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결자해지(結者解之)
“앙칼진 고양이 새끼가!”
좌법왕은 짜증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설군은 더 만만치 않았다.
설군은 단순히 새하얀 백호가 아니다.
서방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신수(神獸)다.
혈뢰음사의 마공을 계승한 좌법왕이라도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크으으응…….”
설군은 으르렁거리면서도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천하의 설군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좌법왕 역시 강했다.
일인일호(一人一虎)는 서로를 노려보며 기회를 엿봤다.
틈이 없으면 틈을 만들겠다는 듯 좌법왕이 먼저 움직였다.
“법뢰혈인(法雷血印)!”
핏빛의 우레가 내리꽂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누구라도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를 뿐만 아니라 법뢰혈인이 내리꽂힌 곳이 움푹 파일 만큼 위력도 상당했다.
허나 법뢰혈인이 내리꽂힌 부근에 혈흔은 없었다.
설군이 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잡았다!”
좌법왕은 뇌음보(雷音步)를 펼쳐 설군의 뒤를 잡는 동시에 뇌음혈광장(雷音血光掌)을 펼쳤다.
뇌음사의 색이 매우 강한 절학들이다.
쾅!
폭음과 함께 설군이 튕겨 나갔다.
방심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좌법왕의 수가 날카로웠다고 해야 할지.
어찌 되었든 좌법왕이 승기를 잡은 건 바뀌지 않는다.
뇌음보를 밟으며 법뢰다라수(法雷多羅手)를 펼쳤다.
사방팔방에서 좌법왕의 손이 휘몰아쳤다.
그 모습은 흡사 소림의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쾅! 콰쾅! 콰쾅! 쾅! 쾅!
설군은 다급히 움직여 법뢰다라수를 피했다.
허나 쏟아지는 법뢰다라수를 모두 피하긴 어려웠는지, 결국 일부는 허용하고 말았다.
퍽! 퍼퍽! 퍽!
설군이라도 충격이 쌓이면 무사할 수 없다.
그때 좌법왕이 결정타를 날랐다.
“법뢰혈수인(法雷血手印)!”
법뢰혈인의 빠름과 혈수인의 강력함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절학이다.
이번에야말로 설군을 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후웅~!
설군을 압살시키기 위해 내리꽂히려는 순간!
좌법왕은 멈칫했다.
“칫! 너무 시간을 끌었군.”
좌법왕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곤 물러나기 시작했다.
설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설군의 분노에 찬 포효가 연이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크앙! 크앙! 크아아앙!!!”
좌법왕에게 당한 게 어지간히 분한 거 같았다.
반대로 좌법왕은 거의 완벽하게 승기를 잡았다.
그 기세를 살린 결정타만 성공한다면 설군이라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좌법왕은 물러났다.
“많이 분한가 봐. 그래도 난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크…으으…….”
거대했던 설군은 어느새 가체(假體)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으르렁거렸다.
이백은 두 손을 뻗어 설군은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의 온기에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설군도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좌법왕이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난 건 바로 이백의 기척을 느낀 탓이다.
설군을 몰아세우긴 했지만, 압도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하물며 이백이 합세하면 밀리는 건 바로 자신이란 걸 모르지 않았기에 물러나는 걸 택한 것이다.
‘설군이 곤욕을 치를 정도라고?’
분명 좌법왕은 강했다.
허나 신궁의 총순찰인 십절흑제보단 아니다.
그럼에도 설군이 수세에 밀렸다.
좌법왕에겐 알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지 못한다면 섣불리 좌법왕과 충돌하는 건 위험하다.
‘역시 신궁, 만만치 볼 수 없네.’
흑백쌍괴, 혈법주, 십절흑제, 혈타 등 신궁 고수들을 상대했다.
하나같이 강했지만, 결국 이백은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방심 아닌 방심을 하게 되었는데, 좌법왕과 같은 강자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이백을 다시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백은 제자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다시 대호족의 부락으로 돌아갔다.
* * *
“오빠…….”
강우희는 제 오라비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옷을 통해 전달되는 떨림에 강우혁은 울컥했다.
“이러셔도 저흰…….”
“그게 아니다. 우린…….”
강씨 남매를 족히 수백은 될 법한 인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견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강씨 남매를 해할 의도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강씨 남매는 난감해하면서도 그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 제자들에게 아직도 용무가 남았소이까.”
“사, 사부님!”
강씨 남매를 둘러싸였던 인벽(人壁)이 열리며 길이 생겨났다.
아이들은 이백에게 달려왔다.
그런 아이들을 이백이 양팔로 안아주었다.
그 모습에 그들. 대호족은 입맛이 쓰기만 했다.
자신들은 강씨 남매의 가족이 되지 못했다는 걸 느낀 탓이다.
“오해하지 마시게. 우린… 사과를 하고 싶었을 뿐이네.”
“…사과, 말이오.”
수백쯤 되어 보이는 인원은 모두 장성한 전사들이 아니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아녀자와 은퇴한 노인들. 아직 전사의 의식을 치르지 못한 어린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독문과 강상에 의해 목숨을 잃은 전사들을 제외한 대호족 전원이었다.
