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망령(亡靈) (2)
후~웅~!
목도가 움직일 때마다 흉흉한 소리를 냈다.
강우혁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목도를 피하며 기회를 엿봤다.
“큰소리치더니, 도망치는 것밖에 못 하나 보지?”
“…….”
또래의 소녀는 비아냥거렸다.
허나 도발에도 강우혁은 발끈하지 않고, 냉정을 유지했다.
“약한 주제에…….”
“…….”
강우혁은 여전히 도발에도 담담했다.
그런 반응이 소녀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결국 선을 넘게 했다.
“백호왕께서는 도망치는 것밖에 안 가르치셨…….”
“사부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냉철함을 유지하던 강우혁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그의 반응에 소녀는 움찔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사실에 득의했다.
달려드는 강우혁을 향해 목도를 휘둘렀다.
그녀는 위력이 강한 초식보다는 빠르고 섬세한 도초를 펼쳤다.
강우희와의 일전에도 그녀 역시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 하후지희의 목도는 강우혁의 가슴을 향했다.
허나 강우혁은 상체를 살짝 비틀어 피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하후지희 역시 손목을 비틀며 도로(刀路)를 바꾸었다.
강우희와의 비무에서 청랑보법을 한번 겪어본 덕분에 이러한 예측이 가능했다.
슥~ 스슥~!
“엇!”
목도는 허공만 갈랐다.
강우혁 역시 예상했는지, 한 번 더 몸을 비틀어 그녀의 목도를 피해낸 덕분이다.
곧 실패는 곧 상대에 자신의 빈틈을 내주는 법.
강우혁은 이를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후욱~!
둘 사이는 매우 근접했기에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퍽!
“흐…음…….”
타격음과 함께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강우혁의 신음이었다.
그의 권격은 정확히 하후지희의 옆구리에 꽂혔다. 아니, 꽂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목도가 강우혁의 주먹 옆면을 밀쳐냈다.
그로 인해 그의 주먹 역시 하후지희에게 닿지 못했다.
질긴 소가죽의 수투를 끼고 있기에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건 면했지만, 통증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통증으로 인해 강우혁이 주춤하는 사이, 하후지희의 목도가 그의 목에 닿았다.
“내가… 졌습니다, 소저.”
“…….”
의외로 박진감 넘치는 비무였고, 승자는 하후지희였다.
그녀는 분명 이겼지만,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운에 가까운 승리라는 걸 본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무공에 입문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수투를 꼈다지만 무기를 들지 않은 상대를 간신히 이긴 게 어찌 자랑스럽겠는가.
강우혁에게 겨누었던 목도를 거두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지, 그녀는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말도 없이 먼저 돌아가 버렸다.
“내가 졌다고 그러는 건가?”
어른들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대면하게 되었다.
그녀는 면전에 대고 약한 사내를 싫어한다고 면박을 주었고, 그게 이 비무를 하게 된 이유였다.
결국 강우혁은 보기 좋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이백이 다가왔다.
“수고했다.”
“죄송해요, 사부님.”
강우혁은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패배한 걸 인정했다.
하지만 이백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패배를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를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아니, 죄송할 게 무엇 있겠느냐. 그보다 청랑보가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예, 저도 놀랐습니다.”
청랑보법은 보이는 것처럼 거센 보법이다. 하지만 그 속에 부드러움(柔)이 담겨 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기만 한 보법이 아니니 말이다.
막판에는 당했지만, 연이어 하후지희의 도격을 피한 건 그만큼 청랑보법의 운용이 자연스러워졌다는 증거다.
허나 숙련에 의한 자연스러움이라기보다는 벌모세수대법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기경팔맥 중 셋이나 타통되면서 내공 운용에 훨씬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근골 역시 무공을 익히고 펼치기에 원활하게 변한 덕분이니 말이다.
“허나 아직이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에요. 다음번에는… 앞으로는 지지, 않을 거예요.”
제자의 결심에 이백은 미소로 화답했다.
* * *
“…….”
거처로 돌아온 하후지희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자신이 비무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숙함과 상대의 운이 합쳐져 강우희에게 패배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헌데 강우혁과는 비무는 반대였다.
자신이 운이 좋았고, 상대가 미숙했기에 이겼다.
그렇기에 분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중년 사내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떻게 느끼던지, 결국 이긴 건…. 바로 너다.”
“…아버지…….”
하후지희의 뒤를 따라온 자는 소패왕(小霸王) 하우패. 그녀의 아버지였다.
비록 갑작스런 비무였지만, 이백의 제자와 패왕성의 금지옥엽의 비무다.
다칠 수 있는데, 참관인 하나 없이 진행될 리가 없다.
그렇게 이백과 하우패의 참관하에 둘의 비무가 진행되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성장한 여식의 도법에 하후패는 흐뭇했다.
강우혁의 실력은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았으나 무공입문 시기를 생각하면 부족한 실력도 아니다. 그렇기에 결국 그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하후지희의 어깨는 축 처졌다.
하후패는 그 이유를 알기에 말없이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네가 납득할 수 없다면, 그 역시 옳다.”
“…….”
모순적인 아비의 말에 하후지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보다 앞에 서 있는 자.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있는 자.
하후패는 아비이기 이전에 선배였다.
“답은 간단하다.”
“그… 답이 뭐죠.”
