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귀주 묘족(貴州 苗族) (4)
“후우… 후우… 후우…….”
강우혁은 자신에게 향한 칼을 봐도 두려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흡을 가다듬으며 끝까지 지켜봤다.
퍽!
중년인의 칼은 바닥만 패고 말았다.
청랑보를 밟으며 중년인의 칼을 피한 덕분이다.
허나 그게 끝이 아니다.
칼을 피하는 동시에 중년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퍽!
“큭!”
“젠장, 위험했네.”
신음을 흘린 건 중년인이 아닌 강우혁이었다.
그의 손이 중년인의 옆구리에 닿기 직전.
중년인의 팔꿈치가 강우혁의 얼굴이 후려쳤다.
실전경험이 여기서 발휘된 것이다.
강우혁은 자신의 뺨이 붉게 부어올랐지만, 아파하는 대신 물러나 중년인의 반격에 대비하는 냉철함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만수문의 제자들은 제가 맞은 것처럼 괴로워했다.
“아! 소문주님!”
“우리가 강했다면!”
강우혁의 실전경험을 위해 이백이 조정해 만들어진 싸움임을 알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부족하여 뒤에서 지켜만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피를 나눈 누이 강우희는 누구보다 걱정이 앞섰다.
‘오빠… 조심하세요.’
오라비가 걱정되긴 했지만, 이 상황을 만든 사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게 오라비를 위함이고, 소문주로서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같은 소문주임에도 무공에는 뒷전에 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쉬파, 다쳐도 책하지 않겠다는 약조는 지키시오!”
“헙!”
막내 아들보다 어린 소년을 상대로 질질 끌었다는 사실에 창피한지, 중년인은 내공을 담아 칼을 휘둘렀다.
희미하지만 빛나는 게 도기(刀氣)가 담겼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무리 희미해도 도기는 도기.
스치기만 해도 크게 다칠 것이고, 못 피하면 절명이다.
그럼에도 이백은 움직이지 않고 지켜만 봤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나.’
겉으로는 냉정한 척했지만, 이백은 내심 불안했다.
제자에게 실전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함이지, 다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다.
이백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움직이려는 찰나, 그의 눈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서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년인의 칼이 베인 것이다.
“헉! 마, 말도…….”
“허억… 허억… 쿨럭…….”
그는 베어진 칼(半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칼을 벤 건 바로 강우혁. 정확히는 손으로 베었다.
칼로 칼을 베었어도 믿기지 않은데, 손으로 칼을 베다니.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듯 강우혁은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만 아니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백이 그의 곁에 와 있었다.
“사, 사부님… 죄송… 우웩!”
“아니, 수고했다. 이럴 때를 위해 가르친 혈랑인(血狼刃)이란다. 이제 그만 쉬어라.”
강우혁이 도기가 어린 칼을 벨 수 있던 건, 청랑조법의 역법(逆法) 혈랑인을 운용한 덕분이다.
역혈(逆血)을 통해 위력을 증폭시키는 수법이다.
혈랑겁 만큼은 아니지만, 혈랑인 역시 위험한 수법이기에 웬만하면 운용하지 않길 바라지만.
애초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명지초(救命之招)로 삼으라 가르친 것이니, 강우혁은 잘못한 게 없다.
이백은 그를 품에 안은 채, 차가운 눈으로 중년인. 정확히는 철혼맹위대를 바라봤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그들은 움찔했다.
“부, 분명 책하지 않겠…….”
“약조는 지킬 테니, 그만 꺼져. …한 번 더 귀찮게 할 땐 기회도 없을 거야.”
아무리 제자를 위함이었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과했다는 걸 인정했다.
만약 강우혁이 혈랑인을 펼치지 못했다면. 칼을 베지 못하고 당했다면.
그러한 생각이 든 이백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앞으론 아무리 제자의 실전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함이라도 같은 일을 벌이지 않겠단 결심을 했다.
불편한 심기로 인해 의도치 않게 살기가 배어 나왔다.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얼어붙은 듯한 착각이 들어 반응하지 못했다.
“뭐해, 두 발로 걸어가기 싫어?”
“아, 아닙니다!”
그제야 그들은 줄행랑쳤다.
이백은 태을보령환(太乙保寧丸)을 꺼내 강우혁에게 먹였다.
의식을 잃은 상태라 씹기 어렵지만, 다행히 침이 닿으면서 저절로 녹아 강우혁의 식도로 흘러 들어갔다.
이백의 검지와 중지가 빛나고 있었다.
푹! 푸푹! 푹! 푹!
한 호흡에 십여 혈(穴)을 눌러 태을보령환의 약기를 흡수하는데 도와주었다.
워낙 약효가 뛰어난 명약이고, 이백이 도와준 덕분에 강우혁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올 수 있었다.
“인호야, 우혁이를 안고 있거라.”
“예! 문주님!”
이백은 강우혁은 강인호에게 넘겼다.
제자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서 강우혁도 거뜬히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제야 이백은 어딘가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멀쩡히 돌아갈 생각이 없나 보지.”
“…알고 있었소?”
이백의 말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면탈을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였다.
누가 봐도 수상하게 보이니, 이백이 날을 선 채 대하는 게 당연했다.
“내게 세 번이나 말하게 했으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진정하시오, 난 적이 아니오.”
귀면탈을 쓴 자는 한 걸음 물러났다.
아직 이백의 무위를 파악한 건 아니지만, 싸운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이백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난 정체를 숨긴 자를 신용하지 않아.”
