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최후(最後)의 통첩(通牒) (2)
저벅… 저벅… 저벅…….
불청객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저 여기저기서 신음만 들려왔다.
“으… 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전한 자가 아무도 없다.
누가 이곳이 귀주제일세(貴州第一勢) 철혈방의 입구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너져 내린 벽과 문은 둘째치고, 귀주에서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철혈방의 고수들은 널브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단언 덩치가 좋은 초로의 사내는 불청객의 발목이라도 잡으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반했다.
“머…멈춰…. 들어…갈… 쿨럭…….”
그는 단순히 덩치만 좋은 게 아니다.
도검은 물론 검기조차 견뎌낸다는 외문무공의 대가 금종철벽.
금종조(金鍾罩)와 철포삼(鐵袍衫)를 결합한 금종철벽공(金鍾鐵壁功)은 외문무공에 한해서는 귀주를 넘어 무림에서도 인정할 만하다.
그렇기에 그는 당당히 철혈십걸에 꼽혔건만, 불청객의 발목조차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금종철벽이 이끄는 철벽당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이다경(二茶頃)도 채 걸리지 않았다.
철혈십걸 중에서도 철백(鐵伯)이나 혈행노조(血行老祖)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불청객이 최소한 그들 수준이란 뜻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불청객은 더 이상 방해 없이 철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튀어나왔다.
“네, 네놈은 뭐야!”
“…철혈방준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초로 사내의 귓가에는 뇌성처럼 들려왔다.
초로 사내는 당당히 말했다.
“감히 방주님을 운운하다니! 죽고 싶더냐!”
“아닌가 보군. 하긴 너무 약하다 했어.”
불청객은 중얼거렸다.
허나 그 말을 들은 초로 사내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무시도 이런 무시는 처음 당해본 탓이다.
“야, 약하다고! 이 냉혼철장을 지금, 약하다 했느냐!”
“정저지와(井底之蛙)가 다름없군.”
발끈한 냉혼철장에 대한 불청객의 평은 여전히 박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냉혼철장이 주먹을 휘둘렀다.
악명이 자자한 그의 권격답게 묵직한 파공음을 일으켰다.
당장이라고 그의 주먹에 불청객이 곤죽이 될 거 같았다.
퍽!
주먹을 통해지는 느낌은 물론 타격음까지.
제대로 꽂혔다. 아니, 꽂혔다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득! 우드득!
“큭! 으아악!!”
“물렁한 주먹을 믿고 그리도 방자했던가. 무림은 그렇게 물렁한 곳이 아니거늘…….”
철장공(鐵掌功)을 익혀 손만큼은 금종철벽 이상으로 단단했다.
그가 휘두른 권격 역시 위력적이다.
허나 이백은 손으로 가볍게 잡아 버린 후 그대로 힘을 주었다.
냉혼철장의 주먹은 부서진 걸 넘어 으깨져 버렸으니, 그가 제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게 당연했다.
귀주에서는 놀랄 만한 권사(拳士)이지만, 말 그대로 귀주에 한해서다.
무림 전체를 보면 그 정도 권사는 족히 셀수 없이 많다. 그게 바로 무림이다.
자부심을 가질만 하지만, 자만할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주, 죽여! 죽여버리겠어!!”
“귀찮군.”
눈이 뒤집힌 냉혼철장이 달려들었다.
아직 그에겐 멀쩡한 주먹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내공을 주먹에 전부 담았다.
필살(必殺)의 의지가 담긴 일권(一拳)이었다.
파공음만 해도 조금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퍽!
“컥!!”
아무리 강한 힘도 닿지 못하는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을 담은 냉혼철장의 일권이 불청객에게 닿기도 전에 그는 더 강력한 기운을 맞고 튕겨 나갔다.
불청객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밖의 소란을 듣고 준비했는지, 수백 명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귀하는 누구기에 본방에 와,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게요.”
“철혈방준가? 그래도 좀 낫군, 앞서 쓰레기들 때문에 실망이 컸는데…….”
