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망령(亡靈) (3)
“끄응…….”
벽하도장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의식이 돌아온 벽하도장의 눈이 떠졌다.
“여…긴…….”
눈에 익은 장소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평생 살아온 방이니까.
신궁의 고수들은 강했다.
추암당과 공동파 고수들마저 감당치 못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부상을 입은 벽하도장은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상태로 종남파에 실려 온 것이다.
“태…백!”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돌아온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태백. 그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道名)이다.
어찌 잊겠는가. 사부님의 원수를.
그때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불렀느냐.”
“……!!”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갤 돌리자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본 그 얼굴이 맞았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치며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반갑자(半甲子). 어린 청년이 초로의 사내가 될 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간 쌓은 분노와 원한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고함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벽하도장은 분통이 터졌다.
“잘… 지냈느냐. 천하검수가 되었단 말을 들었다.”
“…….”
태백의 말투는 너무도 평온하고 따스했다.
흡사 오랜만에 만난 숙부처럼.
그런 그의 태도에 벽하도장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먼저 간 태광도 기뻐할 것이다.”
“…신이…….”
벽하도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태백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사부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억눌렀던 분노가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고 태백을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벽하도장을 우습게 본 것도, 그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라 자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죄를, 자신을 업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찌 모르겠느냐. 노부와 가장 존경한 사제였는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감히! 감히!!”
가증스러웠다.
자신의 사부를 존경했다는 그의 저 위선.
하루도 그를 잊은 적 없었다.
하루도 그를 저주하지 않은 적 없었다.
하루도 그를 마음속으로 죽이지 않은 적 없었다.
‘저 목만 비틀어버려도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를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어.’
마음속, 깊은 속에서 살심(殺心)을 치밀어 올랐다.
그를, 사부님의 원수를 죽일 수 있다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살심을 가졌다는 걸 알리듯 벽하도장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태백의 멱살을 잡았던 손이 어느새 그의 목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태백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죽! 어! 죽으라… 컥!”
“이놈! 어디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범하려느냐!!”
갑작스런 충격에 벽하도장은 튕겨 나갔다.
그를 쳐낸 건 태백이 아니다.
종남의 당대 장문인 태현진인이었다.
종남의 절학 벽운천강수(碧雲天剛手)는 매우 강맹한 수법이다.
비록 내공을 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위력은 가벼이 볼 수 없다.
그걸 증명하듯 벽하도장은 바들바들 떨며 일어났다.
“쿨럭… 어…찌… 막으십니까!”
“네 이놈이!!”
벽하도장의 반항적인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헌데 이번은 달랐다.
도를 넘어섰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문의 어른을 죽이려 했다.
종남의 장문인으로서 두고 볼 수 없었다.
허나 그런 그를 만류한 자가 있었다.
“되었네. 난 괜찮으니 자넨 그만 돌아가 있게.”
“허나 대사형…….”
태백의 말에 태현진인은 거부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벽하도장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저자에게 대사형이라 칭하십니까! 사부님을 죽인 저 파문자(破門者)를 어찌!!”
“…대사형은 본문의, 종남의 제자가 아닌 적이 없다.”
벽하도장의 울부짖음에 태현도장은 이를 부정했다.
그는 태백이 파문제자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벽하도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사부님을 죽은 저…자가, 파문… 당한 적이 없단 그런 개소리를 하는 겁니까!”
“벽하 사질!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예를 갖췄다. 빈도는 종남의 장문이고, 자네의 사숙이다!”
떠밀리듯 장문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태현진인이 물렁한 자가 아니다.
장문인으로서 위엄과 권위가 있었다.
무너져가는 종남을 그나마 이 정도라도 지켜낸 건 운이 아니었다.
“그게! 종남의 장문이신 분의 입에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어찌 사부님을 죽인 저자를 그렇게까지 두둔하시려는 겁니까!”
“대사형의 파문을 반대하신 분이 장문 사백이셨다.”
“……!!”
벽하도장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심각하게 흔들렸다.
전대 장문인 죽은 태광진인의 사부, 영허진인이다.
무극검성(無極劍聖)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무위와 존경받는 장문인이었다.
가장 태백의 파문을 주장할 영허진인이 오히려 파문을 반대했다?
벽하도장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 그딴 거짓말을 믿으라 하십니까!”
“거짓말이라 생각하느냐. 종남의 장문인 빈도가 영허 사백의 청명(淸名)을 훼손할 자로 보이더냐!”
태현진인의 일갈에 벽하도장의 눈동자는 또다시 흔들렸다.
분하지만, 그가 봐온 태현진인은 결코 그러한 자가 아님을 스르로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믿기 어려웠다. 믿고 싶지 않았다.
“사조께서… 사조께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 리가…….”
“사고였으니까. 그 비무는 사고였으니까.”
반갑자 전, 차기 장문인의 자리를 놓고 두 제자가 비무를 진행했다.
당시 종남 일대제자의 대사형(大師兄) 태백과 장문인의 제자 장문제자(掌門弟子) 태광.
보통 장문제자가 대사형이라 불리지만, 당시는 종남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종남제일검(終南第一劍)은 영허진인의 사형인 영천진인이었기 때문이다.
