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정사(正邪)
“무례하구려, 벽하도장.”
이백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제갈현호는 불청객의 등장에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허나 벽하도장의 눈은 이미 이백에게 향하고 있었다.
“빚을 졌다. 허나 난 들어야겠다. 그 말코는 어디에 있지.”
“난 할 말이 없소.”
이백도 더 이상 벽하도장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그의 무례를 지금까지 묵과한 건 천문산장의 총관에 대한 예였다.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건, 자신의 배려에 대해 들었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벽하도장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백도 더 이상 존대할 가치는 느낄 수 없었다.
벽하도장 역시 그걸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난 들어야겠다 했다.”
“그분에 대한 예는 여기까지요. 종남의 이름이 내게 위압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오.”
“내가 종남의 이름이나 빌리는 자로 보이더냐!”
“그 외에 그대에게 뭐가 있소? 설마 그 하찮은 실력을 믿는 건 아닐 텐데…….”
이백은 그의 심기를 긁었다.
벽하도장은 발끈했지만, 화를 억눌렀다.
그에게 진 빚도 빚이지만, 겪어봤기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나.”
“그건 내가 결정할 게 아니오. 그분이 할 것이지.”
“…….”
이백을 노려보던 벽하도장은 돌아갔다.
이대로 있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두를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가자 제갈현호가 입을 열었다.
“이 대협께서 태백진인과 연이 있으신지 몰랐구려.”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총관의 도명(道名)이 바로 태백(太伯)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기에 연은 없지만, 제갈현호도 태백진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종남마검이라고 불리기 전, 종남일검(終南一劍)이라고 불렸던 시절에 대해.
그런 태백진인에게 신세를 졌다는 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종남일검이라고 불렸던 건 반갑자 전이다.
종남마검이라고 불리는 만큼 자칫 이백과 종남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존재한다.
제갈현호의 아우이자, 현(現) 가주인 제갈윤호가 그를 의자(義子)로 대하고 있으니 그 불똥이 튈 수 있다.
“태백진인은…….”
“죄송합니다. 아무리 제갈 대협이시라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갈세가만큼 작지 않은 연을 맺은 곳이 천문산장이다.
폐를 끼칠 수 없었다.
단호한 그의 반응에 제갈현호도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알겠소. 아까 하던 말을 마저 듣고 싶소.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오?”
“그건…….”
* * *
“죄송합니다, 법황(法皇)이시여.”
곤륜파의 뇌옥을 시해혈산으로 만든 오만한 좌법왕이 고갤 숙였다.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헌데 그런 좌법왕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다.
“법황께서 친히 내리신 명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니…….”
“되었네, 좌법왕에게 내린 명은 입을 막는 것이었으니까.”
좌법왕은 미간을 꿈틀거렸지만, 화를 참았다.
법황이라고 불리는 혈불이 있는 자리기 때문이다.
허나 좌법왕을 향한 비난은 끝나지 않았다.
“법황께선 너무 자비롭습니다. 저 멍청이를…….”
“우법왕! …죄송합니다. 법황이여.”
좌법왕을 비난하는 노승의 정체는 우법왕.
혈불을 대신해 혈뢰음사를 이끄는 자들이었다.
사적으로는 혈불의 사제들이기도 하다.
혈뢰음사의 마공을 계승한 좌법왕.
혈뢰음사의 사술을 계승한 우법왕.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괴물들이다.
그런 두 법왕조차 고갤 숙이게 만드는 괴물이 바로 혈불이다.
“우법왕, 야차왕의 완성을 맡기마.”
“우법왕이, 법황님의 명을 받듭니다.”
혈불이 자신의 사제들을 불러들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야차왕의 제강을 앞두고 혈법주에 이어 이젠 혈법당마저 사라졌다.
신궁의 군사로서 바쁜 혈불이 야차왕을 마냥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술의 대가인 우법왕을 부른 것이다.
우법왕에게 임무를 부여하자 혈불을 향해 좌법왕이 청원을 했다.
“법황이시여, 결자해지(結者解之)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좌법왕, 그대가 해줄 일은 따로 있다.”
혈불의 말에 근육질의 노승 좌법왕이 허릴 숙였다.
그에게 있어 혈불의 명은 천명과 같았다.
“운남으로 가라. 야수족의 대족장을 굴복시켜라.”
“좌법왕이, 법황의 명을 받듭니다.”
야수족. 비록 오독문에게 밀려 옛 영광은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지만, 그 무게감이 가벼운 건 아니다.
특히 대호족의 수호신은 좌법왕을 움직일 가치가 있다.
“머저리가 나불거린 정보를 폐기시키는 건, 칼을 빌려 쓰면 되지.”
혈법당주를 통해 유출된 신궁의 정보.
무림맹에 전해지는 걸 막아야 한다.
특히 군사전 예하인 혈법당에서 유출된 정보인 만큼 혈불로서는 더욱더 곤란한 상황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굳이 자신의 칼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빌려 사용할 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이야 말로 혈불의 특기였다.
* * *
“날이 어두워질 수 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 게 어떨까 싶소.”
제갈현호의 말에 다들 고갤 끄덕였다.
날이 질 때까지 반 시진이나 한 시진쯤 남은 듯싶지만, 그때까지 움직이면 노숙(露宿)을 해야 한다.
서둘러야 하는 것도 맞지만, 어린아이들이 있는데 무리해서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다들 동의하셨으니, 객잔으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추암당의 당원들은 주변 객잔으로 향했다.
