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격하(格下)
쾅! 콰쾅! 쾅!
거대한 호랑이와 늑대가 충돌할 때마다 하늘이 요동을 쳤다.
―하하하! 언제까지 도망만 칠 것이냐!
―닥쳐!!
사흉수(四凶獸)끼리의 싸움이건만, 팽팽한 격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궁기가 공격하면 혼돈이 막거나 피하고, 간혹 반격하는 등 일방적인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사흉수라고 불리지만, 그들의 힘이 동일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유는 혼돈이 온전치 못한 탓이다.
비록 강우희가 은고아를 통해 영력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게 혼돈의 십 할에 해당하는 영력은 아니었다.
―약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이제 그만 죽어라!
―큭! 이런 썅!
궁기의 기세가 더 강렬해졌다.
지금까지는 전력이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농락당한 혼돈은 분개했지만, 보복할 힘이 부족했다.
그게 너무도 분했다.
그때 궁기의 입에서 검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실제 불꽃이 아닌 영력의 불꽃이었다.
콰콰쾅!!
“캬!!”
비명과 함께 혼돈은 땅에 처박혔다.
그 충격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혼돈은 일어나지 못한 채 숨만 헐떡였다.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도망칠 힘도 남지 않았으니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궁기는 하늘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혼돈을 내려봤다.
―비참하군, 그래도 나와 함께 사흉수라 불리던 놈인데…….
궁기의 조롱에도 혼돈을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
바락바락 대들어야 괴롭힐 재미가 있는데, 그러지 않으니 궁기는 더 이상 흥미를 잃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졌다.
궁기는 입을 벌렸다.
그러자 검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만 죽어라!!
거대한 검은 불길이 뿜어져 나와 혼돈을 덮쳤다.
흡사 지옥의 불길이 세상을 불태울 거 같았다.
아무리 혼돈이 사흉수라도 저 검은 불길에는 형체도 남지 못하고 불타 사라질 것이다.
피쉬이~!!
갑자기 엄청난 수증기가 발생해 일대를 가득 채웠다.
“피, 피해!!”
“으아악!!”
강한 열기를 품고 있던 대량의 수증기는 화룡가와 야수족을 가리지 않게 덮쳤다.
그로 인해 전신이 화끈거렸다.
그중 일부는 화상을 입을 정도이니, 가볍게 볼 상황이 아니다.
이 상황에 당황한 건 남만인들만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궁기!!
다 죽어가던 혼돈이 궁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게다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궁기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혼돈의 목에 채워진 목띠가 은은하게 빛나는 걸 발견했다.
목띠는 강우희의 은고아로 인해 형성된 금제다.
하지만 반대로 저 목띠를 통해 기운을 전해주는 것도 가능하다.
혼돈에게서 풍기는 강력한 기세는 은고아의 주인.
강우희에 의해 전해진 막대한 기운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너부터 죽여주마!!
결국 강우희만 죽으면 혼돈은 다시 비루한 신세가 될 것이다.
궁기가 뿜은 검은 불길이 강우희에게 향했다.
그의 뜻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듯 혼돈이 궁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혼돈의 입에서 청백(靑白)의 냉기가 뿜어져 나와, 검은 불길(黑火)에 대응했다.
검은 불길과 청백의 냉기.
상반된 기운이 충돌로 또다시 열기를 담은 대량의 수증기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고열을 담고 있던 수증기의 열기가 점점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궁기의 검은 불길보다 혼돈의 청백의 냉기가 더 강성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체 어떻게… 젠장!!
궁기는 눈을 흘긋해 강우희를 쳐다봤다.
그제야 갑자기 혼돈의 기운이 강성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은고아를 통해 강한 기운을 주입한 자는 강우희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은고아를 한 사내가 움켜쥐고 있었다.
강우희의 사부 이백이었다.
강우희가 품고 있는 기운이야 원래 혼돈의 것이니 더 강성해지긴 어렵다.
허나 이백은 다르다.
애초 화경고수이며 신수의 계약자다.
무엇보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의 소유자이지 않은가.
혼돈의 기운이 궁기의 기운을 넘어서는 게 가능했다.
―젠장! 젠장! 제엔자아앙!!!
―뒈지는 건, 바로 너다!!
곤륜의 만년설처럼 극한의 냉기가 궁기를 덮쳤다.
궁기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으나 검은 불길이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해주었다.
허나 상황이 역전되어 이젠 궁기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 타격을 받았다.
혼돈이 완전히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듯 순식간에 달려갔다.
“캬…아…….”
궁기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혼돈이 그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순간, 누군가 막았다.
“그만, 물러나.”
“캬!!”
혼돈을 막은 건 이백이었다.
분노한 혼돈은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도와준 건 도와준 거고, 자신을 방해한 건 용납할 수 없던 탓이다.
“어디 사부님께 이를 드러내는 거야! 혼나볼래!”
“끼이잉…….”
강우희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화를 냈다.
혼돈은 더 이상 분노를 터트릴 수 없었다.
어느새 가체(假體)로 돌아온 탓이다.
강아지가 된 혼돈은 아쉬워하며 강우희의 곁으로 돌아갔다.
숨을 헐떡이는 궁기를 바라보는 이백의 눈동자가 금빛을 내고 있었다.
[‘혜안’이 발동됩니다.]
[흉수 ‘궁기’가 굴복했습니다.]
[흉수 ‘궁기’가 계약을 맺길 원합니다.]
[가(可)/부(否)]
너무 많은 영력을 소진한 궁기는 이대로라면 소멸 위기에 처했다.
살기 위해 이백을 선택한 것이다.
“부(否). 네 친구는 내가 아니야.”