태백은 사부 영천진인의 뒤를 이어 종남일검(終南一劍)의 칭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포용력 덕분에 많은 사형제들이 따랐다. 그렇기에 대사형의 지위까지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장문제자 태광도 만만치 않았다. 종남이검(終南二劍)이라 불릴 정도로 태백과 견줄 수 있는 무위를 가졌으니까.
태백, 태광 그리고 태현. 삼인을 합쳐 종남삼검이라 불렸지만, 사실 태현진인은 두 사람에 비해 반수 아래였다.
그런 두 사람의 비무는 대단했다. 어느 한 명 차기 장문인으로서 부족하지 않았다.
허나 그게 비극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저자가 장문 자리가 탐이 나서 사부님을…….”
“갈(喝)!! 얼마나 더 더럽히려 하느냐! 태백 사형을, 태광 사형을!”
당시 두 사람은 쉬이 승패를 가를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종남의 자랑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을 8성까지 익혔다.
허나 내공심법은 조금 달랐다.
종남 제일이라는 육합귀진신공(六合歸眞神功)과 종남을 대표하는 은하천강신공(銀河天罡神功).
종남파의 또 재미있는 점은 제일의 신공과 대표 신공이 달랐다.
종남 제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육합귀진신공은 뛰어나다.
태을신공, 현청건곤강기, 천단신공, 태진강기, 칠음진기, 구양신공.
하나 같이 뛰어난 여섯 신공을 익혀야 비로소 익힐 수 있는 게 육합귀진신공이다.
하나만 대성해도 대단한 신공을 여섯이나 익힌다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종남파의 역사상 육합귀진신공을 대성한 인물은 두 손에 꼽힐 정도다.
그런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자가 태백이다.
태광진인은 영허진인과 같은 은하천강신공을 익혔다.
막상막하의 비무였지만, 태광진인은 스스로 밀리고 있음을 느꼈는지 조바심을 냈다.
조바심은 실수를 낳았고, 어이없는 실수로 태백의 검에 찔리고 말았다.
찔린 사람도, 찌른 사람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라고!!”
벽하도장은 모든 걸 부정하듯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이를 본 태현진인은 노기를 드러냈다.
“이놈이 그래도……!”
“그러지 말게. 말하지 않았는가. 내 업이라고…. 그러니 내가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태백의 말에 그는 노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보다시피 벽하 사질은…….”
“그렇기에 내가 맡으려는 것일세. 그리고 벽하의 육합귀진신공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지 않은가.”
태현진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도호를 읊었다.
그의 뜻을 따르겠단 의미였다.
종남을 떠났던 제자가 오랜 방황을 마치고 종남의 품으로 돌아왔다.
허나 그는 더 이상 종남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저 종남의 빚을 갚으려는 빚쟁이었다.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빚을 갚으려 하는 것이다.
‘자네의 제자에게 그날의 빚을 갚겠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 * *
“허억… 허억… 허억…….”
강우혁은 거친 숨은 연신 내쉬었다.
푸욱~!
아차 하는 순간 황금빛 권격에 뼈도 못 추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돼!’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이다.
반전을 노리기 위해선 반격 이외엔 없었다.
상대의 권격을 피하던 강우혁의 눈빛이 붉게 바뀌었다.
“지금… 헉!”
상대는 강우혁이 반격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권격은 강우혁의 머릴 부술 기세였다.
콩!
허나 그의 머리에 닿기 직전에 멈추더니,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아얏! 금군이 너!”
“우끼끼~! 우끼끼~!”
강우혁을 몰아붙인 상대는 금군(金君)이었다.
금모신원(金毛神猿)은 금강불괴까지는 아니지만, 도검불침에 소(牛)도 찢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진 영물이었다.
그런 금군은 이백을 만난 후 영물로서 한층 더 성장했다.
절정 이하의 고수는 금군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짐승답게 야성과 감각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신체 구조를 가진 만큼 자주 강우혁의 비무 상대가 되어주었다.
물론 금군의 일방적인 승리지만 말이다.
“혈랑인(血狼刃)은 그러라고 가르쳐 준 게 아니란다.”
“사, 사부님 그, 그게 아니라…….”
패왕성을 떠난 이유 이백은 강우혁에게 청랑조법의 대부분을 가르쳐주었다.
대부분 청랑아(靑狼牙)에서 파생되었기에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를 익히고 숙달시키는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백은 그에게 청랑조법을 가르치며, 고민한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혈랑인을 가르쳐도 될지였다.
혈랑인은 역혈(逆血)을 통해 청랑조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수법이다.
대신 살기가 강해져 냉철함을 잃을 수 있다.
설사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고 해도 역혈 자체가 위험하다.
그럼에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구명지초(命救之初)로 삼을 비장의 수가 필요할 거란 생각에 고민 끝에 가르친 것이다.
“하아… 이 사부의 생각이 짧았구나. 네게 혈랑인은 가르치는 게 아닌데…….”
“죄송해요, 사부님…. 다시는 혈랑인을 운용하지 않을게요. 용서해주세요.”
사부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강우혁은 고갤 푹 숙였다.
축 처진 제자의 모습에 이백은 가슴이 아팠지만, 다독여 줄 수 없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혼을 내지 않으면 무분별하게 혈랑인을 펼칠 수 있고, 그로 인해 언젠가 강우혁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허허… 실수도 하면서 크는 거 아니겠는가.”
“…당신은…누구십니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