“15년 전도 이번에도 강상 그놈에게 놀아났고, 강영 그 녀석에게 도움을 받았네.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네.”
“…….”
강망의 말에 이백은 그들을 질타할 수는 없었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사과를 받지 않는 것도 자신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백은 강씨 남매의 어깨를 따스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어찌하겠느냐. 사과,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너희 원망할 자가 없다.”
“저, 저희는…….”
강자존의 세계에게 패자무언(敗者無言)이라지만, 결국 고향에게 도망쳐야 했던 선친의 원통함을 생각하니 차마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저하는 강우혁을 대신해 강우희가 입을 뗐다.
“사과, 받지 않겠어요.”
“아…….”
강우희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역시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씁쓸하기만 했다.
누이의 선언에 강우혁은 살짝 당황했다.
“우…희야.”
“사과는 저희가 받을 수 없어요. 저희에게 잘못하신 게 아니잖아요.”
자신들은 대호족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당돌한 대답이었다.
이는 원망도 없지만, 애정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에 강망 등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강씨 남매의 마음을 돌릴… 아니, 대호족으로 향하게 할 가능성이.
“그렇다 하오.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우린 이만 돌아가 보겠소.”
“…….”
이백의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백과 제자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그때 한 사내가 달려왔다.
청년이라기에 조금 앳된 사내였다.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은 탓에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백. 정확히는 강씨 남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시게 해주십시오. 아버지를 대신해 도련님과 아가씨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가 누구지?”
제자들을 대신해 이백이 그의 정체를 물었다.
그는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강씨 성에 여자 상자 쓰시는… 대전사이십니다.”
“…….”
대전사 강여상.
이백과 제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전사라면 강우혁을 죽이려고 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강씨 성을 가졌다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다.
애초 대호족의 다른 명칭은 강씨 부족이다.
옅든 짙든 모두 시조의 피를 이었다.
강씨 성에 외자를 쓰는 자가 시조의 직계란 의미였다.
그렇기에 원래는 강우혁, 강우희 남매 역시 외자를 써야 했지만 강영은 그렇게 짓지 않았다.
야수족과의 연을 끊는다는 의미였다.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도련님을 해하려 했다는 것을…. 저는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前) 족장님의 대전사로서 그 명을 따른 게 정당하다 할 수 없지만,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주인을 잘못 선택한 아버지의 잘못은 바로잡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일로 자신에게 선입견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약관(弱冠)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청년이 갖기 힘든 깊은 생각이었다.
이백은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님을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바로 잡아야 할 잘못은 없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족장이 되지 못하신 걸 다른 이의 잘못으로 생각해선 안 될 테니까요. 그러니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똑 부러진 강우혁의 대답에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강우혁인 제 아비에 대해 그리 생각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아들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결국 족장이 되지 못한 건 아비보다 강상이 더 출중했던 탓이다.
그게 중상모략에 의함이라고 해도.
“마음은 감사하지만 대호족의 전사로서 힘써 주십시오.”
“…저는…….”
강우혁의 거절에 그는 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단락을 지었다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무리가 다가왔다.
삼남일녀(三男一女)로 소년이라 하기엔 건장했지만, 청년이라고 하기엔 다소 앳된 애매한 이들이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조금 전에 말했지만…….”
반복된 상황에 강우혁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허나 그들은 대전사의 아들과 달리 당당하게 요구했다.
“15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눈치만 보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당당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흴 거둬주십시오!”
“15년이라면…….”
15년. 바로 야수왕이 죽고, 그의 자식들이 대호족장의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던 그 시기다. 그들의 아비 역시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어미의 뱃속에 있던 그들은 결국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야만 했다.
야수족은 전사를 우대한다.
아비가 없다고 해서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눈치를 봐야 했다는 건, 그들의 아비가 강상이 아닌 패배한 자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곁에 있던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희 아비가 돌아가신 걸, 이 아이들에게 책임지란 말이더냐.”
“그, 그게 아니라…….”
“저, 전사의 의식을 치르지 못한 저희는 이곳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다른 의도는 어, 없습니다.”
이백의 말에 그들은 찔끔했다.
다른 의도가 없다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던 탓이다.
그걸 눈치챘지만, 이백은 더 이상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너희 어머니는 어찌하고 따르겠단 말이더냐.”
“어머니는…….”
이백의 물음에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시에는 과부의 재가(再嫁)가 허락되지 않는 풍조였다.
남편 없이 여인의 몸으로 홀로 자식을 키우는 게 녹록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자식들을 건사시키기 위해서 무리할 수밖에 없고, 단명하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남게 된 아이들의 부족 어른들의 보호를 받지만,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모를 잃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씨 남매이기 때문인지, 그들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결국 이백이 대신 결정을 내려주기로 했다.
“좋다. 본문의 제자로 받아주마. 이 아이들은 본문의 소문주들이니, 대하는 데 있어서 어긋남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삼남일녀는 몇 번이나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당당해지고 싶다 했지만, 아직은 눈치를 보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듯싶었다.
이백은 강씨 남매를 소문주로 승격시킴으로써 질서를 잡았다.
이름뿐인 만수문이 기틀을 잡게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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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