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마물(魔物) (1)
“무량수불… 도우(道友), 그걸 양보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운현진인의 얼굴에 다급함이 역력했다.
예상대로 그 역시 은고아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백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이백의 단호한 거절에 운현진인은 당황했다.
명색이 곤륜파의 장로다.
그런 자신의 청을 고민하는 척도 없이 이리도 쉽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
애초 이백은 상대가 곤륜파의 장로라고 해서 부담을 느낄 인물이 아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무엇을 내놓는다면 그걸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이백은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자 운현진인은 안도했다.
하지만 이백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도룡검이라면 양보하지요.”
“도우! 지금 빈도를 우롱하시는 게요!”
도룡검(屠龍劍)은 현재 마물을 봉인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사용되고 있다.
그걸 떠나 도룡검은 곤륜지보다.
법기이자 보검임을 떠나 곤륜파의 자존심이다.
아무리 은고아가 필요하다지만, 그런 곤륜지보를 요구하다니.
거절을 위함이라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불쾌하시지요. 그럼 저는 어떻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문의 보물을 요구하시니, 저는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귀…문의 보물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이백의 말에 운현진인은 당혹스러웠다.
그런 감정도 잠시. 그는 이백이 거짓말을 한다 생각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은고아는 본문의 보물입니다.”
“도우, 빈도를 우롱하려 하지 마시오. 은고아가 청랑왕의 소유였다는 걸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운현진인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허나 이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알고 있었으니, 충분히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고 있었다.
“청랑왕께서 본문, 만수문(萬獸門)의 어른입니다.”
“만수문?”
들어 본 적이 없는 문파였다.
애초 청랑왕의 사문이 만수문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운현진인은 여전히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다만 이백의 곁에 거대한 호랑이가 있기에 마냥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들어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본문은 한 세대에 제자를 한두 명밖에 받지 않아 무림에 알려진 경우는 청랑왕 사숙조께서 처음이니까요.”
“무량수불… 빈도로서는 믿기 어렵소.”
깊은 산골에만 살던 운현진인이지만, 마냥 우둔하지는 않다는 듯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황할 이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진인께서 믿기 어려운 게 본인과 무슨 상관이 있소. 설마 본인이 거짓을 말한다고 한들, 그게 진인과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은고아는 이미 내 손에 있거늘.”
“그건…….”
이백의 말투가 바뀌었다.
상대의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으니, 자신 역시 더 이상 존중해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의 말이 틀린 게 없으니, 운현진인은 난감해졌다.
‘무량수불… 빈도가 나락에 떨어진다고 해도 곤륜만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수십 년간, 정명하게 살아왔다 자부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걸 깨려 한다.
사문의 명운(命運)이 눈앞의 은고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미안합니다.”
운현진인은 사과와 함께 이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아(高雅)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곤륜파의 비전절기로, 금나수의 일종인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였다.
양심이 있는지, 살초가 아닌 제압만 하려는 듯하다.
허나 그런 그를 보는 이백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선을 넘었소, 진인.”
차가운 목소리가 운현진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는 움찔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사문의 명운을 위해 평생 지켜온 신념을 버렸다.
그런 만큼 기필코 은고아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운현진인의 손이 이백에게 닿는 순간.
“미안하… 큭!”
“내 말하지 않았소. 선을 넘었다고…….”
운현진인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제압된 건 이백이 아닌 바로 그였다.
제천금원(齊天金猿).
만수군림행의 하나로 종학금룡수를 능가하는 금나수다.
게다가 화경에 오른 이백을 제압하는 건, 애초 운현진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운현진인은 고통에 바들바들 떨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목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허나 이백도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지 놔주었다.
“커억… 헉… 헉…….”
“곤륜도 다 되었군.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말이야.”
옥죄였던 고통이 사라지자 급히 숨을 몰아쉬었던 운현진인의 귀에 이백의 비난이 꽂혔다.
그 순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곤륜의 영명(英名)에 먹칠한 것이니까.
운현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이백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빈도를 욕해도 좋습니다. 아니, 욕먹을 만합니다. 부디… 귀문의 보물을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무엇이 진인을 이리 만들었습니까.”
대(大) 곤륜의 진인이 무릎을 꿇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백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직 감정이 풀린 건 아니다.
만약 자신이 약했다면 은고아를 강제로 탈취당했을 것이고, 운현진인이 이리 절실하게 사과하지 않을 테니까.
“이십여 년 전입니다. 본문에 재앙이 들이닥친 것은…….”
운현진인은 이십여 년 전의 일을 시작으로, 현재 곤륜파의 사정까지 밝히며 은고아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정명한 진인이 오래 지켜온 정심을 깬 게 이해 못 할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곤륜파와 운현진인의 사정이었다.
그게 타인의 것을 강압적으로 탈취하려는 행위에 면죄부가 되어주는 건 아니다.
“곤륜이 필요한 건 은고아가 아니라 그 마물의 봉인에 매개체가 되어줄 법기로군요.”
