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패황(覇皇)
퍽! 퍼퍽!
“좋군, 좋아!”
주먹과 주먹이 충돌할 때마다 강한 반탄력이 일었다.
강기는커녕 기조차 담지 않은 권격임에도 충격음이 범상치 않았다.
패황. 검선과 함께 무림십왕의 수좌를 앞다투는 거성다운 힘이었다.
이백은 결국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게 더 적합하다.
패황의 뜨거운 눈빛은 외면하긴 어려웠으니까.
“인사는 이쯤하고, 제대로 놀아볼까!”
“…….”
오랜만에 흥이 오른 패황의 기세가 달라졌다.
상대는 죽이지 않고 제압(不殺)만 하려는 검보다 필살(必殺)의 의지를 담은 검이 더 매서운 법이다.
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하물며 화경고수의 의지가 바뀌었으니, 기세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인사의 의미로 휘두른 권격조차 강력했는데, 제대로 놀아볼 생각인 패황의 권격은 얼마나 강력할까.
“받아보시게!”
패황이 주먹을 가볍게 휘두르자 한 마리의 용이 허공을 강맹하게 갈랐다.
이백은 맞대응하기보다는 되돌려 보낼 작정으로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고 이백을 물어뜯으려던 용은 그의 손길에 움직임을 바꿔 패황에게 되돌아갔다.
복천청룡(覆天靑龍). 푸른 용이 하늘을 뒤엎는다는 뜻으로, 차력미기(借力彌氣)의 일종이다.
패황은 자신에게 되돌아는 용을 뭉개버렸다.
“허… 놀랍군. 광룡권법(狂龍拳法)을 흉내 낸 것이지만, 그리 쉽게 해소할 줄 몰랐군.”
패황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광룡권패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방금 패황이 펼친 건 그의 독문권법이었다.
물론 패황은 광룡권법을 익힌 게 아니다. 그저 그가 아는 광룡권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펼쳐본 것이다.
그럼에도 원래의 광룡권법보다 더 강맹했다.
패황다운 수였다.
“쉽다니요,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가지요.”
“오호! 기대하지.”
이백의 오므린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새하얀 늑대 한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달렸다.
백랑(白狼)은 패황의 목을 콱! 물었다.
퍽!
목을 물기 직전에 패황의 손에 백랑이 소멸되었다.
패황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청랑조법, 청랑왕이 펼쳐도 이리 매서울지 모르겠군.”
“성주께는 전혀 매섭지 못한 거 같습니다만?”
이백의 말에 그는 피식거렸다.
생전의 청랑왕이라도 패황을 위협하기 어렵다.
그의 절학을 폄하는 게 아니다. 그 이상으로 패황이 강한 탓이다.
게다가 청랑왕의 진정한 힘은 늑대의 무리를 이끌 때, 비로소 빛을 보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청랑조법이 절학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이번에는 좀 무거울 걸게.”
패황은 느림의 미학이라는 둔(鈍)의 무리가 담긴 권법을 펼치는지, 그의 권격이 상당히 느렸다.
허나 패황의 경고 때문인지, 이백은 방심하지 않았다.
패황의 주먹을 벗어난 기운을 보며 이번 역시 맞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복천청룡이라면… 큭!’
복천청룡의 차력미기라면 어렵지 않게 되돌려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되돌리기 위해 뻗은 손에 느껴지는 무거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쾅!!
결국 되돌리지 못했다.
외금강신을 이룬 덕분에 손이 다치지는 않았으나 시큰거리는 게, 위력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뼈가 부서졌을지 모른다.
이백은 시큰거림에 손을 털었다.
“…무거운 권법이군.”
“고작 평이 그건가. 본좌가 처음 천중신권(天重神拳)을 접했을 때는 그 무게에 짓눌려 고생했거늘…. 역시 흉내는 흉내에 불과한가 보군.”
패황은 허탈한 듯 말했지만, 그뿐이었다.