불청객의 말은 상대를 불쾌하기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로 불청객과 대화를 나눈 자는 얼굴이 굳어졌고, 그의 곁에 있는 자들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건방진 새끼가 감히 본방에 와서 행패를 부린 것으로 부족해, 방주님께 어쩌고 저째!”
“너희에게 방주지, 내겐 방주가 아니다. 그리고 행패를 부린 건 너희다. 본문의 제자를 기루에 파니 마니 하다 얻어터졌으면, 찌그러져 있지. 세 번이나 처맞으러 찾아왔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몸소 찾아간다고 살려 보내줬는데, 보고가 안 되었나 보군? 방(幇)의 수준하곤.”
이백의 말에 이순은 넘은 듯한 노인이 곁이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허나 그들은 난색을 표하는 걸 보니 보고를 받은 게 없는 듯했다.
노인은 얼굴이 굳어졌다.
“본방의 실수는 인정하나 그렇다고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 건 과하다 생각하오.”
“본문의 제자 한명 한명이 너희 쓰레기들 전체보다 귀하다. 그러니 과하지 않지.”
이백은 그답지 않게 상대는 무시하고 깔아뭉갰다.
일부러 상대의 자존심을 긁어 상대로 하여금 먼저 움직이게 만들려는 것처럼.
실제로 철혈방주의 곁에 있던 초로의 사내가 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재주를 믿고, 주제를 모르는구나!!”
“주제를 모르는 게 누군지 모르겠군.”
이백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사내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맹위도 반후의 도격보다 그 기세나 담긴 기운이 월등했다.
사내의 정체가 최소한 철혈십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이백은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사내는 휘두르는 칼에 더욱 강한 힘을 주었다.
“……!!”
“손가락이 얼얼하네. 제법 쓸만한 도법이었어.”
이백의 입은 칭찬하면서도 얼굴은 무표정했다.
허나 더 놀라운 건, 그 위력적인 도격이 고작 두 손가락에 잡혔다는 점이다.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수법이었다.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웬만한 나서는 안 된다,
다르게 말하면 이백은 도객과 차원이 다른 고수란 의미였다.
“놔, 놔… 컥!”
“주제를 모른단 말이야…, 주제를!”
자신의 칼을 회수하려던 도객은 이백에게 목이 잡히고 말았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인지, 그는 발버둥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철혈방주가 외쳤다.
“원하는 걸 들어줄 테니, 도혼(刀魂)을 놔주시오!”
“너희는 살려달라는 자들을 살려주었느냐.”
이백의 차가운 목소리에 좌중은 얼어붙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살려달라는 자를 살려준 것이 없다.
죽이거나 팔아넘겼다.
공포야말로 철혈방이 귀주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이백은 도혼의 오른팔을 뽑아 버렸다.
“으아아악!!”
“사람을 사람 취급하였느냐.”
이백은 피를 흘리는 도혼을 철혈방주에게 던졌다.
그럼에도 누구도 감히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절대적인 무력 앞에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할 마음을 먹겠는가.
특히 이미 일벌백계하려고 마음먹은 이백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은 손에 마르지 않을 피를 묻히더라도 제대로 벌할 생각이었다.
그 증거로 수십의 도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도검은 철혈방도들의 것이다.
제 도검에, 동료의 도검에 죽게 생겼다.
그 모습은 장관을 넘어 공포스러웠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젠장, 완전히 엿 됐다!”
도혼을 상대했던 무위도 대단했지만, 이 공포스러운 모습에 그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철혈방주는 이백의 경지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오.”
“변명을 한다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 아니고, 지옥 속에 허우적거리던 이들의 분노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백은 변명 같지 않은 변명 따윈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누군가가 외쳤다.
“우, 우리를 건들면! 혀, 혈궁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맞, 맞다! 우리 뒤에 혈궁이 있다고!!”
혈궁(血宮).
사도련과 패왕성에 비견되는 거대사파다.
특히 혈궁의 궁주는 무림맹와 함께 이제(二帝)의 혈제다.
