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혼돈(渾沌) (1)
―모두 씹어먹어 주마!
“크아아앙!!”
사라진 핏빛의 삼원봉마진 너머에서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어둡지만 약간이나 푸른 기가 도는 황소보다 큰 늑대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얼핏 보면 들개(野犬) 같았고, 흉측한 뿔과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짐승이 아니다.
―혼돈(渾沌)? 소멸한 게 아니었나?
―네, 네놈은 백호! 네놈이야말로 신격을 잃었던 게 아니었나!
마물의 정체는 사흉수의 하나인 혼돈이었다.
사흉수는 오래전에 소멸되거나 봉인되어, 오랜 시간 인간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사흉수의 혼돈이 아직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사흉수는 하나 같이 영수의 힘을 넘어섰으나 흉업(凶業)을 쌓은 탓에 신격을 얻지 못한 마물이다.
고대의 마물답게 혼돈은 설군을 알아봤다.
단순히 하얀 호랑이가 아닌 신수 백호를 말이다.
―아직 소멸하지 못했다면 내가 소멸시켜주지.
―닥쳐! 널 집어삼켜서 신수가 되어주마!!
혼돈이 설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얼마나 빠른지 어두운 빛이 번쩍이는 걸로 보였다.
허나 백호도 만만치 않았다.
쾅! 콰쾅! 콰쾅!
어두운 빛과 새하얀 빛이 허공에서 충돌하고 또 충돌했다.
그로 인해 하늘이 분노하듯 요동치며 굉음(轟音)을 일으켰다.
두 짐승은 막상막하의 힘을 보여주었다.
설군이 비록 신격을 회복했다지만, 과거 서방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시절의 힘까지 회복한 건 아니었다.
혼돈 역시 오랜 시간 삼원봉마진에 갇힌 탓에 몹시 배고프고 지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쾅! 콰쾅!!
허공에서 수십 번 충돌했지만, 어느 존재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젠장! 풀려나자마자 저 저주스러운 백호를 만나다니! 힘만 회복했… 흐흐…….’
혼돈은 삼원봉마진에 갇히기 전부터 몹시 배고팠다.
그렇기에 법력을 흡수하기 위해 군륜파의 도룡검을 노렸다.
만약 배고프지 않았다면 곤륜삼성이 삼원봉마진을 완성하기 전에 죽였을 것이다.
그런 혼돈의 눈에 제마범종이 보였다.
흉수(凶獸)인 혼돈에게 매우 위험한 법기다.
하지만 그건 제마범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의 손에 있을 때이지, 지금은 자신의 기운을 회복시켜줄 먹잇감에 불과하다.
게다가 제마범종을 쥐고 있는 건 어린아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먹음직스러웠다.
어린아이는 삶에 찌른 성인보다 자신에게 훨씬 도움이 된다.
곁에 두 영수가 보이지만, 격의 차이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무용하다.
다행히 설군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했다.
―빌어먹을 백호 놈아! 죽어라!
“크아아앙!!”
혼돈은 포효하며 더욱 흉폭하게 달려들었다.
설군 역시 더 강맹하게 맞섰다.
쾅! 콰쾅! 콰쾅!!
몇 번이나 충돌하던 혼돈이 반발력에 튕겨 나갔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흐흐흐… 잘 먹으마!
―아, 안 돼!!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게 아니다.
혼돈이 설군의 힘을 이용해 튕겨 나갔다.
강씨 남매가 있는 방향으로, 일부러 말이다.
뒤늦게 깨달은 설군이 뒤쫓았다.
호각지세였던 만큼 벌어진 거리의 격차를 단숨에 줄이는 건 불가능했다.
혼돈은 지체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쩌억 벌렸다.
어린 강씨 남매는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거 같았다.
실제로 그럴 작정이었다.
강우혁은 발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누이를 자신의 등뒤로 보냈다.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더~엉~!!
범종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강씨 남매를 단숨에 씹어 먹으려던 혼돈이 멈칫했다.
“태, 태상노군(太上老君)…….”
* * *
“죽어!!”
말을 탄 십기(十騎)의 인마가 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군부의 기마대는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흡사 마적떼처럼 보였다.
허나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능숙한 기마술. 무엇보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소용없다.”
퍽! 퍼퍽! 퍽!
이백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말 위의 마적들이 나가 떨어졌다.
십기가 무력화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광풍칠조! 팔조 달려라! 삼조와 사조는 그 뒤를 노려!”
“으라! 으라!”
그들은 대막의 공포라는 광풍사(狂風沙)였다.
대막(大漠)은 신강에서 서장에 넘어가는 사이에 존재한 고비 사막 일대를 지칭한다.
중원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기마술, 자비가 없는 손속.
대막에서만큼 무림고수라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고 알려졌다.
이는 단순히 와전된 말이 아니다.
중원과 서장을 오가는 거대상단은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림고수들을 고용했다.
그들조차 대막에선 광풍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제물이 된 자들 중에는 절정고수도 여럿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장과의 교역을 원하는 거대상단은 막대한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윤이 남기에 서장과의 교역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어차피 저것들은 시간 끌기용에 불과하지.”
우득! 우드득!
혈타의 굽었던 등이 펴졌다.
놀랍게도 그는 원래부터 꼽추가 아니었다.
혈타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문자와 문양이 생겨나더니, 막대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건 초절정지경 수준이 아니었다.
형태는 다르나 분명 이백은 흡사한 걸 본 적이 있었다.
퍽! 퍼퍽!
또 수십의 마적을 불능으로 만든 이백은 고갤 돌려 혈타를 바라보았다.
