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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153화 (153/200)

153화. 흑림주 (1)

“쿨럭… 네, 네놈… 이 일은 궁주께서… 좌시, 하지 않으실 게다!”

넝마가 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노인.

그의 정체를 몰랐다면 노화자가 아닐까 오해할 만한 몰골이었다.

노인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죽일 듯 노려보는 노인 역시 차림이 단정치 못했다.

그는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허억… 후…. 좌시할지 안 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만 이 땅에서 꺼져라. 혈행노조.”

“이이익!!”

노화자로 오해할 만한 몰골의 노인은 놀랍게도 혈행노조였다.

철혈방을 감시하는 역할로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던 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추레한 행색이었다.

혈행노조는 비록 혈궁의 사대혈군만 못하지만, 그래도 혈궁의 숨겨진 한 수에 속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혈궁을 대표해 철혈방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런 혈행노조를 이리 만들 수 있는 인물은 귀주무림이 몇 없으며, 특히 철혈방에서는 더더욱 몇 안 된다.

철백(鐵伯).

혈행노조와 함께 철혈십걸의 수좌를 다투던 인물로, 그를 견제하는 역할 역시 맡고 있었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얌전히 돌아가라.”

“네놈, 분명 후회…….”

쾅!

폭음과 함께 혈행노조의 앞에 작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철백은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주의 명만 아니었어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주둥이를 놀리면 네놈이 저항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보고해도 된다!”

“…….”

혈행노조는 분한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허나 그 화를 분출하지는 않았다.

패자무언(敗者無言).

상황이 어찌 된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자신은 화를 참아야 할 입장이 되었다.

철혈방 준의(遵義) 지부에서 혈행노조를 따르는 지부원들까지 싸그리 쫓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철백은 가슴 깊은 속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랬어야 했어. 진즉에 이랬어야…….”

오랫동안 가슴을 막았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허나 동시에 앞으로 혈궁의 행보 역시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철백은 믿을 수 있는 수하들에게 준의 지부를 맡겨, 정상화를 시키라 명한 후 귀양으로 향했다.

“방주께서 결단을 내리게 한 자가 어떤 자인지, 궁금하군.”

*  *  *

“귀인(鬼刃), 자네 제정신인가!”

흑림에선 보기 드물게 긴급회의가 진행되었다.

무력을 대변하는 망량의 전사장들은 물론 각 지역에서 묘족들을 이끌고 있는 장로들.

그리고 흑림 전체를 영도하는 림주까지.

그야말로 흑림의 수뇌부가 모두 모인 셈이다.

“원 장로의 말이 거칠긴 했지만, 이번 일은 귀인 자네답지 않네.”

“자자들, 진정하게나. 냉철하기로 유명한 귀인 전사장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였겠는가.”

장로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각 지역을 관장하는 장로들 상당수가 젊은 시절 망량에 몸담고 있었지만, 전사장인 귀인 만큼 대단한 강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언권은 귀인 이상이다.

흑림에서 장로란 높은 연륜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한 지역을 관장하는 존재들.

다른 무림방파와 그 구조가 다른 게 당연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인든 시선이 몰리니, 천하의 귀인도 부담스러웠다.

허나 마냥 부담만 느낀 채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림주님께 대면을 요청한 자는 만수문주 이백이라는 잡니다.”

“만수문(萬獸門)? 그런 곳이 있었나?”

그들 중 누구도 만수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애초 만수문이란 문파가 생겨난지 얼마되지 않았고, 대외 활동이랄 게 없으니 아는 자가 없는 게 당연했다.

“많은 짐승을 부리는 능력이 있고, 무위는 홀로 철혈방을 무너트릴 정도로 강합니다.”

“철혈방을!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홀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귀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큼 이백에 대한 설명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철혈방이 어딘가.

흑림을 가장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다.

그럼에도 쉬이 손을 대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런 철혈방을 홀로 무너트렸다는 게 가능하다는 일인가!

장로들의 이러한 반응은 당연했다.

그때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흑림은 오랜 시간 핍박과 외압에 시달려 왔지요. 그럼에도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버텨왔어요. 상대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군요.”

“그건… 이미 보고 받으셔서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움직인 건 철혈방에서 묘족의 아이들을 노린다는 첩보 때문이었습니다.”

귀인은 젊은 여인에게 말하는 동시에 장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 움직였던 이유를 시작으로, 이백의 강함, 만수문의 존재 그리고 만수문 제자들이 묘족이라는 사실까지 꾸밈없이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때마다 장로들의 표정은 시시때때로 바뀌어 갔다.

귀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내용은 조금 전, 간략하게 설명한 것보다 더 놀라운 탓이다.

“야수왕의 혈육이라니!”

“대족장의 제안을 받을 정도라면…….”

강씨 남매에 대해 밝혀지자 장로들의 반응이 너무도 컸다.

비록 백묘와 흑묘라지만, 근본적으로는 묘족이었다.

게다가 야수족의 대족장이라면 흑림의 림주에 비견되는 위치다.

이러한 반응은 예견된 상황이다.

허나 모두가 긍정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아무리 야수왕의 혈육이 사부로 모시는 자라도, 결국 중원인 아니오? 그런 자를 어찌 믿고 림주님을 뵐 기회를 준단 말이오?”

“맞소. 그렇게 대단한 자라면, 돌변했을 때 막아내지 못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소?”

친(親)중원적인 흑묘이건만, 어느새 중원에 대한 불신이 커 보였다.