그들 사이에 어린 남매와 짐승들이 있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제갈현호 등만이 아니라 이백 일행도 함께였던 탓이다.
그렇다고 이백 일행도 무림맹으로 향하는 건 아니었다.
곤륜산. 나아가 청해성을 벗어나는 길 동안만 동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청해성을 벗어나는 길인데, 구태여 따로 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 그냥 따로 갈 걸 그랬나?’
제갈현호의 말도 있고, 굳이 추암당을 경원시할 필요 없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헌데 동행하는 동안 벽하도장의 눈빛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쳐다보는 것만으로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뒷골목 왈패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 방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짐을 각자의 방에 올려둔 모두는 식사를 위해 내려왔다.
“내일 사천에 당도하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데, 한잔하는 게 어떻소?”
“…그리하시지요.”
아이들이 있는 만큼 술은 피하고 싶었지만, 제갈현호의 말처럼 내일이면 헤어지게 된다.
추암당 당원들은 사천을 통해 섬서를 지나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에 비해 이백 일행은 귀주로 목적지를 정했다고 제갈현호에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호남의 장가계로 갈 예정이었다.
벽하도장의 일로 천문산장의 총관과 상의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내일 사천성에 당도하면 추암당 당원들과 헤어지게 되니 제갈현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
“괜찮은 술 한 병 아니, 두 병 주게나.”
“예! 대협!”
점소이는 그들의 행세를 보자 매상 좀 올릴 수 있다 생각했는지, 잽싸게 들어갔다.
괜찮은 술. 다시 말해 비싼 술을 팔아먹을 기회인 셈이다.
실제로 제갈현호 등은 주머니가 두둑한 편이라, 객잔에서 파는 비싼 술 정도는 무리 없이 마실 수 있었다.
강씨 남매는 아직도 그들이 불편한지, 식사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럴 것이 당자운은 그들이 속했던 사천당가의 고위급 인물이고, 사부를 향한 벽하도장의 태도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나마 제갈현호가 나았지만, 그 역시 거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걸 모르지 않은 이백은 강씨 남매에게 말했다.
“식사 다했으면 먼저 올라가서 쉬어도 된다.”
“예, 사부님. 저희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다들 눈치가 마냥 없지 않은지, 아이들의 행동에 토를 다는 자는 없었다.
이백은 점소이를 통해 영수들이 먹을 만두 등을 방으로 올려보냈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다들 명문 출신으로 짐승들과 한 자리서 식사하는 게 불편할 것을 알기에 함께 내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올라가자 제갈현호가 넌지시 제안했다.
“이 대협. 그대의 목적도 같다면 차라리 함께 하는 게 어떻소?”
“…그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제갈현호는 이백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들었다.
신궁의 조사.
결국 추암당. 나아가 무림맹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럼 굳이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될 소지가 있다.
추암당은 비각의 정보는 물론 무림맹의 병력까지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한 제안이건만, 이백은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 실망스러웠다.
“이유라도 있는가?”
“무림맹에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목적이 같다고 해도. 그리고 저는 무림맹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무림맹은…….”
“정파무림의 연합체지요. 저는 사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파도 아닙니다.”
이백은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비록 정파와 연을 맺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정파라고 말하긴 어렵다.
정파로 확언하는 순간, 결국 무림의 반쪽 사파와는 척을 지어야 한다.
이백은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애초 청랑왕만 해도 정사지간(正邪之間)이지만, 사파에 가까운 인물 아니던가.
그런 이백의 말에 좌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정파임을 부정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소? 스스로 사파라 말하는 게요?”
“정파가 아니면 다 사파라는 시각이 얼마나 편협한지 아십니까? 저 스스로 사파라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정파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뿐입니다.”
명문 중에 명문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인 그들로서는 이백의 발언이 괴언으로만 들려왔다.
하지만 이백 역시 그들의 좁은 시선이 안타깝기만 했다.
곁에 있던 당자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그 말 아닌가.”
“당 대협. 지금까지 마교대전이 발발했을 때, 정파는 사파와 함께 막아냈습니다. 그건 그들 역시 중원무림의 일원이기 때문이지요.”
마교나 세외무림 등 외세의 침공이 있을 때, 정파무림만이 그로부터 중원을 지켜온 게 아니다.
사파무림 역시 한손 거들었다.
정사(正邪)가 아무리 견원지간이라도 결국 중원인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은 탓이다.
헌데도 선을 긋는 그들의 편협함은 모순으로 보일 뿐이다.
“말장난하지 마라!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역시 정파 위선자 새끼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백을 향해 당자운이 버럭할 때, 이를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 보니 범상치 않은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암당 일행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권패(拳覇), 우리에게 용무가 있는 것이오.”
“용무? 물론 용무가 있지.”
제갈현호는 초로 사내를 향해 권패라 칭했다.
그런 별호를 가진 자는 무림에서 단 한 명뿐이다.
광룡권패(狂龍拳覇).
패왕성의 다섯 기둥. 오패 중 권법의 대가였다.
쾅! 챙그랑~!
광룡권패의 주먹이 식탁을 내려쳤다.
식탁은 그의 주먹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졌고, 음식 역시 와르르 떨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 몰라서 묻느냐! 정파 위선자 놈들아!”
버럭하는 광룡권패를 보며 당자운과 벽하도장은 언제든 출수한 준비를 했다.
모습을 보며 광룡권패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깟 꼬챙이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