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흑림주 (2)
“철혈방이?”
귀주(貴州)의 일은 귀주에서 그치지 않고, 광서무림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혈궁에게까지 전해졌다.
화려한 적의(赤衣)를 입고 있는 노인의 나직한 목소리에 초로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궁주님, 허락하신다면 철혈방주 그놈. 제가 도륙하겠습니다.”
“자중하게 잔악(殘惡). 독물들과의 일도 마무리 안 되었는데, 또 일을 키울 생각인가.”
혈궁 사대혈군의 한 명인 잔악혈군의 말을 끊는 자가 있었다.
그는 종심(從心)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다.
잔악혈군은 그런 노인을 차갑게 노려봤다.
“뒤에서 주둥이만 놀리지 말고 직접 나서던지, 혼세(混世).”
“버릇없는 건 여전하군.”
혼세혈군(混世血君)은 검파에 손을 대었다.
두 자루의 도검을 자유롭게 다루는 절세고수로, 한때는 혼세교(混世敎)라는 사교집단을 이끌기도 했다.
혼세교는 오만(五萬)의 교도를 자랑할 정도로 성했지만,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관(官)과 무림맹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게 되었다.
천라지망을 뚫고 도주한 그는 관과 무림맹이 손을 댈 수 없는 곳에 숨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혼세신마라는 별호 대신 혼세혈군이 되었다.
사대혈군 최강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지만, 잔약혈군과 자주 부딪쳤다.
위에 있다는 듯한 혼세혈군의 태도가 그를 자극한 모양이다.
반대로 혼세혈군은 나이는 물론 무위에서도 반수 아래인 그가 자꾸 기어오르니 벼르고 있던 차였다.
“하하하… 두 분 다 진정해주십시오. 궁주님께서 계신 자리지 않습니까?”
“…….”
두 사람보다 젊은 초로 사내가 중재에 나섰다.
그들의 성격이라면 반발할 만한데, 오히려 서로를 노려볼 뿐 초로 사내에게 유감이 없어 보였다.
그건 초로 사내가 조금 특별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 잔악혈군 님의 말씀처럼 두고만 봐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혼세혈군 님의 말씀처럼 일이 커지는 것도 좋지 않겠지요.”
“혈뢰(血雷), 네 생각은 어떠냐.”
혈뢰검군(血雷劍君).
사대혈군의 한명이자 혈제의 제자였다.
그리고 십 년 안에 무림십왕에 오를 거란 평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혈제는 이미 그가 해결책을 준비했음을 눈치챘다.
“장생전(長生殿)의 검치 어른은 어떻습니까?”
“검치(劍痴)?”
혈뢰검군의 제안에 혈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장생전은 혈궁의 빈객들이 거하는 곳이다.
장생전에 속한 자가 누구누구인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혈궁의 숨겨진 한 수라고 불리고 있었다.
혈제가 나직이 말했다.
“세 번 중 이번이 마지막인 걸 알 텐데, 그럼에도 검치를 고작 철혈방 때문에 써먹을 필요가 있을까?”
“철혈방이 귀주에서 제법 성세를 자랑한다지만, 감히 본궁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리 나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 장생전에선 검치 어른 이외에는 없습니다.”
혈뢰검군은 단호히 대답했다.
장생전은 많은 고수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초절정고수도 존재했다.
철혈방에 있었던 혈행노조가 그 중 한 명이다.
그런 혈행노조가 쫓겨오고 있다면 그 이상의 고수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장생전에선 검치 보다 적합한 실력자가 없었다.
검치는 다른 빈객들과 달리 계약에 의해 묶여 있었다.
세 가지 임무만 완수하면 더 이상 혈궁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혈뢰검군은 그 마지막 임무를 철혈방에 사용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아까운 패이긴 하지만, 아끼면 똥 되는 법.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혈제 역시 검치를 투입하는 걸 고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혈뢰검군의 입을 빌려 진행하는 건, 실패 시 제자를 압박하기 위함이다.
그에겐 제자는 애정의 존재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존재.
혈뢰검군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꾸준히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노물(老物), 네 손발은 하나둘씩 잘라주마.’
* * *
“이러한 모습으로 응하게 될 걸 양해주셨으면 합니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공간.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만이 누군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본인이 청한 것이니…….”
“…저와 만나고 싶으시다 들었습니다.”
이백은 이러한 상황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자신이 청을 그녀가 들어준 상황이니,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아예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다.
그녀는 흑림주.
귀주 묘족의 여왕이니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외인. 그것도 초면인 자와 만나는 상황이다.
흑림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그렇다고 한들, 대면을 청한 이백으로서는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백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흑림과 중재를 부탁받았소.”
“…그 중재의 대상이 철혈방은 아니겠지요.”
흑림주의 어투에 가시가 느껴졌다.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긴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허나 철혈방이 귀주무림 내 큰 성세를 이룬 이후 묘족에 대한 횡포가 말로 이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흑림과 철혈방은 수없이 충돌했고, 맺힌 게 많았다.
헌데 철혈방과의 중재를 위해 이 자리를 요청했다고 하니, 흑림주의 말투가 고울 수가 없었다.
“맞소, 철혈방이…….”
“귀하께서 본림을 너무 가볍게 보는 거 같군요! 어찌 그 짐승들과의 중재를 요청하다니 말입니까!”
흑림주는 대노했다.
그런 그녀의 분노에 반응하듯 섬뜩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검은 천막 때문에 보이지 않으나 흑림주를 중심으로 네 명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살기는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가공한 살기지만, 이백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들의 잘못을 옹호할 생각은 없소. 그들이 잘못을 인정했고, 공멸이 아닌 공생의 뜻을 밝혔소.”