“본 적이 있는 힘이군. 혈법주라고 자가 펼쳤던 거 같은데…….”
“그랬겠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술(術)이라 한다.”
소주에서 혈법주가 이백을 상대하기 위해 펼쳤던 혈법술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당시에는 혼세마전(混世魔殿)의 술(術)을 원동력으로 삼았다면, 지금은 그와 다른 걸 원동력으로 삼은 듯싶었다.
이백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혈룡의 저주’가 발동되었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술(術)’이 발동되었습니다.]
“혈룡(血龍)의 저주?”
“혈룡의 저주를 알아? 주인님께서 하사하신 힘이지. 그럼 그 위력을 알겠지.”
이백은 혈룡의 저주가 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혜안을 통해 알았을 뿐이다.
허나 이백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코 시전자에게 이로운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모른다. 하지만 그대에게 마냥 좋은 힘은 아닌 거 같은데…….”
“상관없다. 주인님의 영광과 본궁의 영세를 위해서라면!”
혈타의 몸에 봉인시켜두었던 사악한 힘이다.
이를 위해 그는 꼽추가 되어야 했다.
봉인을 푼 지금, 그는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 시간이 짧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살생부(殺生簿).
첫 장에 기입된 역천자를 죽여 주인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혈광(血光)이 번쩍이는 순간, 혈타의 손이 이백을 베었다.
혈룡조(血龍爪).
혈타가 익힌 혈룡마공에 속한 조법이며, 적을 찢어 죽이는 손맛 때문에 가장 즐겨 사용하는 절기였다.
퍽!
“조법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어서 말이야.”
“아직이다!”
금나수와 권법 등을 익혔지만, 이백의 시작은 바로 조법이다.
혈룡조가 위력적이라도 이백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후욱!
허공을 가르는 혈타의 손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특히 핏빛의 조강(爪罡)은 그야말로 용의 발톱 같았다.
단숨에 이백의 숨을 끊어 놓겠다는 혈타의 의지가 엿보였다.
“나도 일가견이 있다 말했을 텐데… 조법!”
혈타가 핏빛의 발톱을 드러냈다면, 이백은 새하얀 발톱을 세웠다.
청랑조(靑狼爪), 고랑(孤狼), 고호(孤虎)를 지나 완성된 조법. 그건 바로 초천백호(超天白虎)이었다.
강력함은 평천은우(平天銀牛)가 가장 뛰어날지 모르지만, 매서운 절단력은 단언 초천백호다.
평천은우조차 벨 수 있는 게 바로 초천백호일 테니까.
허공에서 핏빛의 발톱과 새하얀 발톱이 충돌했다.
서걱!
“크윽! 아아악!!”
“제법인데?”
비명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혈타는 사라진 오른 손가락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룡의 저주의 봉인을 풀어 괴력난신의 술을 펼친 자신은 화경고수나 다름이 없다.
총순찰 십절흑제를 죽인 역천자를 상대하기 위해 자신 역시 목숨은 건 것이다.
그런 자신의 손가락이 베였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나 이백이라고 간단히 벤 게 아니다.
외금강신(外金剛身)을 이루지 못했다면 베인 건 자신의 손가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얼한 손을 털고 있는 이백을 보자 혈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았다.
“죽어! 죽으라고!!”
그는 이백을 향해 왼손을 휘둘렀다.
혈타의 왼손에는 조금 전보다 더 굵고 날카로운 조강이 번들거렸다.
그가 모든 걸 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백도 물러나지 않았다.
번쩍!
화경. 그리고 화경과 다름없는 괴물들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따를 수 없다.
빛이 번쩍인 직후,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
피육(皮肉) 그리고 뼈(骨)마저 베인 소리였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혈타의 왼팔이 사라졌다.
그의 팔이 있던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백은 피했다.
자신이 이룬 외금강신을 부정하지 않으나 굳이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혈룡의 저주의 봉인을 풀고, 괴력난신의 술을 발동시킨 혈타의 힘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혈타는 강하다. 비록 목숨을 내놓고 일시적으로 얻은 힘이지만, 지금까지 가장 힘겨웠던 상대. 십절흑제보다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웠다.
이전이었다면 지금과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
“그럼 이제 알려주실까. 궁(宮)이라는 곳… 이런!”
“아, 안 돼! 안 돼! 주인님이 주신 힘이!!”
혈타의 기운이 급격하게 소멸되어 갔다.
봉인이 풀린 혈룡의 저주가 지속될 시간은 남았으나 그 힘을 지탱해야 할 혈타의 육신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백이 마지막 순간, 맞서기 대신 주천흑린(走天黑麟)을 펼쳐 피하며 팔만 노린 건.
혈타의 입을 통해 암류의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헌데 그게 혈타의 남은 시간을 앞당겼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결국 혈타는 모든 걸 잃고 숨이 끊겼다.
“젠장, 아직 물어본 입이 남아 있지만…….”
이백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혈법당주와 그의 수하들을 보았다.
어차피 지위가 낮은 이들의 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나마 혈법당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군이는 쓰러… 엇!”
의식을 잃은 채 오라비의 품에 안겨 있는 강우희가 눈이 들었다.
당황한 이백은 단숨에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게 있었다.
거무칙칙한 강아지였다.
“왈! 왈! 컥!”
―까불지 마.
작은 강아지를 뒷통수를 후려친 건, 황소보다 큰 백호. 설군이었다.
이백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설군이 웃었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어.
“재밌게? 그게 무슨 말이야.”
제자가 기절한 상황인데, 재밌게 되었다니.
이백으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향해 강우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 쟤가… 바로 마물이라던, 혼돈(渾沌)이에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