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은고아(銀箍兒) (2)
‘분명 있을 텐데…….’
대설산은 결코 작은 산이 아니기에 오두막까지의 거리는 만만치 않다.
허나 이백엔 문제가 아니었다.
만수군림행(萬獸君臨行)의 주천흑린(走天黑麟)을 펼친 이백은 흡사 축지술(縮地術)을 익힌 것처럼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며 대설산에 올라왔다.
지금의 이백이라면 속도로 적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설군아, 너도 모르겠어?”
이백의 물음에 설군은 고갤 저었다.
신수(神獸)인 설군이라면 무언갈 느낄 수 있을지 않을까 싶었으나 아쉽게도 다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운현진인도 은고아를 찾고 있었구나.”
운현진인과 달리 이백은 그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대설산을 이 잡듯 들쑤시고 있었다.
허나 홀로 살피기에 대설산은 너무 넓고 험했다.
험하기로 유명한 곤륜산에 기거하는 곤륜파의 진인답게 험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용형보(龍形步), 운해비영(雲海飛影) 등과 같은 수많은 보신경을 보유했으며, 그 유명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바로 곤륜파의 절학이다.
곤륜오선의 일인답게 운현진인의 경공도 상당했다.
“미안하지만, 은고아는 우희에게 줄 거라 안 되지.”
이백이 제자들을 이끌고 대설산을 온 이유는 은고아(銀箍兒)라는 법기(法器) 때문이다.
서유기에서 제천대성을 굴복시킨 법기 긴고아(緊箍兒)와 매우 흡사한 법기다.
하지만 은고아는 단순히 누군가를 굴복시키기 위한 법기가 아니다.
물론 같은 효과도 있지만, 착용자의 법력을 증폭시켜주는 효과도 있다.
강우희의 미숙한 백수조련술 수련에 도움을 주기 위해선 은고아가 꼭 필요하다.
그렇기에 운현진인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먼저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오늘도…….”
이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닥! 파다닥!
그 순간 수십의 새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새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동물들이 대설산을 누비기 시작했다.
만수통령술(萬獸統領術).
화경에 오른 이백이 펼친 만수통령술은 수백, 그 이상 마리 동물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허나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 이백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은은하게 빛났다.
[‘혜안’이 발동됩니다.]
[‘만수천리안’이 발동됩니다,]
만수천리안(萬獸千里眼)은 실제로 천 리 밖을 보는 술법은 아니다.
통감술이 금수의 감각을 공유한다면 만수천리안은 감각 중 시각에 국한된다.
허나 거리는 물론 수 역시 비교할 수 없다.
수백의 금수를 움직이며, 그들의 시각을 공유한 게 그 증거다.
―그럼 내 호법을 부탁해.
“크르릉~!”
통감술과 달리 만수천리안은 펼치는 동안 움직이는 게 가능하지만, 수색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설군에게 호법을 부탁했다.
‘본격적으로 암류의 흔적을 찾기 전에 아이들의 자구책이 필요하니…….’
* * *
“그만, 돌아가 봐야겠어.”
열흘.
운현진인이 대설산을 살핀 시간이다.
넓은 대설산을 고작 홀로 열흘 만에 전부 살피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운현진인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박했다.
도룡검을 대신 삼원봉마진을 유지할 법기(法氣)가 꼭 필요했다.
도룡검만 한 보검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법기로서 도룡검을 대신할 건 구하는 건 어렵다.
소림의 항마금강염주(降魔金剛念珠), 황실의 구룡옥새(九龍玉璽), 천축 대뢰음사의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등이 있다.
그 외에 유명한 법기들은 대부분 주인이 존재했기에 곤륜의 이름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게 바로 은고아다.
“일말의 희망이었거늘… 하…. 은고아는 본문과 연이 없나 보구나. 무량수불…….”
금강금고봉과 함께 천축의 법기 긴고아.
청랑왕이 생전에 긴고아와 흡사한 은고아라는 법기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곤륜파는 곤륜오선의 한 명인 운현진인을 대설산으로 보낸 것이다.
허나 보물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
안타깝게도 운현진인은 그 인연이 닿지 못한 듯하다.
사삭! 사사삭!
그때 누군가가 숲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마록(馬鹿)이구나. 음? 저건 늑대?”
마록만이 아니다. 늑대도 보였다.
헌데 이상한 건 늑대가 마록을 쫓는 게 아니라 반대로 마록이 늑대를 쫓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달랐다.
토끼, 다람쥐, 여우까지 보였다.
헌데 먹이사슬임에도 서로 등한시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강육약식(强肉弱食)은 짐승의 세계에서 더욱 또렷한 법칙이다.
그게 눈앞에서 무시되고 있었다.
그럼 먹이사슬 최상위의 포식자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하지만 최상위의 포식자로 예상될 맹수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당장 사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히던 것도 잊은 채, 운현진인은 짐승들의 뒤를 따랐다. 자신도 모르게.
허나 짐승들은 뚜렷한 목적지를 둔 게 아닌 듯 어느 순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흡사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허… 내 무슨 생각을… 무량수불.”
운현진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지나쳤다 판단했다.
일개 미물인 짐승이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수색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먹이를 찾는 거라면 몰라도.
“그럴 리 없는데… 설마…….”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청랑왕(靑狼王).
그는 수많은 늑대를 군대처럼 부린 것으로 유명했다.
청랑왕의 분노를 사, 늑대의 무리에 짓밟힌 문파 중에는 대문파도 존재했다.
