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133화 (133/200)

133화. 살왕(殺王)의 빚(債)

“누굴 거 같은가.”

이백은 당황스러웠다.

지척까지 접근할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조차 놀랍지만, 이백을 더 놀라게 만든 건.

자신의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박귀진(返璞歸眞)? 아니, 틀려.’

지고(至高)한 경지에 도달해 오히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모습으로 보이는 경지가 바로 반박귀진의 경지다.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른 자는 단 한 명 만나보았다.

사천당가의 가주 독선(毒仙).

그럼 눈앞의 존재 역시 우내오존의 일좌?

허나 이백은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그는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無)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아니라면…….’

우내오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게 아닌 이상 이러한 능력을 가진 자가 단 한 명뿐이다.

“살왕…이시오.”

모든 살수 위에 군림한 존재, 살수지왕.

살막의 막주.

살왕(殺王).

그게 바로 그의 정체였다.

찌릿!

그 순간 가공한 살기(殺氣)가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 아니, 무림고수라도 심장이 멎을 정도로 가공한 살기였다.

서걱!

언제 움직였는지 이백의 손에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과연 백호왕인가.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네.”

“날 설득하지 못하면, 경계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이백은 당장이라고 달려들 기세였다.

상대가 살수지왕이라 불리는 존재라지만, 이백 역시 골패로 백호왕이란 칭호를 받은 게 아니다.

그걸 느꼈는지 살왕은 한 걸음 물러났다.

“노부가 자넬 해할 생각이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일세.”

“…그건 인정하오.”

살왕은 강하다.

살막의 막주라고 해서 십왕(十王)의 칭호를 받은 게 아니다.

전대십왕 중 한 명을 암살하고, 살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진정한 힘은 암살(暗殺)에 있었다.

그런 그가 이리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가 암살을 하려는 게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다.

허나 이백은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경계를 두기에 살왕이라는 칭호가 주는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백호왕이 이리 경계해주니, 영광이라 해야 하나.”

“…용건.”

살왕과 한 공간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십장(十丈) 이내는 화경고수에게 한 호흡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살왕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서 방심하면 그 순간 죽일 수 있다.

“거래를 하고 싶다.”

“거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뜬금없었다.

자신에게 거래를 청하다니 말이다.

애초 이백은 자신에게 살왕이 직접 거래를 청할 만한 게 있나?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허나 살왕쯤 되는 자가 착각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제마범종(制魔梵鐘).”

“…그걸 어떻게…….”

살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의외였다.

애초 자신의 수중에 제마법종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제마범종이 신병이기도 아닌 법기(法器).

무림고수인 살왕이 탐을 낼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게 중요한가. 은잠보의(隱潛寶衣)라면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

이백의 눈이 커졌다.

제마범종과 거래할 물건으로 은잠보의를 내걸 줄 몰랐던 탓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도검불침은 기본이고 입고 있는 이의 기척을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살막의 보물이다.

살수나 양상군자 등 은신(隱身)으로 먹고사는 자들에게 최고의 보물이다.

게임 [영웅 : 무림전설]에서 전설급에 해당하는 아이템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제마범종도 분명 보물이지만, 은잠보의를 내놓을 정도의 가치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것도 살왕 정도 되는 거물에게 말이다.

“은잠보의가 제마범종보다 못하다 생각하지 않다.”

“이율… 말해 줄 수 있소?”

이백으로서는 살왕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제마범종에 자신이 알지 못한 비밀이 있는 건가?

“…이유를 말하면 거래를 할 텐가?”

“아니, 거절하겠소.”

은잠보의. 분명 대단한 보물이지만, 이백은 거절했다.

그의 거절에 살왕의 눈빛이 바뀌었다.

당장이라고 달려들 기세였다.

“어째서지.”

“분명 탐나는 보물이지만, 오히려 알려지면 날파리들만 꼬일 수 있소. 그에 반해 제마범종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오. …설명이 되었소?”

누가 감히 이백의 수중에서 보물을 훔쳐 갈 수 있겠는가.

허나 은잠보의라면 목숨을 걸어볼 만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살수나 양상군자들이 귀찮게 할 게 뻔하다.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날파리 대신 본좌가 자넬 귀찮게 할 수 있네.”

“…그렇게까지 제마범종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오?”

살왕은 빠르게 계산했다.

백호왕과 싸워서 제마범종을 손에 넣는 것과 그를 설득해 거래하는 것 중 무엇이 득인지를.

이백과 꼭 싸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의 제자를 인질로 삼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백이 백호왕이라 불리는 건, 백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계산이 끝난 살왕이 입을 열었다.

“…제마범종의 원래 주인이 바로 본좌다.”

“제마범종이… 살막의 것이라고?”

마를 제압하는 범종과 살문 최고라는 살막.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강탈당했다.”

“천하의 살왕에게서 강탈할 자가 있다고?”

“본좌의… 아들에게 빠드득…….”

당시를 떠올린 살왕이 이를 갈았다.

살기까지 뿜어내는 걸 보면, 강탈당한 과정에서 살왕의 아들이 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주화입마에 빠진 아들을 위해 제마범종이 필요하다.”

“…우혁아, 너의 것이니. 네가 결정하거라. 제마범종 대신 은잠보의를 가질 테냐.”

이백은 결정권을 제자에게 넘겼다.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제마범종은 자신이 아닌 강우혁의 것이니까.

“은잠보의,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제마범종은 돌려드릴게요.”

“……!!”

