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견랑무희(犬狼巫姬) (2)
챙! 채챙!!
도검이 충돌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복면을 쓴 괴한들은 복장도 무공도 제각기 달랐다.
같은 집단 소속이 아니란 뜻이었다.
“감히 본맹을 우습게 봤단 말이지!”
당자운이 버럭했다.
괴한들의 습격을 당한 건 추암당. 정확히는 패왕성을 떠난 제갈현호 일행이다.
천패의 사달 이후 패왕성은 어수선했다.
그로 인해 원치 않게 발이 묶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야 추암당은 떠날 수 있었다.
청해성을 벗어나기 무섭게 불청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젠장!”
당자운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비록 지금은 줄을 잘못 잡은 탓에 추암당으로 쫓겨났지만, 그래도 사천당가의 차기 장로에 내정되던 그다.
당자운의 손에서 암기가 뿌려질 때마다 괴한들을 궁지에 몰랐다.
허나 그들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다.
괴한들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놈! 위풍검(威風劍)이구나!”
“젠장!”
괴한들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독문무공의 사용을 자제했다.
허나 아무리 숨긴다고 한들, 평생 익힌 무공의 흔적을 완벽히 숨기는 건 어렵다.
무의식중에 각 무공의 특성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위풍검은 감숙무림에서 제법 무명(武名)을 날리는 인물이다.
정체를 들켰기 때문인지, 숨기고 있던 독문무공을 드러냈다.
별호처럼 위엄 넘치는 검법을 발휘했다.
돌변한 위풍검의 검격에 당자운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적아(敵我)가 섞인 상황에서 암기를 던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당자운은 제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푸욱~!
검이 피육(皮肉)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하시오, 도우.”
“고, 고맙소. 도장.”
당자운을 위협하던 위풍검은 목숨을 잃었다.
또다른 괴한들을 상대하고 있던 벽하도장이 도와준 덕분이다.
위풍검 하나 벤 걸로 끝이 아니다. 아직 괴한들은 많이 남았다.
그나마 제갈현호가 검강을 뿌리며 압박한 덕분에 수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내공을 많이 잡아먹는 검강을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복마검수들은! 추암당의 도우들을 도와라!”
“제자들이 장로님의 명을 받듭니다!”
검은 도의를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공동파의 자랑인 복마검수(伏魔劍手)였다.
화산에 매화검수와 종남에 천하검수가 있다면 공동파에는 바로 그들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복마검수들의 등장에 괴한들은 당황했다.
“젠장! 모두 각자도생하라고!”
“누가 도망치게 놔둘 줄 아느냐!”
조금만 더 압박하면 추암당의 세 고수를 꼬꾸라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해졌다.
공동의 복파검수들이 합류하기 전에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이를 두고 볼 추암당 고수들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 셋으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괴한들을 모두 붙잡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괴한들을 상대하느냐 지쳐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림없지!”
“컥!”
자광(紫光)이 번쩍이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누군가 목숨을 잃었다.
자색의 기운이라면 화산파의 자하신공을 떠올리기 쉽지만, 공동파에도 그러한 무공이 존재했다.
자전도법(紫電刀法).
공동파에서도 흔치 않은 도법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정도다.
복마검수들을 이끌고 온 공동파의 장로, 자전도군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몇몇을 생포할 수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님.”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우선…….”
제갈현호의 인사에 자전도군은 인사도 미룬 채, 괴한의 복면을 벗겼다.
복면 속 얼굴을 본 자전도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맹룡도객(猛龍刀客) 장 도우였구려.”
“자, 잘못 봤소. 난 맹룡도객이 아니요!”
맹룡도객은 극구 부인했다.
허나 부인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맹룡장(猛龍莊)도 이번 일에 연류되었다 봐도 되겠소?”
“젠장! 그놈들에 때문… 컥!”
맹룡도객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금제가 걸려 있던 것이다.
뒤늦게 손을 썼지만,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다.
“위풍검, 맹룡도객… 어찌 이런 이들이…….”
추암당을 습격한 괴한들 중에는 감숙성에서 활동하는 고수들이 여럿 있었다.
상대가 무림맹에 속했다는 것도 알면서 그들은 지시를 받아들였다.
반대로 말하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기도 하다.
추암당도 추암당이지만, 공동파는 턱 앞에 비수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식겁할 것이다.
“신궁…인가.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고 있단 말인가!”
* * *
“헉! 헉! 헉!”
목도(木刀)가 움직일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검처럼 예기(銳氣)가 서 있지 않으나 목도도 제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 있다.
특히 연약해 보이는 소녀에겐 더욱 위협적이다.
목도가 세차게 허공을 갈랐다.
“패왕이 세상을 여니(霸王開闢)!”
패왕도법이라고 불리는 패왕칠도(霸王七刀)의 패왕개벽이라는 도초였다.
패왕칠도는 패왕가라고 불리는 하후세가의 후계만 전수되었다.
목도를 휘두르는 소녀는 소패왕(小霸王) 하후패가 아니다.
그의 여식 하후지희였다.
그녀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패왕의 위엄이 세상에 진동한다(霸王威振)!”
“헉!”
생존본능이 발휘되었는지 강우희는 청랑보법을 펼쳐 하후지희의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비무는 일방적으로 흘러났다.