만약 청랑왕과 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체… 누가… 어?”
청랑왕의 사후, 그와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남만의 야수족이 맹수를 가축처럼 다룬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야수족이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운현진인의 머릿속에 사흘 전 만난 사내가 떠올랐다.
검은 말과 금빛 원숭이 그리고 새하얀 고양이.
“그러고 보니, 청랑동 앞이었잖아.”
비싸긴 하지만 돈만 있다면 조련된 말이나 원숭이를 구매할 수 있고, 고양이야 흔하디흔한 짐승이다.
그렇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짐승들도 청랑왕처럼 권속으로 삼은 거라면?
무엇보다 청랑왕의 무덤이나 마찬가지인 청랑동에 나타난 게 우연이 아니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운현진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법기를 찾으러 온 거구나!”
운현진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은고아를 찾으려는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과 동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사문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잠시 유보했다.
그러는 사이, 이백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 * *
‘뭔가 있구나!’
수백의 짐승을 부려 대설산을 살피며 몇몇 영초를 발견했지만, 정작 은고아로 추정되는 머리띠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부린 짐승 중 한 마리인 다람쥐가 헛도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반복되는 걸 봐선 단순히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타라.
“어? 서, 설군이야!”
만수통령술을 펼치면서도 움직일 수 있지만, 제한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만수통령술을 중단하려고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것으로 부족해 황소보다 큰 호랑이가 눈앞에 있었다.
―싫으면…….
“진짜 설군이구나! 말도 할 수 있어!”
놀랍게도 눈앞의 거대한 호랑이는 설군이었다.
거체의 설군을 본 적이 없던 이백으로서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부족해 말까지 했다.
비록 육성이 아닌 혜광심어와 같은 형태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금수가 말(言)이라니.
설군은 평범한 금수가 아닌 신수(神獸)다.
그렇기에 가능했다.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계약자여.
“아, 알겠어. 그럼 신세 좀 질게.”
거체를 이룬 설군의 위엄은 상당했다.
금수 주제에 감히 신(神) 자가 붙었다는 게 어찌 평범한 일인가.
인간으로 치면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한 것이라 가능했다.
이백을 태운 설군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이백이 가려고 했던 장소였다.
“후… 고마워.”
―알면 됐다.
거체를 이룬 설군은 도도를 넘어 거만했다.
능력이 없다면 거만이지만, 신수라는 걸 생각하면 품격이었다.
이백은 주변을 살폈다.
[‘미혼진’이 발견되었습니다.]
[‘미혼진’을 파헤칩니다.]
[‘미혼진’의 생로를 찾아냈습니다.]
기문진(奇問陣)의 하나인 미혼진(迷魂陣) 설치되어 있었다.
미혼진도 종류가 많지만, 다행히 이곳에 설치된 미혼진은 감각만 속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백의 눈에 선명히 길이 보였다.
만수천리안을 운용 중이었기에 혜안이 미혼진의 존재는 물론 생로(生路)까지 찾아주었다.
“무얼 숨기고 있으려나.”
이백은 기대감을 가진 채 미혼진에 다가갔다.
미혼진의 생로가 보이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미혼진’이 만수통령신공에 반응합니다.]
[‘미혼진’이 해진되었습니다.]
저절로 미혼진이 풀렸다.
혜안의 힘에 의해 해진(解陣) 된 게 아니다.
만수통령신공에 의해 저절로 해진 된 것이다.
만수통령신공은 청랑신공에서 진화된 만큼 이백 이외에 아는 자가 없다.
강우희는 예외고, 그녀가 미혼진을 설치했을 리 없다.
“역시 청랑왕께서?”
미혼진이 청랑신공에 반응하게 설계가 되었다면, 청랑신공에서 진화된 만수통령신공에 반응한 게 이상하지 않다.
미혼진이 사라지자 이백의 눈에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게 작지만 귀한 걸 보관하는 일종의 보석함처럼 보였다.
이백은 함을 들었다.
붉은 기가 도는 걸 제외하곤 특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들어 있으려나?”
이백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함을 여는 순간, 영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영력이 느껴지는 건, 상자 안에 있던 평범해 보이는 팔찌였다.
이백은 함을 닫았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영력이 사라졌다.
다시 함을 여니, 영력이 느껴졌다.
“함 역시 보물이구나.”
영력을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것만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백은 요긴하게 사용할 때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함의 뚜껑 안쪽에 적힌 무언가가 보였다.
범어로 보였다.
[‘혜안’이 범어를 해석합니다.]
[자금홍호로]
“자금홍호로(紫金紅葫爐)? 서유기의 그 호리병?”
서유기에 등장하는 법기로, 무언가를 봉인하는 호리병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호리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는…….”
이백은 자금홍호로 안에 든 팔찌를 들었다.
[‘은고아’를 습득했습니다.]
[‘은고아’가 귀속됩니다.]
[은고아(銀箍兒)]
소유자의 기운을 증폭시킨다.
단일 개체에 한해 대상자의 신체에 긴고아(緊箍兒)가 생성시킬 수 있다.
은고주(銀箍呪)를 읊으면 긴고아가 반응한다.
귀속된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접촉할 수 없다.
단, 소유자의 허락하에 이양이 가능합니다.
은고주: 태상노군(太上老君) 급급여율령봉칙(急急如律令奉敕).
소유자가 결정되자 은고아에서 더 이상 영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속되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럽지만, 이양이 가능하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이백은 은고아를 다시 자금홍호로에 넣었다.
“도, 도우! 잠시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