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힘(力)의 증명(證明)
“젠장, 야수왕께서 살아계셨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터인데…….”
설표족장은 전쟁을 준비하는 각 부족을 보며 속이 터졌다.
오독문은 분명 야수족의 원수다.
언젠가 그들을 무너트리고, 남만을 되찾아야 하는 게 야수족의 숙명인 걸 모르지 않았다.
허나 그게 지금은 아니다.
야수왕의 사후 그의 자식들은 대호족장의 자리를 두고 혈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대호족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대호족만이 아니다.
야수왕의 자식들을 지지하는 부족들 간의 충돌 역시 벌어졌다.
당대 대족장은 설표족장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가 손을 잡은 자는 딴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강영, 그 친구가 이겼다면… 후우…….”
설표족장이 당대 대족장 대신 손을 잡은 건 강영이었다.
야수왕의 많은 아들 중에서도 막내에 불과했지만, 가장 영민하여 야수족을 부흥시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걸 알아본 건 설표족장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강영은 여러 형제들의 견제를 받았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강영을 견제하기 위해 형제들을 자극시킨 게 바로 당대 대족장 강상이었다.
강상은 형제들이 차례차례 자멸하게 만든 후 마지막에 등에 칼을 꽂아 대호족을 차지했다.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자는 그일지 모른다.
허나 아비인 야수왕처럼 절대적인 힘과 위엄을 가지지 못했다.
어찌 보면 오독문과의 전쟁은 자신이 아비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리기 위함일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우리 설표족은 어찌하는 게 좋단 말인가.”
그 역시 야수족에 나타난 괴물의 힘을 직접 겪어봤다.
설표족장이자 야수족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전사이거늘, 그 괴물을 상대로 일각을 버티지 못했다.
그것도 그 괴물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애초 대호족을 야수족의 대족장으로 만들어준 수호신을 상대로 팽팽한 접전을 이룬 자다.
그 괴물이 오독문과의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아예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그를 믿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설표족장은 괴물만 믿고 오독문과 전쟁을 하려는 대족장의 뜻을 반한 것이다.
만약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입지조차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승리해도 문제다.
야수족의 입지는 높아지겠지만, 오독문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선봉을 거부한 설표족의 입지는 한없이 줄어들 테니까.
“우끼끼~!”
“음? 우융족(????狨)의 성성(猩猩)인가?”
우융족은 야수족 중에서도 원숭이를 기르는 부족이다.
말이 원숭이지, 덩치가 크고 포악해 날카로운 이와 발톱이 없음에도 적을 찢어 죽이는 맹수다.
그래서인지 요괴 원숭이라는 의미로 우융(????狨)이라 부족명이 붙은 것이다.
헌데 눈앞의 원숭이는 새끼인가 싶을 정도로 작았고, 금빛의 털이 윤이 났다.
설표족장이 알고 있는 우융족의 성성과는 좀 달라 보였다.
애초 야수족 중 원숭이를 기르는 곳이 우융족만은 아니었다.
“우끼끼~ 우끼끼~”
“왜 그러느냐.”
새끼 원숭이는 방방 뛰었다.
설표족장으로서는 새끼 원숭이가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야수족이라도 그는 평생 설표하고만 살아온 만큼 그 외의 짐승의 습성까지 알지는 못했다.
새끼 원숭이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우끼끼~!”
“음? 따라오라고?”
새끼 원숭이는 고갤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설표족장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나갔다.
새끼 원숭이는 평범한 짐승이 아닌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그걸 멍하니 바라본 설표족장은 흥미가 생겼다.
“누구기에 날 초대한 거지? 가보면 알겠지.”
* * *
“긴장되느냐?”
운남성에 당도한 이백은 남만으로 곧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남만(南蠻)은 묘족의 영역이기에 신중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운남(雲南)을 남만이라 칭했다.
하지만 현재는 운남의 남부만 남만이라 칭하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묘족은 운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만은 묘족 중에서도 화묘(花苗)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백의 목적은 화묘가 아닌 백묘(白苗)였다.
“예, 아버지의 친우분은 처음이라…….”
“저도요…….”
강씨 남매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아비인 강영이 친화력이 있어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긴 했지만, 한족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마음까지 털어놓을 친우는 없었다.
유일한 존재는 당 부인. 즉, 강씨 남매의 어미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비의 친우는 생전 처음 만나게 되는 셈이다.
“아버지의 친우분께서 저흴 반가워하실까요?”
“왜 걱정되느냐?”
“그게…….”
강우혁은 쉬이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제 입에 담을 수 없던 탓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자신들의 아비는 결국 고향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니 아무리 과거 친했던 친우라도 아버지를 배신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이의 자식들이다. 반가워할 거라 자신하긴 어려웠다.
이백은 제자들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친우는 이유 따위 없이 서로를 믿어주는 법이란다. 그가 너흴 배척한다면 너희 아버지의 진짜 친우는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
머리로는 사부의 말을 이해하지만, 가슴은 그렇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백은 누군가를 마중 나갔던 금군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금군만이 아니라 계약을 맺은 영물들과 영적인 유대를 맺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 거의 다 왔구나.”