“후… 이건 망량(魍魎)의 전통이오.”
“도깨비?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백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귀면탈을 쓴 자는 이백이 자신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외지인가 보구려. 망량은 흑림을 수호하는 집단이오. 그리고 흑림은…….”
“묘족? 그건 들었다. 그거랑 네가 날 감시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지.”
“저 아이들이 묘족이기 때문이오. 철혈방 놈들이 묘족을 노린다는 첩보를 받았기에 도우러 온 것이오.”
“…….”
이백은 입을 다물었다.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며 호의적인 상대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만 말 그대로 귀면탈을 쓴 자가 사실을 고했다는 전제일 때 이야기다.
“저 아이들… 납치한 거라면…….”
“아니에요! 저희는 문주님의 제자들이에요!”
“맞아요! 저희는 만수문의 제자들이라고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누가 봐도 자의였다.
중원인으로 보이는 자가 묘족의 아이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철혈방 도객을 상대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소년을 보면 거짓은 아닌 거 같았다.
“으음… 망량의 귀인(鬼刃)이라 하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귀주가 아니면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겠소.”
“필요 없다… 라고 할 상황은 아닌 거 같구려. 부탁드리겠소.”
상대가 호의를 보이는 게 맞다 판단한 이백은 태도를 바꾸었다.
이백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날을 세웠지만, 호의를 보이는 자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귀인은 안도했다.
굳이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부의 의견에 따라 도움을 줄 뿐이었다.
귀인은 묘족의 아이들과 짐승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만수문이라… 야수족과 연관이 있는 건가?’
* * *
짜악!
“큭!”
무릎을 꿇은 자의 입술이 터지며 신음이 나왔다.
허나 맞은 자는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병신 새끼, 그래서 도망쳤다? 대(大) 철혈방의 대주라는 놈이 본방의 얼굴에 똥칠해!”
“죄,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얻어맞은 자는 철혼맹위대주 반후였다.
그를 문책하는 것만 봐도 상대가 상관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새끼가 하지만은 무슨!”
“큭!”
초로의 사내는 반후의 뺨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반후의 입가에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손속이었다.
그런 성격이기 때문인지, 냉혼철장(冷魂鐵掌)이라 불렸다.
그는 반후가 목표로 삼고 있는 철혈십걸의 일인으로, 철혼맹위대의 상급집단인 철혼당(鐵魂堂)의 당주다.
철장공(鐵掌功)을 익힌 그의 손은 도검불침(刀劍不侵)은 물론, 검기가 어린 검조차 부러트린 걸로 유명한 고수다.
대주들이 철혈십걸을 노린다면, 그들은 방주의 옆자리. 즉, 부방주가 되기 위해 경쟁을 했다.
부방주가 되기 위해선 그만한 무위는 기본이고, 수하들에 대한 관리 능력까지 겸비해야 한다.
즉, 반후의 일이 알려지면 그의 능력이 의심받게 되고, 동시에 부방주에 닿는 길이 더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 냉혼철장이 성이 난 것이다.
“방주님께서 아시기 전에 처리해! 무슨 수를 써서더라도! 알겠어!”
“…알겠습니다, 당주님.”
철혈방주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매우 비상한 인물이다.
철혈십걸이라는 제도를 만든 게 바로 그다.
대주들의 경쟁을 통해 철혈방의 전력 상승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철혈십걸에겐 부방주라는 먹음직스러운 먹이는 던졌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함으로써 감히 방주에게 이를 드러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한 철혈방주다.
치부가 들통나면 다른 철혈십걸의 먹잇감을 만들어 버릴 것이다.
“뭐 하고 있어! 빨리 해결하지 않고!”
“존명(尊命).”
축객령에 반후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냉혼철장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아무도 없음에도 나직이 말했다.
“현월(玄月).”
“현월이, 당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허공에서 복면을 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월. 철혼당의 직속 철혼대의 대주로, 냉혼철장의 비수라고 불리는 자다.
냉혼철장이 당주가 될 때까지 공적을 위해 희생양을 만들고, 경쟁자의 약점을 잡는 등 어려운 일이 도맡아 수행해온 자이기도 하다.
냉혼철장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이고, 그 능력 역시 출중해 모든 철혼십걸이 그를 탐을 낼 정도다. 철혼십걸만이 아니라 방주마저 관심을 보일 정도이니, 현월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 현월을 불렀다는 건, 냉혼철장이 이번 일을 크게 생각하고 있단 증거다.
“반후, 저 머저리가 실패하면 네가 뒷마무리를 지어라.”
“충!”
냉혼철장은 애초 반후를 믿지 않았다.
그저 적에게 작은 피해라도 준다면 그걸로 족했다.
뒷마무리는 언제나 그랬듯 현월이 할 테니까.
“흐흐흐… 저 녀석을 구한 게 내 일생일대 최고로 잘한 일이야.”
평소라면 거들떠보지 않았을 텐데, 왠지 그날따라 측은지심이 들어 죽어가는 자를 구했다.
도움이라고 해봤자 의원(醫院)에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헌데 그는 목숨 빚을 갚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루한 놈이 붙으려 한다고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리고 잊었을 때쯤, 현월이 다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누군가의 머리가 들려져 있었다.
냉혼철장의 앞을 막고 있던 고수였다.
그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거늘, 현월은 그 일을 해냈다.
그때부터였다.
냉혼철장이 승승장구하게 된 게.
그리고 지금, 철혈방의 부방주 자리까지 노리게 되었다.
“이번에도 내 기대에 부응하라고, 현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