강우혁의 말에 이백도 이백이지만, 천하의 살왕이 당황했다.

대가도 없이 제마범종을 돌려줄 거라 상상도 못 했다.

급한 마음에 살막의 보물인 은잠보의까지 거래물로 삼지 않았던가.

이백은 강우혁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은잠보의란다. 어쩜 너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줄지 모를 보물이다.”

“그렇다고 해도 저의 것이 아니잖아요.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리고 필요하시다고 하잖아요. 저 할아버지 아들에게요.”

“…….”

강우혁의 말에 살왕은 말을 잃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이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강우혁은 품에서 제마범종을 꺼냈다.

“이거… 가져가세요. 살왕 할아버지.”

“…….”

살왕은 이백을 바라보았다.

받아도 되느냔 뜻이었다.

“우혁이의 뜻대로 한다 했소.”

“고맙…구나.”

은잠보의까지 내놓을 생각하던 살왕으로서는 얼떨떨했다.

제마범종을 한참 바라보던 살왕은 품에 넣었다.

대신 손가락에 끼어있던 반지를 뺐다.

“귀왕인(鬼王刃)이라는 암기다.”

십대암기의 하나로, 귀왕(鬼王)이라고 불린 살수의 전설적인 암기다.

귀왕의 맥은 끊기고, 살막의 품에 들어온 귀왕인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강우혁은 이백을 바라보았다.

“어른이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아라.”

“감사합니다. 살왕 할아버지.”

“…….”

살왕 할아버지라는 말이 어색하기만 했지만,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살왕은 귀왕인의 사용법을 전수한 후 이백에게 물었다.

“제마범종을 가졌던 자가… 신궁이 맞나.”

“혈법당주란 자이니, 신궁이 맞소.”

살왕의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아들에게서 강탈한 자가 신궁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신궁은 또 한 명의 절대강자와 악연을 맺게 되었다.

“피는 피로 갚는 법. 놈들이 중원이 나타나는 날, 본막이 왜 공포라고 불리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게 진 빚은 언젠가 갚으마.”

“귀, 귀왕인을 받았…….”

강우혁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살왕이 사라졌다.

그는 계산이 빠른 자다.

귀왕인만큼으로는 계산이 맞지 않다 판단을 내렸다.

이로서 강우혁은 가장 무서운 집단에게 빚을 지운 것이다.

이백은 강우혁의 머릴 쓰다듬었다.

“잘했다. 우혁아…….”

*  *  *

“대족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새하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호랑이 가죽을 입은 거구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새하얀 표범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다시 한번 말했다.

“오독문과의 전쟁은 많은 형제들을 죽음으로 몰 겁니다! 결정을 거둬주십시오!”

“설표족장님, 대족장님의 결정입…….”

“닥쳐! 야수족을 개죽음으로 만들 셈이더냐!”

두려움을 모른다는 설표족의 전사들은 언제나 선봉에 섰고, 항상 승리를 가져왔다.

그 공과 힘은 설표족(雪豹族)을 대호족 다음으로 발언권이 강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기 때문인지 대대로 대족장은 설표족장을 가까이 두었다.

허나 당대 대족장은 오히려 설표족장을 경계하듯 거리를 두었다.

그렇다고 설표족장의 발언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흠흠…….”

“미안하오, 흑견족장.”

전투력만 본다면 야수족에서 중하위에 속하지만, 가장 많은 개체를 자랑하는 부족이 바로 흑견족(黑犬族)이다.

개죽음이라는 표현에 흑견을 기르는 흑견족장에겐 그리 기분 좋은 표현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표족장은 그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그때 대족장보다 더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설표족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설표족장, 우려를 알겠지만. 대족장님의 결정일세. 그럼 우리 야수족은 따라야 하네.”

“하지만 형님 아니, 거웅족장님!”

힘으로는 야수족 제일이라고 불리는 거웅족(巨熊族).

거웅족장과 설표족장은 사적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런 의형이 제 의견에 손을 들어주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야수족의 족장들이 모인 만큼 사감(私感)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거웅족장까지 오독문과의 전쟁에 손을 들어주니, 설표족장은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저희 설표족 역시 참전하겠습니다. 단! 이번 전쟁에선 선봉에 서지 않겠습니다. 대족장님.”

“아니, 설표족에서…….”

선봉장을 자청하던 설표족장이거늘, 항의의 의미였는지 선봉을 거절했다.

그의 선언에 고랑족장이 당황했다.

설표족에 가려져 야수족 내 입지가 적었던 고랑족(孤狼族).

당대 대족장은 설표족 대신 고랑족을 가까이했다.

그래서인지 대족장을 향한 고랑족장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이 모든 게 설표족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지 않음에도 말이다.

“허락한다.”

“대, 대족장님!”

대족장은 설표족장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독문과의 전쟁에서 설표족이 막대한 피해를 입길 기대했던 고랑족장으로선 당황스럽기만 했다.

대족장 역시 아쉽지만, 설표족을 대신할 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우리 야수족의 선봉은 고랑족이 맡아주면 좋겠군. 가능하겠는가.”

“마, 맡겨주십시오!”

야수족은 그 용맹함이 곧 힘이요 서열이다.

선봉장의 역할을 설표족 대신 고랑족에 맡긴다는 건, 다르게 말해 야수족 내 설표족의 입지를 줄이겠단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설표족장이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표족이 용맹하다고 하지만, 무모한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는 혈뢰음사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다. 우린 저 가증스러운 오독문을 무너트리고, 남만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