이백은 궁기와의 계약을 거부했다.
비록 흉수라도 신수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짐승이다.
먼저 숙이고 들어왔는데 거부하는 건 아쉬운 결정이다.
허나 이백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혁아, 해보거라. 백수조련술을…….”
“저, 저는…….”
이백은 강우혁을 위해 궁기를 거부했다.
강우희에게 혼돈이 있듯, 강우혁에게 궁기를 곁에 두게 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허나 강우혁은 난색을 표했다.
백수조련술에 재능을 보인 강우희조차 법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계약을 맺었다.
헌데 재능이 없는 자신이 법기의 도움도 없이 궁기와 계약을 맺는 건 어렵다 생각했다.
이백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뭘 걱정하는지 알지만, 이 사부가 도와주마. 만수문의 대제자가 짐승 하나 다루지 못하면 쓰겠느냐? 게다가 네 몸속에 흐르는 피를 믿거라.”
“…예! 사부님.”
명색이 야수왕의 손자다.
생각처럼 재능이 없을 리 없다.
강우혁은 호흡을 가다듬고, 백수조련술의 구결에 따라 기운을 운용했다.
기경팔맥의 타통된 세 맥을 통해 기운이 원활하게 움직였다.
“임(臨), 병(兵), 투(鬪), 개(皆)…….”
강우혁은 포박자(抱朴子)의 육갑비축(六甲秘祝)을 읊기 시작했다.
누이와 마찬가지로 백수조련술이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육갑비축의 주문(呪文)에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진(陣), 열(列), 전(前), 행(行)!”
백수조련술의 기운이 궁기에게 스며들었다.
허나 썩어도 준치라고 상대는 사흉수의 궁기다.
기운에 반발했다.
백수조련술은 육신이 아닌 혼에 유대를 주는 공부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지친 궁기지만, 격이 무너진 게 아닌 만큼 강우혁의 백수조련술에 저항할 수 있었다.
“임(臨)! 병(兵)! 투(鬪)! 개(皆)…….”
강우혁은 육갑비축의 주문을 반복하며 백수조련술을 거듭 시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기는 버텨냈다.
상대는 사흉수다. 백수조련술이 아니라 백수통령술이라도 굴복시키긴 어렵다.
강우희처럼 법기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마범종이라도 있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쉽게도 살왕에게 넘겨주었다.
강우혁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짐승을 굴복시키는 건 내공만이 아니라 체력 그리고 정신력까지 소모되는 고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보자.
그의 귓가에 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가 도와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강우혁은 육갑비축의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진(陣)! 열(列)! 전(前)! 행(行)!”
그때 강우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백수안(百獸眼)을 개안(開眼)한 것이다.
강우혁의 백수안이 궁기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궁기는 움찔했다.
백수안은 짐승을 일시적으로 속박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다만 대상자의 정신 방어력(격)이 높은 경우 속박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궁기는 움찔했지만, 속박되진 못했다.
이백의 눈동자가 다시 금빛이 되었다.
[‘혜안’이 발동됩니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강우혁의 백회혈(百會穴)을 통해 ‘불완전한 신의 불꽃’.
즉, 신기(神氣)를 주입했다.
그의 상단전을 강제로 열기 위함이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행위다.
작은 실수로 그를 백치로 만들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허나 제자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할 이백이 아니다.
내공이 아닌 신기를 주입한 건 그러한 위험을 낮추기 위함이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은 강우혁의 뇌를 보호하면서 상단전에만 자극을 주었다.
쉽지 않기에 이백도 상당히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하겠다는 듯 야군이 번뜩이는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꽈직.
무언가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꽈직.
또다시 금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꽈지직!!
[강우혁의 상단전 개화를 성공했습니다.]
상단전이 열리는 순간, 강우혁의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빛났다.
그제야 궁기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속박되었다.
―지금이다!
“태상노군(太上老君)!”
이백의 목소리에 강우혁이 외쳤다.
그에 반응하듯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이 궁기의 혼을 감쌌다.
궁기는 원치 않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닫고 절규했다.
―아, 안 돼!!
“급급여율령봉칙(急急如律令奉敕)! 궁기(窮奇)!”
육갑비축 주문의 완성과 함께 백수조련술의 기운이, 궁기와 강우혁 사이에 유대를 형성시켰다.
이로써 강우혁은 궁기의 계약자가 되었다.
그때 궁기는 검은 불길로 변했다.
“엇!”
“괜찮다.”
당황한 강우혁을 이백이 붙잡았다.
강우혁과 달리 이백은 혜안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계약자 ‘강우혁’의 격이 ‘흉수 궁기’의 격보다 낮습니다.]
[‘흉수 궁기’의 격이 격하됩니다.]
혼돈은 법기 은고아를 통한 금제였기에 영력은 빼앗겼지만, 격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궁기는 계약자의 낮은 격 때문에 함께 격하되어 버린 것이다.
검은 불길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났다.
새끼 호랑이보단 크지만, 장성한 호랑이보단 작은 들개 정도의 어중간한 호랑이었다.
강우혁은 한눈에 궁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크앙! 크앙! 크아앙!!”
“잘 부탁해, 궁기야.”
격하된 궁기는 이전과 달리 심어(心語)를 사용할 수 없던 탓에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은고아와 달리 궁기를 제어할 능력은 없지만, 반대로 궁기 역시 계약자인 강우혁을 위협할 수 없다.
오히려 최우선이 바로 계약자의 보호였다.
울부짖는 궁기를 향해 이백이 말했다.
“분하면 우혁이가 빨리 강해질 수 있게 도와, 그럼 네 격도 다시 회복할 테니까.”
설군이 신수로서 격을 회복했던 것처럼.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