이 모든 게 철혈방의 핍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 혈궁이 있다는 것도 있지만, 그들 역시 중원인이기 않은가.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자 귀인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그들을 설득하려는 귀인조차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으니, 설득이 수월할 리 없었다.

갑론을박이 팽배한 상황에서 귀인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답지 않았다.

애초 남의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제 일처럼 이리 생각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때 다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

여인의 말에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던 장로들이 입을 다물었다.

장로들조차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여인의 발언권은 강력해 보였다.

여인은 귀인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대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해보세요. 망량의 전사장으로서, 그리고 귀인 그대 개인의 입장에서… 본 림주가 그를 만나야겠습니까?”

“저는…….”

여인의 입에서 ‘본 림주’라는 단어가 나왔다.

놀랍게도 저 젊은 여인이 수십만 귀주 묘족, 흑묘를 이끄는 흑림주였던 것이다.

흑림주는 흑묘들의 여왕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발언권이 제법 큰 장로들조차 다물게 만들 수 있었다.

장로들의 눈과 귀가 몰렸으나 귀인은 결국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림주께서 만나보셨으면 합니다.”

“전사장으로서 판단인가요? 아니면 귀인 그대 개인의 판단인가요?”

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의외였다.

그가 이 자리를 마련하긴 했지만, 외인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자를 만나보라 하기 흑림주로서는 호기심이 동했다.

“둘 다입니다.”

“오호? 둘 다라…. 이유는 뭔가요?”

호기심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귀인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하의 귀인에게도 흑림주는 하늘과 같았다.

작은 말실수를 해서 그녀의 청심에 누를 끼쳐선 안 된다.

“그는… 적으로 둬선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입니다.”

“…….”

흑림주는 물론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이 그간 봐온 귀인을 생각하면 믿기질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흑림주가 입을 열었다.

“본 림주가 거절한다면 그는 어찌할 거 같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귀인의 대답은 너무도 의외였는지, 흑림주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정말 그리 생각하나요?”

“청을 거절했다고 해코지할 자였다면,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이 자리를 제안하지 않았을 겁니다. 림주님.”

그의 대답에 다들 고갤 끄덕였다.

그런 폭거한 자라면 중한 흑림주와의 대면을 성사시켜선 안 된다.

헌데 당연하게도 이백은 그러한 자가 아니다.

제자들을 노린 자를 두 번이나 기회를 주고, 세 번째 역시 살려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그 대가로 철혈방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휘청거리게 되었지만.

“그럼 거절하면 되겠군. 안 그런가요, 귀인.”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저… 그라면 외인이라도 만나보실 가치가 있는 자라 생각했기에 이 문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귀인의 대답은 묘한 여운을 주었다.

오늘따라 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 같이 가슴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화술이 뛰어난 자가 아님에도.

모두의 시선이 흑림주의 입에 향했다.

“본 림주는…….”

*  *  *

“하아… 괜히 오지랖을 부렸나?”

이백 일행은 귀인이 내어준 객잔 별관에 기거했다.

짐승들. 특히 궁기와 설표들 때문에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기에 귀인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신궁의 흔적 때문에 끼어들긴 했지만, 아이들도 있는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귀주무림에 큰 영향을 끼치는 두 세력.

철혈방과 흑림 사이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혈궁까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냥 참고, 호남으로 갈 걸 그랬나?”

이백의 원래 목적지는 호남. 정확히는 장가계였다.

넓은 장가계라면 아이들은 물론 짐승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천문산장도 있으니, 여차하면 아이들을 부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남만을 떠난 귀주로 온 건 바로, 장가계로 지나갈 길목이었기 때문이지 목적지는 아니었다.

헌데 일이 꼬여버리면서 귀주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귀한 시간이 그냥 흘러 버리는 거 같아 아깝기만 했다.

물론 시간을 마냥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틈틈이 아이들에게 무공과 백수조련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동할 때와 달리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가르치니, 요 며칠 사이 아이들의 성장이 심상치 않을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주님, 철혈방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형철아. 안으로 모셔라.”

“예, 문주님.”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중년의 외팔이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백에게 한쪽 팔을 잃은 도혼(刀魂)이었다.

검혼이나 다른 이들도 있을 텐데,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도혼을 보냈다는 게 의외였다.

헌데 도혼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간 잘 지셨습니까, 문주님.”

“대협께서… 방주께서 보내셨소?”

이백은 그에게 잘 지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비록 그가 먼저 칼을 휘두른 탓에 일벌백계 차원에서 오른팔을 뽑아버렸다.

도객에게 칼을 쥔 팔이 얼마나 중한지 알면서도 이백은 잔혹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니 잘 지냈냐는 말 자체가 잔인하다는 걸 알기에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헌데 도혼의 얼굴에서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흑림과의 주선은 어찌 되고 있는지, 문주님께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귀인이라는 자를 통해 흑림에 말을 전했소. 아, 물론 철혈방이 아닌 나와의 만남을 말이오.”

흑림과 철혈방의 골을 생각하면 쉽게 성사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도혼을 이리 보낸 건, 이백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인연을 끊지 않기 위함이었다.

흑림과의 은원 청산은 둘째고, 혈궁으로부터 외압을 막아내는 게 첫 번째다.

이백이 갑자기 훌쩍 떠나버리면 철혈방으로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이니, 어떡하든 관계를 돈독하게 이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시군요. 문주님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문주님, 귀인 아저씨가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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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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