허나 그를 대신 주먹을 꽉 쥔 자가 있었다.
천패(天覇) 구황이다.
천중신권은 바로 그의 독문권법이다.
조금 전, 광룡권패의 권법을 흉내 냈듯 이번에는 그의 권법을 흉내 낸 것이다.
말이 흉내지, 천패가 직접 펼친 것과 다름없는 위력이었다.
그걸 가볍게 펼친 패황이나 어렵지 않게 막아낸 이백 모두 천패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꼴이다.
‘개 같은 새끼들이!’
속내를 잘 숨기는 천패이지만,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만약 모두의 시선이 두 절대고수들에게 쏠리지 않았다면, 흠칫 놀랄 정도로 천패의 표정은 무서웠다.
“이제 흉내가 아닌 본좌의 독문무공을 보여줌세.”
광룡권법이나 천중신권 역시 절학이지만, 청해의 전설이라는 패황의 신공만큼은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패황에게서 위협적인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패황의 기운에 의해 불꽃이 튀겼다.
패왕진천공(覇王震天功).
초대 성주가 창안한 패왕신공(覇王神功)을 패황이 뇌(雷)의 깨달음을 담은 신공이다.
패도적인 신공에 뇌의 무리(武理)가 녹아들면서 둘도 없는 절세신공이 탄생했다. 하지만 동시에 익히기 더욱 어려워졌다.
실제로 그의 후계자 역시 패왕진천공 대신 패왕신공을 익힐 정도다.
“진천패왕권(震天覇王拳)을 펼치는 게 얼마 만인가.”
패왕진천공과 마찬가지로, 패황의 손에 재탄생된 권법이다.
파직! 파지직!
패왕진천공의 기운을 머금은 패황의 주먹에 강력한 뇌기가 느껴졌다.
이백은 가볍게 생각하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걸 증명하듯 폭뢰한 기운이 이백에게 꽂혔다.
콰쾅!
주천흑린으로 펼쳐 피할 수 있었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는 소멸하듯 사라지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들었다.
“어떤가? 짜릿하지 않은가?”
“…….”
패황의 말에 이백은 말을 잃었다.
피하지 않았으면 짜릿한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패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진천패왕권을 연신 펼쳤다.
파직~! 쾅! 파지직~! 콰쾅!
반격할 새도 없이 쇄도하는 패황의 권격에 이백은 피하는 것에 역력했다.
“피하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그 순간 아홉의 뇌전이 몰아쳤다.
구중뢰(九重雷).
팔방과 중앙. 아홉 방위에서 몰아치는 권격은 피할 곳이 없게 만든다.
오직 막거나 반격하는 방법밖에 없다.
외금강신만 믿기에 상대가 좋지 못하다.
“초천백호(超天白虎)!”
이백의 손에 족히 3척(90cm)은 될 법한 새하얀 손톱이 돋아났다.
정확히는 손톱이 아닌 조강(爪罡)이었다.
만수군림행이 여러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청랑조법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백이 가장 익숙한 것 역시 조법이다.
초천백호는 그런 영향 때문인지, 만수군림행에게서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이었다.
서걱! 서걱!
초천백호가 허공을 가르자, 허공이 찢기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아홉 방위에서 몰아치는 구중뢰라고 다르지 않았다.
“헉… 헉… 헉…….”
“끄응… 정말 벨 줄 몰랐는데?”
하나하나가 위력적인 구중뢰이지만, 아홉 개로 나뉜 만큼 그 위력이 분산되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벨 수 있었지만, 마냥 쉽게 벤 건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이백은 숨을 거칠 게 쉬었다.
그에 비해 패황은 크게 지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이는 패황과 이백의 격차였다.
“패왕진천하(覇王震天下)라는 초식일세. 나 역시 처음인데, 받아주겠는가.”
진천패왕권을 창안한 패왕조차 펼쳐 본 적이 없는 초식이 바로 패왕진천하다.
