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혼돈(渾沌) (2)
―흐흐흐… 잘 먹으마!
흉수 혼돈(渾沌)은 강씨 남매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쩌억 벌렸다.
그 뒤를 설군이 쫓고 있지만, 그전에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더~엉~!!
범종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제마범종의 종소리였다.
범종(梵鐘)이라지만, 아무나 두들긴다고 소리가 나는 게 아니다.
합당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제마범봉을 울리게 만든 건 강우혁이 아니었다.
제마범종은 강우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오라비의 손에 있던 걸 낚아서 그녀가 친 것이다. 백수조련술(百獸調練術)의 기운을 담아서.
강우희는 멈칫한 혼돈을 향해 외쳤다.
“태, 태상노군(太上老君)…….”
―서, 설마…….
입을 쩌억 벌리고 있던 혼돈의 눈이 커졌다.
제마범종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강우희의 팔에 채워진 은고아를 발견하고 말았다.
제마법종(制魔梵鐘)과 은고아(銀箍兒).
두 법기가 공명하고 있었다.
아직 미숙한 강우희가 백수조련술의 기운을 담아 제마법종을 두들길 수 있던 이유였다.
혼돈을 기겁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바로 은고아 때문이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저주스러운 은고아가 왜! 여기에!!
혼돈은 공명하며 자신을 억누르는 두 법기의 힘에 저항하며 강우희를 씹어먹으려 했다.
단순히 허기가 지기 때문이 아니다.
소녀가 주문(呪文)을 완성하지 못하기 위함이다.
혼돈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푹!
날카로운 무언가가 피육을 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돈!!
“캬아악!!”
우려와 달리 피육이 뚫린 건 강우희가 아니었다.
급히 날아온 설군이 혼돈의 등에 발톱으로 찌른 것이다.
그 고통에 혼돈은 비명을 질렀고, 더 이상 두 법기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강우희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칙(奉敕). 혼돈(渾沌).”
―망할!!
강우희의 주문(呪文)이 완성되자, 은광(銀光)과 함께 혼돈의 목에 띠가 채워졌다.
띠는 강우희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 은고아와 매우 흡사했다.
완벽하게 채워진 순간, 강우희의 손목에 채워진 은고아와 혼돈의 목띠가 공명하듯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엔~장!!
혼돈이 욕설을 뱉는 순간, 전신에서 어두운 연기가 흘러나왔다.
어두운 연기가 흘러나올수록 혼돈이 급격하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진 혼돈은 작은 강아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갈 곳을 잃은 어두운 연기는 갑자기 강우희를 향해 날아갔다.
“아, 안 돼!”
이를 본 강우혁은 어두운 연기를 막기 위해 양팔을 펼쳤다. 하지만 어두운 연기는 그를 지나쳐 강우희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나 손을 쓸 겨를도 없었다.
어두운 연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순간, 강우희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강우혁은 쓰러지는 누이를 급히 부축했다.
“우, 우희야! 우희야!!”
―괜찮다. 그 아이는. 잠시 큰 힘을 얻어 적응하기 위해 의식을 잃은 것뿐이니까.
당황하던 강우혁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설군이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 무사한 게 맞나요? 우리 우희, 깨어날 수 있는 거죠!”
―물론이다. 해로운 거였다면 내가 막았겠지.
설군의 말에 강우혁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사부가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소중한 존재는 여전히 누이였다.
강우희가 잘못되었다면 자신은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살 생각이 없다.
헌데 목숨에 지장이 없다니. 오히려 큰 힘을 얻었다니.
오라비로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기뻐하는 강우혁을 보니, 귀엽다 생각한 백호가 장난을 쳤다.
―마냥 기뻐해선 안 될 텐데?
“왜, 왜요! 나, 나쁜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설군의 말에 강우혁은 심장이 철렁했다.
사색이 된 그를 보며 백호는 웃었다.
―네 동생은 빠르게 강해질 거야. 비록 흉수(凶獸)이지만, 나 설군을 상대로 버텨낸 놈이다. 그런 혼돈의 영력을 흡수한 거라고. …뭐, 내가 아직 전성기의 신력을 회복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동생의 보호를 받고 싶지 않으려면 빨리 강해져야 할 게야.
“…….”
설군의 말에 강우혁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거 같았다.
평생 자신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누이다.
헌데 반대로 자신이 강우희의 보호를 받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내가 우희에게 보호를 받는다고?’
정신이 멍해졌다.
자존심이 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박탈감이 들었다.
누이를 지켜야 하는 오라비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느낌이 든 탓이다.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고갤 돌려 보니, 마침 사부가 마지막 적을 쓰러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고수답게 단숨에 날아왔다.
그런 이백을 강아지가 된 혼돈이 가로막았다.
“왈! 왈! 컥!”
―까불지 마.
이백을 향해 짖는 혼돈을 본 설군은 한숨을 내쉬더니, 뒤통수를 후려쳤다.
흡사 설군이 작은 동물을 괴롭히는 모습이었기에 이백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를 향해 설군이 말했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어.
“재밌게? 그게 무슨 말이야.”
난데없이 자신을 보며 짖는 강아지도 신경 쓰였지만, 쓰러진 제자가 더 걱정스러웠다.
헌데 재미있게 되다니.
강우혁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사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쟤가… 바로 마물이라던, 혼돈(渾沌)이에요.”
“뭐, 뭐라고!”
이백은 경악했다.
상대가 아무리 사흉수의 혼돈이라도 설군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그건 제압이나 소멸시키는 것이니, 이런 작은 강아지로 만드는 건 아니었다.
이백이 아닌 그 누구라고 경악할 만하다.
