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은고아(銀箍兒) (1)
“운현 사제는 아직인가.”
반백의 수염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노도사의 나직이 물었다.
노도사보다 약간 젊은 초로의 도사가 고갤 끄덕였다.
“예, 장문 사형…….”
“허… 큰일이군, 사제가 제때 와야 할 터인데…….”
두 사람 아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도사들은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들은 큰일을 앞두고 있었다.
운현이라는 도사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헌데 정작 운현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운학 사제, 얼마나 남았는가.”
“확실하지 않으나… 한 달을 넘기기 어려울 거 같사옵니다.”
운학진인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한 달.
짧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길다고 말하긴 어려운 시간이다.
사문의 명운이 걸린 일임을 생각하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운현 사제가 제때 돌아오지 못한다면… 승산이 있겠는가.”
“감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삼성(三聖) 사조들께서 목숨을 걸고 완성하신 삼원봉마진(三元封魔陣)입니다. 소제의 공부가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운학진인은 고갤 숙였다.
허나 곤륜의 장문 운룡진인은 고갤 저었다. 그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운학진인을 탓하지 못했다.
가장 분한 사람은 바로 운학진인 본인일 테니까.
“고갤 들게, 운학 사제. 자네의 탓이 아닐세. 자네가 그리 자책하면, 이 부족한 사형은 무엇이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분한 건 운학진인만이 아니다.
그가 삼원봉마진을 연구했다면, 운룡진인은 태허도룡검을 수련했다.
과거 곤륜삼성(崑崙三聖)이 그래왔듯, 곤륜을 목숨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지켜야 하네…. 사조님들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설사 빈도가 그리고 우리가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말일세.”
“물론입니다. 장문 사형.”
그들의 눈에 결의가 느껴졌다.
중원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십여 년 전, 곤륜파에 재앙이 덮쳤다.
곤륜파의 숙적이라는 마교도, 세외의 세력이 침입한 것도 아니었다.
마물(魔物).
황소보다 거대한 마물이 날뛰며 곤륜파 제자 수십의 사상자를 냈다.
그 수십 중에는 전대 장문인도 포함이 되어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했다.
마물이 노린 건, 곤륜지보(崑崙之寶)라 불리는 도룡검(屠龍劍).
정확히는 도룡검에 서린 상서로운 기운을 노린 것이다.
이에 오랜 칩거를 깨고 곤륜삼성이 나섰다.
우화등선을 앞둔 그들은 강했다.
허나 그런 곤륜삼성도 압도하지 못할 정도로 마물 역시 강했다.
곤륜삼성은 마물이 노린 도룡검을 이용해 삼원봉마진을 발동시켜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마물은 봉인했으나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이 너무 커, 곤륜삼성 역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지켜내리라, 기필코!’
* * *
“하… 잘못 짚은 것인가.”
새하얀 도의(白道衣)를 입은 초로의 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레이나 샅샅이 살피고 있으나 원하는 걸 찾아내지 못한 탓이다.
“진(陣)이 깨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거늘… 무량수불.”
한숨과 함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원하는 걸 찾아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제때 돌아가지 못하면 그 역시 문제이기에 마냥 이곳에 있을 수 없던 탓이다.
“음? 이곳에 누구지.”
초로의 도사는 누가의 기척을 느끼곤 의아했다.
느껴지는 기척이 미약한 것이 무림인은커녕 장정 같지 않았다.
예상대로 어린아이가 맞다면 더욱 의문스러웠다.
어린아이가 오르기에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어린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립이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사내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이곳에 오는 도우(道友)께서 계실 줄 몰랐네요.”
“…곤륜의 진인(眞人)이십니까?”
놀랍게도 사내는 도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허나 놀라지 않았다.
새하얀 도의와 소매의 구름 문양.
곤륜파(崑崙派)를 상징하는 도의를 입고 있었으니, 견문이 좁지 않은 무림인이라면 알아보기 어렵지 않으니까.
청해성의 끝자락에 위치한 곤륜산을 본산으로 둔 도문(道門)으로, 지리적인 문제인지 구파일방 중에서도 많은 게 알려지지 않아 신비지문(神祕之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초로의 도사는 두 손을 모아(合掌) 인사했다.
“무량수불… 운현(雲玄)이라 합니다.”
“운현진인이셨군요. 이백이라 합니다. 제자들과 유람 중이지요. 진인께서 이곳 감숙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이백의 물음에 운현진인은 당황했다.
이리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청해와 감숙이 맞닿은 성(省)이긴 하지만 가깝다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 곤륜의 진인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우연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무량수불…….”
그는 대답하긴 어려운지 도호를 읊을 뿐이었다.
이백 역시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 이상은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례했습니다. 이곳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무량수불… 빈도 역시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운현진인은 이백의 물음에 한순간 멈칫했다.
허나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의심만 살 뿐이었다.
그렇기에 운현진인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저희는 실례하겠습니다. 들어가 보자꾸나.”
“예~! 사부님!”
이백은 불안한 듯한 운현진인의 눈빛은 모른 척한 채, 제자들과 청랑동 안으로 들어갔다.
청랑동이 좁지 않은 덕분에 야군도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진인은 말없이 합장했다.
‘무량수불… 본파를 굽어 살펴주소서.’
* * *
‘이리 황폐했었구나.’
8년 전에는 당황해 밖으로 나갈 생각에 동굴 안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다.
헌데 오늘은 차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꼬옥 잡는 게 느껴졌다.
강우희였다.
“우희가 무섭나 보구나.”
“그, 그게… 예…….”
무서워하는 걸 들킨 게 창피했는지, 강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백은 그녀의 머릴 쓰다듬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부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우혁이는 괜찮으냐.”