그의 전력을 끌어낼 상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패왕진천하는 아직 세상 밖에 나온 적이 없다.
패황은 그러한 초식을 지금 펼치려는 것이다.
꽈직! 꽈지직!!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자 땅이 갈라지고 강한 뇌기가 패황의 주변에 진동했다.
“패왕…진천…….”
“크아아앙!!!”
패왕진천하의 기운을 뒤흔드는 강렬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거대한 백호가 이백의 옆에 서 있었다.
예로부터 백호는 영물로 알려졌다.
허나 전장에 나타난 백호는 영물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맑고 깊은 기운은 흡사 무당의 검선, 그 이상이었다.
이백은 백호의 등을 쓰다듬었다.
“미안, 걱정 끼쳤구나.”
강우혁의 곁을 지고 있던 설군이 나타난 것이다.
설군에게 최우선은 바로 이백의 안위였다.
그런 설군이 움직이게 만들 정도로 패왕진천하의 기운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그때 누군가 달려왔다.
“성주, 노신(老臣)이 도울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설군의 등장에 패왕성에서도 누군가 합세했다.
천패(天覇) 구황.
패황의 스승이자 오패의 수좌인 그였다.
“청랑왕의 곁에 황소만 한 늑대가 있었다지? …천패 물러나시오.”
“허나, 성주. …명을 받듭니다.”
누가 봐도 설군은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다.
패황의 패배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다.
그 만약을 우려해 합세한 것이지만, 패황은 그의 뜻을 거절했다.
청랑왕이 청랑왕일 수 있던 건, 그의 곁에 있던 청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백의 곁에 설군이 있음으로 완성된다 생각했기에 패황은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한 것이다.
천패는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물러났다.
이를 본 사자도패는 도파를 꽉 쥐었다.
천패가 거절당한 이상 사자도패 역시 나설 명분을 잃은 탓이다.
‘주군…….’
쾅! 콰쾅!!
설군이 합세하면서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천하의 패황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좌중은 경악했다.
“지금이라도 성주님을 도와야 하는 거 아니오!”
“진정하게 검패(劍覇), 성주님께서 오랜만에 흥이 나신 거 같구만.”
청해검문의 문주이자 오패의 일인인 청해검패가 흥분할 정도로 믿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그를 진정시키는 건, 천패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용마원주(龍馬院主)인 용마창패였다.
비록 패황이 수세에 몰리긴 했지만, 패배를 떠올릴 정도로 몰린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패황은 웃고 있었다.
결코 궁지에 몰린 자의 표정이 아니다.
패황의 측근인 사자도패가 도파를 꽉 쥘 뿐, 지켜만 보는 이유기도 하다.
서걱! 서걱! 서걱!
설군의 발톱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언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백의 권격이 바람을 갈랐다.
일인일호(一人一虎)의 합공은 쉴 틈 없이 패황을 몰아붙였다.
“훗!”
찰나의 방심에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섬뜩함.
패황은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패왕진천(覇王震天)!”
“헉!”
패왕진천하(覇王震天下)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초식이다.
패왕진천하는 위력만큼이나 기운을 끌어내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창안된 초식이 바로 패왕진천이다.
위력이 다소 약해졌지만, 기운을 끌어내는 시간이 대폭 축소시킬 수 있다.
위력이 약해진 것도 패왕진천하의 기준이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콰쾅!!
간담이 써늘해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설군과 합공했음에도 승기를 못 잡을 줄이야.’
겉보기에는 패황이 수세에 몰렸다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백의 생각은 달랐다.
팽팽한 상황이다.
패황을 쉴 틈 없이 몰아붙인다는 건 이백 역시 멈출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멈추는 순간, 지금처럼 패황의 반격이 시작될 테니.
설군의 합세로 간간이 평수를 이룬다는 건, 패황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는 바였다.
내심 설군과 함께라면 우내오존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패왕진천을 피하기 위해 물러난 게 실수였다.
“패왕…진천하(覇王震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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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