“결국 네가 강해지면 된다. 그럼 더 이상 이러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해결책치곤 너무 성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확실한 정답도 없었다.
결국 자신이 강하지 못했기에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란 걸 하후지희. 그 본인도 깨달았으니까.
“강해질 거예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그래, 이 아비가 도와주마.”
하후패는 여식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아직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고작 불혹.
그럼에도 수년 안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거란 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이미 초절정의 벽을 두들기고 있다.
그런 하후패라면 여식의 좋은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이 아비가 네가 원하는 걸 이루게 해주마.’
* * *
“손녀사위는 정말 두고 가지 않을 생각인가?”
이백은 패왕성을 떠나기 위해 성문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배웅하는 자는 놀랍게도 패황이었다.
패황의 말에 강우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제자를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다니? 진심일세. 아니라면 무리를 했겠는가?”
벌모세수대법은 내공소모는 물론 심력 역시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다.
게다가 강우혁의 기경팔맥 중 세 개의 맥이나 타통시켰다.
패황의 무리했다는 말이 마냥 농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패황은 그 이후 며칠을 정양했다.
“우혁이의 외가가 당가인 거 모르십니까?”
“이성방계(異姓傍系)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걸 신경 쓸 거 같나? 본좌는 패황일세.”
오대세가의 사천당가와 거대사파 패왕성.
혈족 간의 혼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허나 패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만큼 강우혁이 탐이 났던 것이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본성이 언젠가 너의 것이 될 수 있다.”
패황은 이백의 너머에 있는 소년. 강우혁을 겨냥해 말했다.
패왕성의 주인.
하후지희가 패황의 손녀이지만, 결국 여인이다.
왕좌는 그의 부군이 맡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패황의 말은 마냥 거짓이라 할 수 없다.
권력(權力).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
어린 소년조차 심장이 벌렁거리게 만드는 단어다.
“저, 저는…….”
“그래 말해 보거라.”
강우혁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걸 들은 패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 성주님이 되는 것보다 사부님의 뒤를 잇고 싶습니다.”
“뭐?”
그 순간 패황은 당황했는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비록 변방 취급받지만, 하나의 성(省)이다.
청해무림의 패자로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다.
그걸 거부하다니,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백은 씨익 웃으며, 강우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는군요.”
“허어…….”
천하의 패황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백은 강우혁, 강우희 남매를 사랑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이 아이들에게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겁니다. 그게 사부로서 제가 가야 할 길이니까요.”
“못 당하겠군.”
다행히 패황도 불쾌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백에게 말을 이으면서 눈은 강씨 남매에게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남만이 소란스럽다 하더군.”
“남만… 말입니까.”
패황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허나 이백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패황이 강씨 남매의 친가에 대해 눈치챘다면 뜬금없는 게 아닐 테니까.
“관심이 있을 거 같아서 말일세.”
“…그렇군요.”
모호한 반응이었지만, 패황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다음 행선지가 남만으로 결정된 순간이라는 것을.
제자들을 마차에 태운 이백은 마부석에 앉았다.
그렇게 마차는 패왕성을 그리고 청해성을 벗어났다.
* * *
“…그간, 잘 지내었는가.”
태백은 나직하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는 반갑자만에 종남산에 올랐다.
과거의 매듭을 풀기 위함이었다.
허나 상대는 그와 마음이 다른 듯 입을 꾹 다물었다.
“…….”
“허허, 미안하네. 태현 사제. 아니 이제 장문인이라 불러야겠군.”
천하검절(天下劍絶) 태현.
과거 태백과 함께 종남삼검(終南三劍)의 일인이었으며, 당대 종남파 장문인이기도 하다.
그런 태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날 사제로 생각하긴 하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인가. 그야 당연히…….”
“헌데 어찌 이제야 돌아온 것이오. 왜 이제야 돌아온 거냔 말이오!”
“…….”
태현의 울부짖음에 태백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사형제들 중에서도 자신을 가장 잘 따랐던 사제가 바로 태현이었다.
태백 역시 그를 가장 아꼈다.
허나 둘의 관계는 반갑자 전, 파탄 나고 말았다.
“대사형이 떠난 후. 소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본파가 이 지경에 되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막막함을! 아십니까! 아시냔 말입니다!”
“…미안하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종남의 미래라 불렸던 태백이 떠난 후, 종남의 정기는 점점 쇠약해졌다.
종남의 정기를 다시 회복시킬 생각보다 그를 원망하기만 바빴다.
결국 떠밀리듯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태현은 어떻게든 쇄신하려 했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힘들었다.
오대세가는 초절정고수가 최소 둘 이상인데, 종남은 천하검절 그 본인 이외에 배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 대를 기약해야 하건만, 이삼대 제자의 수가 화산의 절반에 불과했다.
종남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할 수 있다.
장문인으로서 태현의 마음고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말로, 미안하다는 말로! 모든 게 해결된답니까!”
“…천하검수를 가르치겠네.”
“……!”
태백의 선언에 태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종남의 미래가 될 천하검수(天下劍手).
그들이 바로 선다면 종남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태백이라면, 종남일검(終南一劍)이라고 불렸던 그라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리고 벽하 그 아이도…….”
“그 아이는… 대사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화가 누그러졌는지, 태백을 대사형이라 칭했다.
그는 고갤 끄덕였다.
“알고 있네. 그러니 맡겠다는 것일세. 업을 푸는 것도 내 몫일 테니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