“저는 괜찮습니다, 사부님.”
다행히 강우혁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씩씩해 보였다.
화르륵.
그때 불이 밝혀지며, 어둠이 약간이나마 해소되었다.
“사, 사부님! 손에 부, 불이 났어요!”
“하하, 괜찮단다. 삼매진화(三昧眞火)라는 수법으로 이 사부는 태우지 않으니 말이다.”
내공을 이용해 불을 일으키는 수법이다.
내공 소모가 적지 않으나 화경에 오른 이백에겐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강씨 남매는 이백의 손바닥 위에 나타난 불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가라면 삼매진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고수가 제법 되겠지만, 평소 내공을 소모하면서 삼매진화를 일으킬 일이 무엇 있겠는가.
화섭자로도 충분할 일을 말이다.
그러니 강씨 남매로서도 신기할 만했다.
‘거칠게도 살폈구나.’
곳곳에 파인 자국들이 보였다.
8년 전, 청랑왕의 유산을 얻기 위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들이닥쳤다.
허나 어느 한 명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애초 청랑왕은 자신의 절학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유일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원정은 의도치 않게 이백이 흡수했다.
그러다 보니 모두 허탕만 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허나 뭐라도 얻으려고 혈안이 된 무림인들이 순순히 돌아갈 리 없다.
숨겨진 보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거칠게 살폈다.
벽이니 땅이니 가릴 것 없이.
그럼에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백은 청랑동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예전엔 이곳에 청랑왕께서 잠들어 계셨단다.”
“여, 여기요?”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강우희를 보며 이백이 고갤 끄덕였다.
침상은커녕 몸을 누일 만한 지푸라기조차 없었다.
사부의 사부쯤 되는 존재가 왜 이런 곳에 잠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사부도 놀랐단다. 웬 노인이 이런 곳에 앉은 채 잠들어 계셨으니…. 이런 곳에 잠들면 병에 걸릴 거 같아 깨우려고 했지.”
“그, 그래서요?”
강우희는 궁금한지 물었다.
이백은 미소를 지었다.
“내 손이 닿는 순간, 노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때 사부는 너무 놀라 기절했단다.”
“사, 사부님이요?”
“그땐 이 사부도 겁 많고, 무공을 익히기도 전이었지.”
“그렇구나.”
강씨 남매는 신기해하면서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이백은 하늘과 같은 사부였기에 기절까지 했다는 게 놀랍지만, 강해지기 이전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부의 사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니 인사드리자꾸나.”
“예 사부님!”
이백의 말에 두 아이는 한때 청랑왕이 잠들었던 자리를 향해 합장했다.
그렇게 용무를 마친 그들은 청랑동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운현진인이 보였다.
“잘 살펴보셨습니까.”
“예, 덕분에 잘 살펴봤습니다.”
운현진인은 차마 청랑동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냐고 물을 수 없어 돌려 물었다.
이백 역시 애매모호한 답변을 했다.
쉬이 입을 떼지 못하는 운현진인을 향해 이백이 말했다.
“저희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아…….”
운현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강씨 남매를 데리고 돌아가는 이백이 생각에 감겼다.
‘곤륜오선(崑崙五仙)이라…. 그도 은고아를 노리는 건가?’
* * *
“으음… 굴복해라!”
앳되지만,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허나 의지만으론 안 된다는 듯 새하얀 무언가가 갸웃거리더니, 깡충깡충 뛰더니 떠나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소녀가 울상이 되었다.
“우우… 어려워요, 사부님.”
“하하, 이 사부도 몇 번이나 실패했단다. 그 때문에 늑대에게 물릴 뻔했지.”
강우희는 이백이 잡아 온 토끼로 백수조련술(百獸調練術)을 시도했다.
허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백이야 만수통령지체로 재구성된 육신과 만수통령신공 그리고 시스템의 도움으로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강우희는 아니다.
그러니 수련을 통해 역량을 넓혀야 한다.
“몇 번이고 잡아다 줄 테니 계속 수련하거라. 만수통령신공도 부지런히 연공하고.”
“예! 저도 귀여운 친구들을 빨리 만들 수 있게 열심히 할게요!”
기를 사흘 만에 느낀 강우희다. 분명 재능이 있었다.
기를 느낀 그 날, 이백은 그녀에게 만수통령신공을 가르쳤다.
내공이란 결국 얼마나 오래 축기했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물론 내공심법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지만, 다행히 만수통령신공의 효율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강우희는 지난 두 달간 만수통령신공과 기본적인 체력 단련 그리고 백수조련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만수통령신공과 달리 체련단련과 백수조련술은 쉬이 늘지 않았다.
사천당가를 떠나 이곳 대설산을 택한 이유였다.
“우혁아, 자세가 좋구나. 조금 더 정진하거라.”
“예! 사부님!”
강우혁은 제 누이와 달리 백수조련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정확히 알려는 주었으나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에겐 만수통령신공과 체련 단련 그리고 청랑보를 가르쳤다.
보법은 내공과 함께 이대 기초라고 불린다.
본격적인 권각술을 배우기 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잠시 나갔다 볼 테니, 농땡이 피우지 말고.”
“걱정 마세요!”
대설산에 온 지 사흘이 되었다.
그렇다고 사흘째 노숙하고 있는 건 아니다.
과거 장철우, 당령과 함께 지냈던 오두막이 지내며 아이들을 수련시켰다.
그리고 이백은 이따금 자리를 비웠다.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금군아, 야군아.
이백이 아이들만 놔두고 이따금 자리를 비울 수 있던 건, 두 영물 덕분이다.
웬만한 고수도 때려눕힐 수 있는 영물들이다.
강씨 남매는 안전은 보장된 것이다.
‘그럼 찾아볼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