그제야 공포에 빠졌던 철혈방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할지 모르지만, 혈궁과 혈제를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은 이백은 너무 몰랐다.
이백은 그들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혈제의 혈궁을 말하나 보군.”
“흐흐흐, 이제야 상황 파악이…….”
“난 혈제도 두렵지 않은데, 어쩌나?”
“허, 헛소리! 그런 허세를 믿을 줄 알고!”
두려워하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백을 보며 그들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세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대사파인 혈궁이요, 무림십왕의 혈제다.
어느 누가 그들 앞이 저리 대할 수 있겠는가.
귀주제일세라는 철혈방조차 혈궁에 비하면 군소방파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백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독선, 패왕성의 패황.”
“뭐라는 거야?”
난데없이 우내오존의 일인과 무림십왕의 수좌가 언급되었다.
철혈방도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한 채 웅성거렸다.
허나 그런 소란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상대했던 자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지. 헌데 난 이리 멀쩡히 살아 있다.”
“마, 말도 안 돼!! 그런 헛소리를 믿으란 말인가!!”
다들 믿지 않았다.
독선과 패황을 상대로 살아남은 자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너희 따위가 믿든 믿지 않든 나완 상관없다. 어차피 너흰 지금 모두 죽을 테니까.”
그런 이백의 말에 다들 혼란에 빠졌다.
실제로 그가 혈궁을 두려워하든 안 하든 이백이 자신들을 죽인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백이 수십의 도검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혈궁! 혈궁 때문이오!”
“뭐가 말인가.”
도검을 움직이려던 이백은 철혈방주의 말이 잠시 변명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들어본 후에 죽여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걸 깨달은 철혈방주는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본방이 사파이긴 하지만, 귀하께서 말할 정도는 아니었소. 헌데 혈궁에서 감시자를 보내, 우릴 핍박하고 강요하고 있소. 많은 돈을 상납하라고. …우린 살아남기 위해, 상납하기 위해… 컥!”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허공에 떠올랐던 도검 중 한 자루가 움직여 철혈방주를 후려쳤다.
그 충격에 튕겨 나가듯 나가떨어졌다.
“바, 방주님!”
“괘, 괜찮네. 호들갑 떨지 말게.”
실제로 철혈방주는 멀쩡했다.
그를 죽일 생각으로 도검을 움직인 게 아니었고, 철혈방주 역시 이백만 못할 뿐 뛰어난 고수다.
철혈방주는 다시 변명을 이어갔다.
“변명… 맞소. 노부로서는 내 사람, 방도들을 지키는 게 우선일 수밖에 없었소…. 그 방법이 비열했다고 하지만…. 노부, 한 명의 목숨으로 끝내주시오. 결국 결정한 건 노부이니…….”
“개수작 부리지 마, 너만이 아니라 너희 쓰레기들은 지금 모두 없앨 거니까.”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철혈방은 혼란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게 생겼으니 당연하다.
“쉬파!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그깟 것들 때문에 왜 죽어야 해!”
“나는 살 거야!”
철혈방주의 말에 뭉클해 하는 자들도 있지만, 충성심 낮은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철혈방이 덩치를 불리면서 기존의 수하들만이 아니라 포섭된 혹은 호가호위하기 위해 입방한 자들은 수두룩한 탓이다.
이백은 그들이 도망치든 말든 놔두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본 자들은 다들 도망쳤다.
그렇게 남은 자는 고작 이백(二百)이 조금 되었다.
철혈방주는 체념한 채 나직이 말했다.
“자네들도 떠나게. 자네들은 살 수 있을지 모르네.”
“방주님, 저희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어도 함께 죽겠습니다.”
“맞습니다. 방주님.”
한쪽 팔을 잃은 도혼은 물론 철혈방주의 또 다른 심복 검혼.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도검을 꽉 쥐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도망치지 않고 남은 자들 역시 생사를 함께할 요량으로 보였다.
이백은 그런 그들을 보며 차가운 선고를 내렸다.
“이제 심판의 시간이 되었군.”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