레에 묶여 있다고 해도 저 위험해 보이는 맹수들을 말이나 소를 대신해 끌게 하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겁할 것이다.
무엇보다 맹수들을 이끄는 자들은 고작 16, 7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들이었다.
그럼에도 맹수들을 이끄는 게 매우 능숙해 보였다.
그때 미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오.”
“음?”
수레에 딴 또 다른 어린 청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들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착각했다 생각할 때였다.
“…멈추시오!”
그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은 청년이 마차를 향해 물었다.
“문주님, 누군가 저흴 쫓는 거 같습니다.”
“…잠시 멈추어라.”
안에서 들려온 지시에 마차와 수레는 멈추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을 쫓아온 누군가의 모습을 육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선두에 있는 노인과 그 뒤로 도검을 쥔 십여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청년들은 그들의 등장이 움찔했다.
허나 그들은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도검을 뽑지 않았다.
“어찌 말씀도 없이 떠나십니까, 만수문주님.”
“때가 되었으니 떠났을 뿐이오, 철혈방주.”
뒤쫓아온 자들은 철혈방주와 그의 호위들이었다.
이백을 만나러 왔다 그가 떠난 걸 알곤 황급히 쫓아온 것이다.
다행히 멀리 떠나기 전에 찾아낸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
“때가 되었다니… 꼭 떠나셔야겠습니까.”
“이곳에 남을 필요가 있겠소? 일전에 약조한 것만 지키면 더 이상 흑림과 날을 세울 일은 없을 것이오.”
양측의 대표 혹은 실무자들 간의 협의가 된 건 아니지만, 흑림주의 입을 통해 중재를 약조한 상황이다.
이백이 없다고 한들, 더 이상 곤란한 일은 없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흑림과의 관계일 뿐이다.
주저하던 철혈방주는 결국 입을 열었다.
“혈궁… 그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들도 보는 눈이 있기에 대대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오. 만약 혈제가 직접 움직인다면 약조대로 막아줄 테니 걱정 마시오.”
썩어도 준치라고 철혈방도 맹물이 아니다.
혈제가 직접 움직이면 몰라도 사대혈군 중 한 명 정도는 막아낼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에 혈궁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질지 모르지만.
철혈방주는 애가 탔다.
이백이 귀주에 있다고 해도 제때 움직여줄지 모르는 판에, 이대로 귀주를 벗어나면 뒤늦게 와준다고 해도 늦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철혈방주의 생각이 맞다.
허나 이백에겐 전설의 천리신마(千理神馬) 못지않은 야군(夜君)이 있다.
전력을 다해 달리면 성(省) 하나 정도 닷새에도 독파할 수 있다.
그러니 귀주를 벗어난다고 해도 약조를 지킬 수 있다.
그걸 모르는 철혈방주는 애가 탔다.
“모든 걸 지원할 테니, 귀주에 남아 주십시오.”
“내 분명 약조를 지킬 테니 걱정…….”
이백은 그의 오해를 풀어줄 요량으로 설명했다. 정확히는 설명하려 할 때, 폭죽이 터졌다.
화약은 관이 직접 관리하기에 민간에서 보유할 수는 없다.
허나 폭죽의 경우는 예외로 두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연기가 멀리서 보였다.
그런 붉은 연기가 일정 거리마다 피어올랐다.
아무리 폭죽을 통해 주변에 알리는 신호라지만, 일정 거리까지만 보인 탓에 철혈방주가 구축한 체계였다.
그걸 본 철혈방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와, 왔습니다! 혈궁이 왔습니다!!”
‘벌써? 이리도 빨리 움직였다고?’
붉은 연기를 혈궁의 출현을 알리기 위한 신호였다.
철혈방주가 직접 체계를 잡을만 한 게 혈궁과 연관된 일이 아니고 또 뭐가 있겠는가.