“무량수불… 정확히는 그렇습니다. 도우. 면목이 없으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문의 치부를 드러낸 격이오나 운현진인은 왠지 개운해졌다.
동시에 이백이 선처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냉정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허나, 은고아를 드릴 순 없습니다.”
“그, 그런…….”
일망의 희망을 가졌던 운현진인은 마음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아직 이백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 이걸 드리지요.”
“…빈도가 필요한 건…….”
얼굴에 그늘진 운현진인의 말을 이백이 끊었다.
그리곤 무언가를 내밀었다.
“알고 있습니다. 법기지요. 그렇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서, 설마! 이 함이 버, 법기란 말씀이십니까!”
운현진인은 붉은 작은 함과 이백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이백이 미소를 지었다.
“자금홍호로(紫金紅葫爐)라 합니다. 비록 호리병은 아니지만요.”
“자, 자금홍호로라면… 서유기의 그 자금홍호로입니까!”
이백은 고갤 끄덕이며 자금홍호로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뚜껑 안쪽에 적힌 범어를 가리켰다.
“범어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자금홍호로라고 적혀 있더군요.”
“오! 원시천존이시여!”
운현진인인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금홍호로를 붙잡았다.
그가 쥔 자금홍호로에 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간 운현진인의 얼마나 마음고생했는 지 느껴졌다.
이백은 자금홍호로를 양보했지만,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헌데, 그 마물 말입니다.”
* * *
“서고의 비급은 전부 옮겨놨습니다!”
“이대제자(二代弟子)들은 하산 준비를 끝났습니다!”
곤륜파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흡사 이사를 가는 것처럼 곤륜 내의 많은 게 빠져나가고 사라졌다.
그러한 과정이 매우 매끄러웠다.
곤륜파는 청해성의 끝자락에 위치했다.
신강의 마교가 중원에 침입할 때도, 세외의 세력이 중원에 입성하려 할 때도 가장 먼저 막아서는 관문과 같다.
그러한 이유로 곤륜파는 본산이 몇 번이나 무너지고 불타버렸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일어난 게 바로 곤륜파다.
이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당연하다 볼 수 있다.
헌데 곤륜파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마교도 세외무림 때문도 아니었다.
“일대제자들 역시 하산하라.”
“사부님!”
“저희도 남겠습니다! 장문 사백님!”
곤륜의 장문 운룡진인은 제자와 사질들을 향해 하산을 명했다.
일대제자들은 반발했다.
장문인과 장로들만 두고 도망치라니.
몇몇을 제외하곤 불혹도 되지 않은 젊은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들의 용기와 의기에 박수를 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허세와 만용일 뿐이었다.
“하산하라는 장문의 명을 거역하겠단 말이더냐!!”
“그건, 아니오라…….”
운룡진인의 일갈에 일대제자들은 움찔했다.
명문의 제자로서 상하관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그냥 윗사람도 아닌 대(大) 곤륜파 장문인의 지엄한 명이었다.
이를 거역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일대제자들은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운룡진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빈도들은 막아낼 것이니라. 이겨낼 것이니라. 허나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 우리가 잘못되었을 때, 본문을… 이대제자들을 이끄는 건 바로 너희의 몫이다.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러는 게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오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심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대로 떠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헌데 어찌 나만 가겠다고 도망치겠는가.
운룡진인은 후회하고 말았다.
조금 더 강하게 명하지 못한 것을.
“크아아앙!!”
무언가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괴음(怪音)에 운룡진인을 포함한 장로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이십여 년 전의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
“떠나라, 당장! 장로들은 빈도를 따르시게나!”
“운암이, 장문 사형의 명을 받듭니다!”
“운종이, 장문 사형의…….”
운현진인을 제외한 곤륜오선을 필두로 곤륜의 장로들이 움직였다.
사부, 사숙들의 다급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대제자들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들의 시선이 불혹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에게 향했다.
“대사형, 어찌해야 합니까.”
“…옥청 사제, 모두를 이끌고 비처(祕處)로 가게.”
운룡진인의 제자이자 일대제자들의 대사형 옥허도장은 자신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옥청도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의 말에 일대제자들은 반발했다.
“대사형, 어찌 혼자 남으시겠단 말이십니까! 차라리 제가 남겠습니다!”
“이 못난 사형이 혼자 뭐하겠단 게 아닐세. 그저, 사부님과 사숙님들의 마지막을 지켜봐 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살아 사제들을 찾아갈 테니, 이 못난 사형의 뜻을 들어주게나.”
옥허도장의 진심 어린 말에 일대제자들은 수긍하기 싫으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곤륜파는 구파일방 중 규모가 가장 작지만, 가장 끈끈했다.
많은 환란 속에서 맺어진 유대는 그 어떤 것보다 끈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옥청도장을 필두로 한 일대제자들은 하산 준비를 끝난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비처로 향했다.
홀로 남은 옥허도장은 운룡진인에게 받은 애검을 꽉 쥐었다.
“원시천존이시여… 곤륜을 굽어살피옵소서.”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