그때 강우혁이 이를 악물었다.
“사부님… 강해지고 싶어요. 우희에게 보호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 * *
“무량수불… 이 은혜를 어찌 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쇠한 노인이 이백의 두 손을 붙잡으며 고마워했다.
그는 곤륜파 장문인 운룡진인이었다.
노쇠한 모습을 보이는 건 그만이 아니다.
운현진인을 제외한 곤륜사선은 더 이상 무인이 아니다.
삼원봉마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상당히 소모한 탓이다.
오히려 진의 복구가 중단된 덕분에 선천진기가 완전히 고갈되는 건을 면할 수 있었다.
허나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노쇠해진 그들의 건강 상태는 평범한 촌노(村老)만도 못했다.
단순히 지친 게 아니라 여명이 얼마 나지 않았다.
짧으면 몇 주나 몇 달. 관리를 잘해준다고 해도 몇 해를 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대를 위해 준비할 시간이 있다.
그게 이백의 덕은 아니지만, 재앙을 몰아준 덕분에 후학들에게 뒤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아닙니다. 진인. 귀파가 감당해야 했던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량수불…….”
이백은 공을 내세우기보다 곤륜파의 고충을 언급했다.
그의 말을 들은 곤륜파 제자들은 모두 합장하며 도호(道號)를 읊었다.
혼돈으로 인해 곤륜파가 겪은 희생은 말로 이룰 수 없다.
곤륜삼성만이 아니다. 전대 장문인을 포함한 고수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지난 이십여 년간, 곤륜파의 곤욕을. 곤륜과 아무런 연이 없는 이백이 알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감정이 복받쳐 올라온 것이다.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며칠 더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제자들이 지쳐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원하실 때까지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붉은 기가 도는 함을 내밀었다.
이백이 운현진인에게 주었던 자금홍호로였다.
“자금홍호로군요.”
“맞습니다. 마물이 사라졌으니, 돌려드리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법기(法器)이자 그 가치가 높다고 하지만, 지금의 곤륜파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돌려준다는데 사양할 이백이 아니었다.
돌려받은 자금홍호로가 이전보다 무거웠다.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런데…….”
“태을보령환(太乙保寧丸)를 조금 담았습니다. 드릴 게 그 정도라… 민망합니다.”
운룡진인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안다는 것처럼 설명해주었다.
그는 ‘그 정도’라고 표현했지만, 태을보령환은 평범한 환약이 아니다.
비록 내공증진의 효과는 미비해 영약이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애초 태을보령환은 그러한 목적으로 제조된 게 아니다.
내상을 진정시키는 걸 목적인 내상약이다.
“감사합니다. 귀한 물건을 받았습니다. 귀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진인.”
“무량수불…….”
빈말이 아니었다.
태을보령환은 내상 치료 효과만 있는 게 아니다. 활력을 북돋우며 정(精)을 보호하는 효과 역시 뛰어나다.
그러한 이유로 부호들에겐 무림의 영약보다 곤륜의 태을보령환을 더 가치 높게 평가했다.
사천당가에서 받은 금창약이나 내상약이 있지만, 분명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말에 운룡진인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합장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와 대화를 마친 이백은 곤륜파에서 내어둔 별관으로 돌아갔다.
“우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느냐.”
* * *
쾅!
“젠장!!”
혈불은 분(忿)을 참지 못하고 쏟아내 버렸다.
궁(宮)의 중추인 군사전(軍師殿)의 수장으로서, 최악의 실책을 하고 말았다.
“놈이 왜! 그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촛대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 혈타의 죽음을 감지했다.
비록 그의 혼과 연결된 촛대이나 혈타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오른팔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육신에 봉인한 ‘혈룡의 저주’의 힘을 사용한다면 일시적이나마 화경고수도 상대할 수 있다. 그런 혈타를 곤륜파 따위가 어찌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의 죽음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천자(逆天子), 그놈을 진즉에 죽였어야 했어!”
언제부터인지 치밀하게 짜여진 계책들이 한둘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대계에 영향도 줄 수 없는 미비한 작은 계책들이었다.
허나 그걸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게 크나큰 실수였다.
혈불의 왼팔이라는 혈법주가 죽고 말았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순찰령의 총순찰마저 죽고 말았다.
아무리 정적이라지만, 궁의 대계에 큰 역할을 맡은 총순찰이다.
그의 죽음으로 대계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작 추어(鰌魚)라 생각했던 역천자 하나로 벌어진 일이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는 법(狡免三窟).
혈불은 역천자를 제거하기 위해 세 개의 굴을 준비했다.
첫 번째 굴은 야차왕이고, 두 번째 굴은 흉수 혼돈이다.
헌데 첫 번째 굴은 완성되지 않았고, 두 번째 굴은 파괴되었다.
“야차왕을 서둘러 완성시켜야 해. 그 전에…….”
혈타가 죽은 이상 동행한 혈법당이 무사할 리 없다.
실제로 혈법당의 임무 실패와 혈타의 죽음이 보고되었다.
혈법주의 죽음으로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지만, 혈법당은 군사전이 부리는 가장 편리한 말이다. 죽이는 것밖에 못 하는 광풍사(狂風沙)나 살인풍(殺人風)은 혈불의 취향이 아니었다.
두 번째 굴이 무너졌지만, 애초 그건 첫 번째 굴의 실패를 대비한 것에 불과하다.
야차왕의 제강만 성공한다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원치 않지만, 세 번째 굴을 열어야 할 때가 왔다.
혈불의 눈동자에 혈광이 번쩍였다.
“사제들을 불러와야겠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