언젠가 혈궁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혈행노조의 일이 혈궁에 전해지자마자 손을 썼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아… 혁아, 그 객잔으로 돌아가 있거라.”
이백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약조는 지키자는 게 그의 신조였다.
“노부도 먼저 갈 테니, 뒤따라오라!”
“존명!”
철혈방주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개개인이 뛰어난 고수들이지만, 철혈방주만큼은 아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맞춰주다가는 늦기에 철혈방주 역시 먼저 움직였다.
‘젠장!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 * *
“방주께선 어디 계시느냐.”
이순(耳順)은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탄탄함을 풍기는 노인.
그의 물음에 방주의 심복이라는 검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방주님께 그분을 뵈러 가셨습니다.”
“그분? 아… 만수문주라는 분 말이더냐.”
검혼은 이제 넷밖에 남지 않은 철혈십걸의 한 명이자 절정검객이다.
그런 그에게 하대할 수 있는 자는 철혈방에서 방주 이외에 한 명뿐이다.
철혈십걸의 수좌이자 방주의 사돈인 철백(鐵伯).
노인이 바로 그다.
“수하를 보내 어른께서 오신 걸 알리겠습니다.”
“되었네. 차라리 잘 되었어. 노부도 뵙고 싶었는데, 그리로 가지.”
혈행노조를 처리한 그가 귀양에 위치한 본방(本幇)까지 돌아온 건 임무를 끝냈기 때문도 있지만, 이백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철혈방주의 마음을 돌리게 만든 존재.
혈제의 분노를 감당해주겠다는 존재이니, 철백이 호기심을 느끼는 당연했다.
“속하가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방주께서 자리를 비우셨는데, 자네까지 자리를 비우면 되겠는가. 길 아는 친구 한 명만 붙여주게나.”
그리 먼 거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검혼까지 철혈방을 비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애초 철백은 의전(儀典)을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철혈방의 부방주 격인 그가 이리 홀로 다니는 게 아닌가.
검혼은 그의 뜻에 따라 철혈당 소속 수하 둘을 붙여주었다.
이백이 지내고 있던 객잔은 귀양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귀양에는 철혈방 본방이 있는 만큼 귀인은 흑림에서 안가로 사용하는 객잔을 내어준 것이다.
귀양의 중심부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할 때였다.
“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범상치 않은 노인을 발견했다.
평범한 무복에 낡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을 것이다.
허나 철백은 노검객에서 한 자루의 검을 느꼈다.
사람을 보고 검을 떠올렸다는 건, 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고수?”
“벌써 만날 줄은 몰랐구려. 미안하오.”
번쩍!
챙!!
언제 움직였는지 검(劍)이 철백의 가슴에 닿았다.
정확히는 찔렀으나 가슴을 뚫지 못한 것이다.
“큭!”
“외공의 대가셨구려. 실례했소.”
방금의 일검이라면 설사 도검불침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관통시킬 수 있는 위력이 담겨 있다.
허나 노검객의 검은 피육에 막히고 말았다.
당연했다.
철백은 백련철신결(百鍊鐵身訣)이라는 외문무공을 익혔다.
일련일천타(一鍊一千打). 일천 번의 망치질을 거처야 일련(一鍊)을 이룬다.
일련의 과정을 백 번 반복함으로써 평범한 철을 최상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하는 철이 바로 백련정강(百鍊精鋼)이다.
백련철신결은 백련정강의 가르침에서 착안해 탄생한 절세외공이다.
참으로 무식한 무공이 아닐 수 없다.
허나 그 무식한 무공으로 외금강신(外金剛身)을 이룬 인물이 바로 철백이다.
노검객의 검격을 버텨낸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네놈! 누구냐!”
일검(一劍)이지만, 상대의 실력을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노검객 역시 철백의 실력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검 위에 강렬한 빛이 어려 있었다.
검강(劍罡).
그는 초절정지경에 오른 검객이었다.
노검객은 철백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죽어주시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