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업(業)
푸드득~! 푸드득~!
새가 훨훨 어느 장원 안으로 날아들었다.
평범한 새가 아닌지 다리에 작은 통이 묶여 있었다.
서신을 나르는 전서구(傳書鳩)였다. 정확히는 비둘기가 아니지만.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 있나?”
노인은 새의 다리에 묶인 전서통을 풀어주었다.
훈련을 받은 전서구가 아닌 이상 더는 서신을 전달할 수 없는 새이기 때문이다.
훈련받지 않은 새를 이리 부릴 수 있는 자는 노인이 아는 한, 한 명 뿐이었다.
“벽하, 그 아이를 만났구나.”
노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이백이 신세를 졌던 천문산장의 총관이다.
그리고 과거 종남마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호로 불렸던 종남파 출신의 노고수이기도 하다.
총관은 서신에 적힌 잊었던 한 도명(道名)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합장과 불호를 읊었다.
“무량수불…. 내 업은 반갑자가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구나.”
그가 종남을 떠나야 했던 사건.
그 사건에 벽하도장과 연관이 있었다.
30년 전의 사건은 총관 본인은 물론, 벽하도장 그리고 종남파에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30년이 지난 지금. 종남파는 어느 정도 잊은 듯싶지만, 총관과 벽하도장.
두 사람만큼은 여전히 상처를 입은 채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이젠 그게 누구의 잘못이라 말하기도 모호했다.
이젠 의미가 없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나 때문에 백수 그 아이가 곤란했겠군.”
새를 통해 전달하는 만큼 서신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은 너무 간략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모두 적혀 있었다.
간략하게 적힌 내용이 아니라도 벽하도장의 옛 성격을 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애초 종남마검이라는 별호를 밝혔을 때. 그리고 그러한 별호를 얻은 이율 설명하지 않았을 때.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총관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업을 매듭지을 때가 되었나 보구나.”
총관은 새로운 서신을 꺼내고, 붓을 쥐었다.
30년 전의 결자해지를 하기 위해.
그는 붓을 들었다.
* * *
챙! 채챙!!
검이 매섭게 몰아쳤다.
검초(劍初)만이 아니라 그에 담긴 기운 역시 매섭기 그지없었다.
“말해! 그 늙은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
악귀의 얼굴이 된 벽하도장은 악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향한 곳은 바로 이백이었다.
천하검수답게 벽하도장의 검을 매서웠다. 동시에 천하검수답지 않게 살기가 진동했다.
이백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그의 검을 피했다.
이를 지켜보는 제갈현호, 당자운 그리고 운현진인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벽하도장이다.
묵언도장(默言道長)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런 벽하도장답지 않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의 돌발행동을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타인의 은원은 함부로 관여해선 안 되는 게, 무림의 오래된 불문율이다.
관여한다는 건 타인의 은원을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기도 한 탓이다.
무엇보다 벽하도장의 검이 감탄할 정도로 매섭지만, 이백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니 관여하기도 애매했다.
“당장! 말하라고!!”
벽하도장의 검에 차갑고 기운이 어렸다.
종남의 심법 중 하나인 칠음진기(七陰眞氣)였다.
종남파 유일한 음기를 다루는 심법으로, 여제자를 위한 창안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남제자가 익히지 않았다.
그런 칠음진기가 벽하도장의 검을 통해 발현되었다.
종남의 칠음진기는 흑백쌍괴의 빙혼수(氷魂手)에 비견되는 음한지공이다.
위력만 본다면 빙혼수가 더 뛰어나지만, 날카로움에 있어선 칠음진기는 더 쳐준다.
결코 가볍게 볼 심법이 아닌 셈이다.
‘곤란한데…. 괜한 말을 해서…….’
벽하도장의 검이 상당했지만, 이백을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제압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벽하도장을 억지로 제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리 돌변한 건 자신이 총관을 언급한 탓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백은 반격도 하지 않은 채 피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당장 말하라!”
벽하도장의 검에 담긴 음기가 점점 강해지고 날카로워지더니, 유형화되어 갔다.
놀랍게도 검기성강(劍氣盛罡). 즉, 강기를 이룬 것이다.
그가 초절정지경에 올랐다 생각하지 못했기에 놀라웠다.
하지만 예상대로 벽하도장은 초절정지경에 오른 게 아니었다.
“큭!”
“괜찮으십니까!”
벽하도장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감당할 수 없게 무리할 정도로 칠음진기를 끌어올린 탓이다.
애초 칠음진기는 여제자를 위해 종남파에서 창안된 심법이다.
남제자인 그가 익혔으니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걸 벽하도장이 모를 리가 없음에도 익힌 이유가 있었다.
“동정은 필요 없다. 그 늙은이가… 어디 있는지, 쿨럭…….”
“안 되겠습니다. 내상부터 잡지요.”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는지, 기침과 함께 벽하도장의 입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
이백은 두고 볼 수 없는지 다가갔다.
당연히 벽하도장은 거부했다.
푹! 푸푹! 푹! 푹!
“필요 없…….”