이백의 말에 강씨 남매는 긴장감이 바짝 올랐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듯 나무와 나무를 타고 다가오는 금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새하얀 설표 두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는 멧돼지보다 큰 설표 한 마리와 설표 가죽을 뒤집어쓴 누군가였다.
일인일표(一人一豹)는 이백 등을 발견했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멈추었다.
특히 설표는 으르렁거리며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금군은 달려와 이백의 품에 안겼다.
“우끼끼~!”
“수고했다, 금군아.”
이백은 수고한 금군을 쓰다듬어주었다.
이에 금군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영물인지라 지능을 가지긴 했지만,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귀하가 설표족을 이끄는 소찬영 족장이시오?”
“한족? 날 부른 게 넌가.”
설표족장 소찬영은 이백을 한족이라 지레짐작했다.
중원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복장 역시 그러했으니,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이백은 대한민국에서 왔으니, 이 시대 기준이라면 조선인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본인은 이백이라 하오.”
“이백? 네가 누군데, 날 아는 거지?”
소찬영은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묘족은 한족에 의해 차별을 받아왔던 만큼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백묘는 묘족 중에서도 한족을 적대시하는 성향이 강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인 셈이다.
그가 설표족의 소찬영이라는 걸 확인한 이백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강우혁이, 숙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가, 강우희가 인사드려요.”
아이들의 뜬금없는 인사에 소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숙부라니.
자신에게 한족 조카가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다만 걸리는 게 있었다.
“너희는 누구이기에 내게 인사를 하는 거냐. 그리고 날 숙부라고 부르는 거지?”
“저희의 아버지께선 강씨 성에 영자 이름을 쓰셨습니다.”
“강…영……!!”
강우혁의 말에 소찬영의 눈이 커졌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에게 강영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소찬영의 그러한 반응에 강씨 남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희가 강영… 그 녀석의 자식이라고?”
“예, 소 숙부님.”
강우혁의 대답에 소찬영은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척에 당도하자 고갤 끄덕였다.
“맞구나. 강영 그 녀석의 얼굴이 남아있어.”
피는 못 속인다고, 강씨 남매의 얼굴에 아비 강영의 얼굴이 엿보였다.
그제야 소찬영도 더 이상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 녀석은 어쩌고 너희만 왔느냐?”
“그게… 아버지께서는…….”
소찬영의 물음에 강씨 남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반응에 소찬영은 본능적으로 강영이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 어린 남매가 아비가 아닌 낯선 사내와 함께 나타났다.
그때 이미 예상했어야 했다.
“…그렇구나. 녀석은, 잘 갔느냐.”
“…예, 소 숙부님.”
소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십여 년 만에 형제와 같았던 친우의 소식이 그의 죽음이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강영, 그 녀석은 나의 형제다. 그러니 너흰 이 숙부가 책임져 주마.”
“그럴 필요 없소. 그런 부탁을 위해 제자들을 그대에게 데려온 게 아니니.”
그의 제안을 강씨 남매를 대신해 이백이 거절했다.
소찬영은 그를 바로 보았다.
“이 아이들의 사부라고? 이 아이들을 지켜줄 힘은 있고?”
“어떨 것 같소?”
소찬영의 말투는 곱지 않았으나 이백은 불쾌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강씨 남매에 대한 인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백은 못 미더웠다.
설표족은 야수족 내에서 마른 편에 속했다.
그건 그들이 힘보다 민첩함에 중심을 둔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백보다 체격이 좋았다.
그런 소찬영의 눈에 이백이 못 미더운 게 당연했다.
“시험해… 보지!”
언제 움직였는지 소찬영의 손에 이백의 목에 닿았다.
내공이 아닌 외공만으로 낼 수 있는 민첩함인가 싶을 정도다.
후욱!
이백의 목을 잡았다 생각했지만, 소찬영의 손은 그가 있던 자리만 휘저었을 뿐이다.
극쾌의 움직임으로 인해 잔상이 남는다는 이형환위(移形換位)의 경지였다.
“한족 놈들이 말하는 무공이란 건가?”
“이걸로는 납득이 되지 않소?”
중원무림인이라면 기겁할 경지지만, 무공 체계가 다른 남만야수족에겐 잡기로만 보일 뿐이었다.
특히 설표족은 야수족 제일의 민첩함을 가장하는 부족이다.
소찬영은 그런 설표족의 족장.
보법고수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으로 이백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이백은 피하지 않았다.
퍽!
소찬영과 이백의 양손이 맞닿았다.
꽈악!
힘(力)으로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예상치 않은 이백의 근력에 소찬영은 내심 놀랐다.
‘마냥 물렁하진 않단 말이지.’
놀랍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불끈! 불끈!
소찬영의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야수족(野獸族)이라 불리는 이유는 맹수를 가축처럼 기른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야수족의 전투방식이 흡사 사냥하는 야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빠득! 빠드득!
맞잡은 손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단순히 근육이 팽창한 게 아니라 그만큼 근력이 강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버텨?’
힘(力)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고 하지만 바위도 으깰 정도의 악력이다.
헌데 이백의 입에서 비명은커녕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유명한 야수족의 야수화(野獸化)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