청랑보법 이외에 배운 무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공을 익힌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그녀가 최소 수년간 수련한 하후지희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무공을 익힌 기간과 무위가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오래 수련한 자가 더 숙련된 건 당연하다.
특히 무공을 익힌 기간이 짧을수록 그러했다.
하후지희의 도초는 반복되었다.
그녀가 배운 초식이 몇 개 안 되는 탓이다.
‘하, 항복할까…. 아니야!’
강우희는 두려웠다.
간신히 피하고 있지만, 언제 저 무서운 목도가 자신을 후려칠지 모른다.
자꾸 마음이 약해졌지만, 강우희는 항복하지 않았다.
혼돈을 괴물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지만, 강우희에겐 친구였다.
그러니 두려움이 일어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야!”
하후지희는 버럭했다.
패왕가라고 불리는 하후세가의 핏줄이다.
강한 힘이 곧 정의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피하는 게 비겁하게 보이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니 반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강우희가 못마땅했다.
공격은 방어보다 체력소모가 크다.
강우희보다 체력이 좋다지만, 그래봤자 여덟 살짜리 여아다.
하후지희 역시 지친 탓에 신경에 날카로워졌다.
“그럴 거면 괴물이랑 같이 덤벼!”
“괴…물 아니라고!!”
피하기만 했던 강우희가 화가 났는지, 하후지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쓰러트리겠단 일념으로 하후지희는 자신이 익힌 최고의 초식을 펼쳤다.
“패왕… 꺄!”
“헉! 헉! 괴물! 아니라고!”
위력적인 초식을 펼치려면 자연스럽게 동작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작이 커지면 그만큼 빈틈이 생겨나고,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늦어진다.
하후지희는 그것까지 계산하기에 경험도 무공의 이해도 높지 못했다.
그녀의 목도가 닿기도 전에 강우희가 먼저 하후지희와 부딪쳤다.
그 충격에 하후지희는 나가떨어졌다.
“씩! 씩! 무효야! 이게 무슨 비무야!”
“그만!”
다행히 하후지희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지지 않았다며 화를 냈다.
물론 하후지희가 졌다고 하기에 미묘한 상황이었다.
“안 졌어! 난 안 졌다고!”
“하후지희!”
하후지희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부친의 호통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억울한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장이라고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그때 강우희가 말했다.
“사과해!”
“…….”
“혼돈이는 괴물 아니야!”
“…….”
인정할 수 없는 하후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강우희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비겁해.”
“아, 아니야! 난 비겁하지 않아!”
“비겁해! 약속도 안 지키고!”
“괴, 괴물… 아니야~ 엉~엉!!”
서러움이 폭발한 하후지희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를 본 이백과 하후패는 당혹스러웠다.
그때 강우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안 비겁해. 그러니 뚝!”
“엉~ 엉~”
울던 하후지희의 울음이 점점 약해졌다.
그런 그녈 향해 강우희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하후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갤 끄덕였다.
“잘했어. 잘했어.”
“으응…….”
하후지희는 무의식중에 강우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걸 본 강우희가 옷자락 대신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같이 놀까?”
“응!”
두 소녀는 언제 싸웠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걸 지켜본 하후패는 놀랐다.
무뚝뚝한 여식이라 아들 키우는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건 자신의 편견이었다.
외동딸로 아비의 뒤를 잇기 위해 너무 이른 나이에 조숙해졌다.
하지만 사실 하후지희는 여리고 여린 소녀일 뿐이다.
그걸 알아봐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하후패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백이 그에게 제안했다.
“차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이라면 좋겠습니다.”
술을 자제해 왔던 이백이지만, 고갤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 * *
“이게… 본좌가 실수를 한 건가.”
무아지경에 빠진 강우혁을 본 패황의 감상이었다.
벌모세수대법의 과정에서 잘못된 건 없었다.
그러니 그가 말한 실수는 벌모세수대법을 지칭한 게 아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제자로 삼을 걸 그랬어.”
강우혁의 근골은 무공을 익히기에 괜찮은 편이다.
허나 괜찮은 편이지만, 천부적인 무골이라 칭하기엔 부족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둘째치고, 명문세가쯤 되면 그 정도 재능을 가진 자는 수두룩하다.
거대사파인 패왕성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니 패황이 강우혁을 아쉬워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제자로 삼겠다고 제안한 건, 백호왕(白虎王) 이백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오늘 패황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이런 녀석이 당가의 시동이었다니…. 당가가 대단한 거야? 아니면 본좌가 모르는 게 있는 건가?”
벌모세수대법은 성공했다.
평소 이백에게 추궁과혈을 자주 받아서인지, 벌모세수대법을 통해 무골에 가깝게 변했다.
하지만 가장 큰 성과는 바로 기경팔맥 중 둘이 타통했다는 점이다.
사실 강우혁은 무공을 늦게 입문한 편이다.
보통 예닐곱쯤에 입문하고, 명문의 경우는 네다섯에 입문하기도 한다.
근골이 굳고, 기맥이 막히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막기 위함이다.
그걸 생각하면 열 살은 상당히 늦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기경팔맥의 둘이 타통되면서 입문이 늦은 게 해결되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 없고…. 그러고 보니 지희가 여덟 살이었던가?”
패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자로 삼는 것 이외에도 인연을 묶는 또 다른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패황의 손에 빛나기 시작했다.
“손녀사위라면 선물이 좀 부족하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