“공멸(共滅)이 아닌 짐승들의 멸망일 뿐이겠지요.”
이미 철혈방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두 세력이 충돌하면 피해가 적지 않겠지만, 철혈방을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흑림으로서는 철혈방과의 중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 이후는 어쩔 셈이오. 철혈방이 사라진다고 귀림(貴林)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거 같소?”
“그렇다고 짐승들을 용서하란 말인가요!”
이백은 이성적으로 현실을 전했으나 그녀는, 흑림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철혈방에 대한 악감정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백 역시 철혈방의 행태에 분노했는데,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이백은 설득을 이었다.
“용서하란 말이 아니오. 그들이 그러한 죄를 짓게 된 배경에는 혈궁이 있다 들었소. 혈궁의 마수로부터 귀주를 지키기 위해선 철혈방과의 협력이 필요…….”
“그깟 놈들 따윈 필요 없다!!”
더 이상 설득이 통하지 않는지, 검은 천막 너머에서 강렬한 극양(極陽)의 기운이 날아왔다.
검은 천막을 순식간에 재로 만든 극양지기는 그대로 이백을 덮쳤다.
상당히 위협한 상황이지만, 이백은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극양지기는 방향을 바꿔 한쪽 벽을 뚫고 나가버렸다.
이백을 향해 극양지기를 던진 자는 흑림주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 중 한 명이었다.
“거절의 뜻으로 알겠소.”
“누가 마음대로 떠나도 좋다 했느냐!”
귀면인(鬼面人)은 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양손에는 푸른 불꽃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망량의 전사장 중 한 명인 도깨비불, 귀화(鬼火)였다.
삼매진화 따위완 화력 자체가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인 이백의 피부가 화끈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백을 손을 들며 낮게 말했다.
“한 번은 넘어가지만, 두 번은…….”
“컥!”
이백을 불태울 기세였던 푸른 불꽃은 사라지고, 비명과 함께 귀화가 튕겨 나갔다.
얼마나 빠른지 언제 손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없다.”
“이런! 귀화!”
동료가 당했기 때문인지, 흑림주를 지키던 전사장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언제든 달려든 자세를 취했다.
허나 흑림주의 곁을 지켜야 하기에 쉬이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때 튕겨 나갔던 귀화가 몸을 일으켰다.
“멈춰! 저 새끼는 내 거야! 내가 처리할 테니 아무도 끼어들지 마!”
푸른 불꽃이 귀화에게 휩싸이더니 그를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그는 털끝 하나 타지 않았다.
귀화가 푸른 불꽃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백을 단숨에 불태우겠다는 듯 푸른 불꽃은 점점 뜨거워져 갔다.
이를 본 이백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두 번은 없다 했거늘…….”
흑림에 약간이나마 호감을 갖고 있던 이백은 더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둘 마음이 사라졌다.
그 마음가짐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챙그랑!
“컥!”
“이런, 귀령!”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귀령(鬼靈).
망량의 또 다른 전사장으로 귀신같은 움직임은 망량 제일이었다.
귀화를 상대로 이목이 쏠린 상황을 틈타 이백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완벽한 기회라 여겼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귀령의 검은 부러지고, 그의 목까지 붙들리고 말았다.
“컥! 컥!”
“제, 젠장! 안 돼!”
숨을 쉴 수 없는 귀령은 컥컥거리며 괴로워했다.
당장이라고 그의 목뼈가 부러질 기세였다.
귀령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였다.
“더 이상 시험하지 않겠어요. 부디 그를 놔주세요.”
“시험은 너희만 한 게 아니야. 그리고 너흰 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이백의 차가운 말에 그들이 움찔했다.
그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화를 냈던 흑림주는 이백의 이런 반응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를… 놔주세요.”
“리, 림주님! 일어나십시오!”
“맞습니다! 림주께선 절대 무릎을 꾸시면 아니 됩니다! 설사 귀령이 죽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흑묘의 정신적인 지주 흑림주가 무릎을 꿇었다.
망량의 전사장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귀한 흑림주가 무릎을 꿇다니, 그게 웬 말인가.
그들은 이백을 찢어죽일 듯 노려봤다.
“그만 일어나시오, 림주. 내가 졌소.”
제압했던 귀령을 놔준 이백의 말은 의외였다.
그는 흑림주가 일부러 화난 척한 것도, 망량의 전사장들을 움직여 자신을 시험한 것도 눈치챘다.
그럼에도 이에 어울린 건 자신이 양측을 중재할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동시에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수하를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권력자는 수없이 많다.
야수족의 전대 대족장인 강상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허나 흑림주는 달랐다.
수십만의 흑묘 위에 군림한 여왕이거늘, 자신의 자존심보다 수하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사과하겠소.”
조금 전까지의 험악했던 분위기는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 예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귀화는 당황스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시험한 두 사람과 달리 그는 진심으로 반응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것 정도는 깨닫곤 물러났다.
“이 문주님과 같은 분께서 중재를 맡아주시겠다면, 본림도 응하겠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고맙소, 림주. 앞으로 철혈방은 귀림이 해를 끼치는 사업 중단과…….”
과정이 수월했다 할 수 없지만, 다행히도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간 철혈방의 행태를 생각하면 중재에 응하고 싶지 않았으나 감정적으로만 나갈 수 없었다.
흑림 역시 철혈방이 사라진다고 한들,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광서의 혈궁을 생각하면 감내할 건 감내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백의 존재가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귀주를 지나는 길손에 불과한데, 원치 않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잘한 건지 모르겠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