“당장은 필요 없다 하겠지만, 본인은 그게 안 됩니다.”
이백이 손가락을 튕기자 벽하도장의 몇몇 혈이 타혈되며 의식을 잃었다.
탄지점혈(彈指點穴)이라고 불리는 수법으로, 지풍만으로 상대를 혈도(穴道)를 누르는 상승점혈법이다.
지풍을 날릴 수 있는 고수는 많지만, 혈도를 망가트리지 않고 점혈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이백의 내공 수발능력이 육신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의미였다.
그는 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보석함 안에는 몇몇 환단이 들어 있었다.
이백은 주저하지 않고 그 환단을 벽하도장의 입에 넣었다.
“그건…….”
“왜 그러십니까?”
환단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운현진인은 살짝 놀랐다.
그렇기에 주저하지 않고 타인에게 복용시킨 이백의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갈현호의 물음에 운현진인이 합장을 했다.
“무량수불… 태을보령환(太乙保寧丸)입니다.”
“태을보령환이라면 귀파의 영약 아닙니까?”
제갈현호는 깜짝 놀랐다.
이백이 곤륜의 태을보령환을 소지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런 영약을 초면인 벽하도장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영약이라 칭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본파의 은공이신 이 대협께 드린 환단입니다.”
“그렇군요.”
제갈현호는 제갈세가의 핏줄답게 암류의 무리가 제압된 일에 이백이 연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정확히는 혼돈 때문이었지만, 그의 생각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이백의 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푹! 푸푹! 푸푹!
추궁과혈을 통해 태을보령환의 약효가 빠르게 퍼지게 하고 있었다.
시전자의 내공 소모가 큰 추궁과혈까지 시행하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초면인 거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 * *
“으…윽!”
의식을 잃고 죽은 듯 누워있던 벽하도장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그의 의식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여긴…….”
벽하도장의 눈에 들어온 건 낯선 천장과 방이었다.
곤륜파의 객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운기행공을 했다.
잠시 후, 눈을 뜬 벽하도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곤륜에서 치료해준 건가. 신세를 크게 지었군.”
내상이 치료된 것은 물론 미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상약을 복용한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효과가 있는 내상약은 흔치 않다.
곤륜의 태을보령환을 복용했다는 걸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무리 자신이 종남의 제자라도, 귀한 환단을 내어준 건 이해하기 어렵다.
곤륜을 위해 싸우다가 입은 내상이 아니고, 태을보령환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몸을 일으킨 벽하도장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깨어나셨소, 도장.”
“…실례했소.”
벽하도장에게 말을 건 자는 사천당가의 당자운이었다.
평소 말이 없는 벽하도장이지만, 자신 때문에 지체된 걸 알기에 마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당자운이 툭 말을 던졌다.
“그놈. 이벽이라는 놈과 무슨 관계요?”
“당 도우가 알 필요 없소.”
“물론 본인이 알 필요는 없소. 그저 궁금했소. 무슨 관계이기에 태을보령환씩이나 내어준 건지…….”
“그게… 무슨 말이오.”
벽하도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에게 태을보령환을 복용시킨 게 곤륜파가 아니었단 말인가.
당자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요. 도장에게 태을보령환을 복용시키고 추궁과혈까지 하더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관계이기에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물은 것이오.”
“…….”
당황한 것인지,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벽하도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당자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오. 하… 알다가도 모를 놈일세.”
“…….”
당자운은 이백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의 미래를 박살 낸 시발점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백의 무위와 행동은 흥미를 끌었다.
그런 자가 당령의 의숙이라면.
당자명과의 틀어진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보다 새로운 줄을 잡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그 때문에 벽하도장과의 관계가 궁금했을 뿐이다.
입을 꾹 다물던 벽하도장이 입을 열었다.
“그자는… 어디에 있소. 지금.”
* * *
“이곳에서 제자를 키우고 있을 줄 몰랐소.”
제갈현호의 물음에 이백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애정이 묻어났다.
그것만으로도 제자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가에서 맺은 인연입니다. 좋은 아이들이지요.”
“그렇구려.”
제갈현호의 눈에는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소년 쪽은 근골이 괜찮지만, 제갈세가에선 흔한 수준이었다.
애초 현 무림에선 외공보다 내공을 높게 쳐주기에 생기는 오류다.
게다가 소녀 쪽의 근골은 너무 평범했다.
그렇기에 좋은 아이들이라는 의미가 무공과 연관이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혜원이와 동행했다 들은 거 같은데…….”
“혜원이는… 세가로 돌아갔습니다.”
그녈 언급하는 이백의 말이 잠시나마 멈칫하는 걸 놓치지 않은 제갈현호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깝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질녀의 일이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 아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두 사람 모두 적지 않은 아니, 혼기가 늦은 것 같소만.”
“…제자들을 키우는 것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제갈현호는 제자보다는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두 사람 사이를 멀게 만든 것 같았다.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된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실례랄 게 있겠습니다. 할아…….”
이백의 말이 이어지는데, 이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소.”
이백의 허락이 있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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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