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시작점
“다시 생각해 보거라.”
초로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나이에 절반도 채 되지 않을 법한 여인을 설득하려 했다.
허나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단호했다.
“본가로 돌아오는 동안 수십 번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아버지.”
“허나 와룡사관(臥龍四關)은 너무, 위험하다!”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었다.
그들이 언쟁을 벌이는 건, 와룡사관의 입관(入關) 때문이다.
오대세가 중에서도 무재(武才)가 떨어지는 제갈세가의 직계를 위해 만들어진 관문이다.
와룡사관을 모두 통과한 자는 하나같이 일세를 풍미한 거인이 되었다.
허나 와룡사관(臥龍四關)은 와룡사관(臥龍死關)이라고도 불렸다.
입관한 열의 여덟아홉은 목숨을 잃었고, 한두 명은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
고작 백에 하나만 통과했다.
그런 무서운 관문이니, 일세를 풍미한 거인이 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니 아비로서 반대하는 게 당연했다.
“위험하지요. 허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백조부께서 통과하셨으니까요.”
“그분이시니까! 전대 가주이시자, 신산(神算)이라 불리신 그분이니 가능한 게다! 네가 그분과 같다 생각하느냐!”
신산 제갈중경을 끝으로 와룡사관을 통과한 자가 없다.
호연신검(浩然神劍) 제갈현호도 와룡사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당대 가주인 제갈윤호는 아예 입관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와룡사관이다.
“물론 제가 그분과 어찌 비교하겠어요. 허나 이대로 피하고 싶지 않아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하아… 차라리 봉추칠관(鳳雛七關)에 입관하는 게 어떠냐.”
와룡사관이 제갈세가의 직계혈족을 위함이라면, 봉추칠관은 방계 및 가신들을 위한 관문이다.
와룡사관과 달리 4할이라는 비교적 현실적인 확률로 통과했고, 죽는 자도 5푼 이하였다.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와룡사관에 비하면 도전해볼 만한 확률이었다.
“아버지!”
“하아… 그를 사랑하느냐. 이리 목숨을 걸 정도로?”
여인은 움찔했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그건… 모르겠어요.”
“헌데 어찌 이리도 무모하더냐!”
부친의 호통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밝고 활발한 여식이지만, 이성적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의 여식이 이리도 무모하게 만든 한 사내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녀가 이리 무모하지 않았으니까.
“백이의 영향이 아니라곤 할 수 없어요. 허나 전적으로 그 때문은 아니에요. 그저 무력해지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저도 당당하고 싶어요. 그 누구에게도요.”
“네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 있느냐! 이 제갈진호의 여식인데!!”
그들은 제갈세가의 대총관 제갈진호와 그의 여식 제갈혜원이었다.
사천당가에서 진즉에 돌아온 사절단과 달리 그녀는 한 달이 더 지난 후에야 본가로 돌아왔다.
그런 제갈혜원은 아비에게 터무니없는 청을 해왔다.
와룡사관에 입관할 수 있게 가주께 허락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극악의 확률로 통과하며, 대부분 죽거나 다치는 와룡사관에 입관하겠다니 제갈진호가 분통이 터지는 게 당연했다.
제갈혜원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렇기 때문이에요. 대총관의 여식이 아닌… 제갈혜원이기 위해서요.”
“이 아비의 여식이면 네가… 네가 아니게 되느냐.”
“아버지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고 싶어요. 저 제갈혜원의 존재를요.”
“하아… 모르겠구나. 이 애비는… 정말…….”
제갈진호는 더 이상 그녈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쉬이 승낙할 수 없었다.
본가를 대표하는 고수 호연신검조차 통과하지 못한 와룡사관이기에.
더 이상 그녈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갈혜원은 아니라 하지만, 이백이 자꾸 미워지는 그였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꾸나.”
“예…. 하지만 저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담담함.
그렇기에 더 확고해 보이는 여식을 보며 제갈진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 밉소, 이 대협. 난 그대가 너무…….’
* * *
“에취!”
마차 안에 있던 어린 소녀가 재채기했다.
이를 본 소년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소녀를 덮어주었다.
“이거 덮고 있어.”
“오, 오빠는…….”
소녀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소년은 괜찮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여리여리한 소녀에 비해 소년은 상당히 건강해 보였다.
그렇다고 추위를 타지 않는 건 아니다.
그걸 증명하듯 소년의 팔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고마워, 오빠.”
그때 마차 밖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잔에 도착하면 뜨끈한 걸 먹을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거라.”
“예! 사부님!”
사내의 말에 소녀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사부에게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탓이다.
다행히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다.
사내는 마차를 점소이에게 맡기고, 아이들과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빈자리 보였다.
자리에 앉자 또 다른 점소이가 다가왔다.
“공자님, 무엇을 드릴까요?”
“아이들이 추워하니, 빨리 나올 수 있는 국물 요리 하나를 먼저 갖다주고. 아이들이 먹을 만한 요리 두 개와 내 배를 채울 요리 하나 가져다주게.”
“술은…….”
추운 날, 술을 당길 법하지만 이백은 고갤 저었다.
그리곤 점소이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술은 되었네. …신경 좀 써주게.”
“가, 감사합니다! 맡겨주십시오!”
점소이는 제 손에 쥐어진 철전 몇 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를 쥐여주고 안 쥐여주는 것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법.
실제로 점소이는 신이 나 달려 나갔다.
“감숙이 사천보다 춥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식사 후에 포목점에 들려 따뜻한 외투를 사주마.”
“감사합니다, 사부님!”
그들은 사천당가를 떠난 이백과 강씨 남매였다.
기본적으로 따스한 사천에서 평생을 살아온 강씨 남매에게, 서늘한 감숙의 날씨는 익숙하지 못했다.
이백이야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라 추위를 타지 않게 되었기에 두 성(省)의 기온 차를 깊이 생각지 못했다.
만약 강우희가 재채기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백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 아이들을 제자로 삼아놓고, 너무 무신경했네.’
이동하는 틈틈이 무공을 가르치고 식사와 잠자리를 신경 썼다.
헌데 정작 옷가지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잔인한 말로 돌려보낸 세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들이 있을 때, 작은 부분까지 세심히 챙겨줘서 자신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다들, 잘 돌아갔겠지.’
그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점소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가져왔다.
몇 푼 쥐여준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금방 나왔다.
“헤헤… 드시고 계시면 만두랑 소채볶음을 가져다드릴게요. 양고기찜은 조금 걸릴 거 같습니다.”
“괜찮으니 그리 부탁하네.”
국수 그릇은 하나이지만, 양은 둘이 먹기에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점소이가 신경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우혁은 국수를 이백에게 내밀었다.
“사부님, 먼저 드세요.”
“나는 되었다. 너희부터 먹거라. 특히 우희 너는 많이 추울 테니 빨리 먹거라.”
강씨 남매는 서로 마주 봤다.
사부보다 먹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만, 이백의 뜻이 그러하니 결국 국물을 떴다.
후우웁~!
따스한 국물이 몸에 들어가니, 추위가 한결 가시는 거 같았는지 강우희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다행히 더 늦지 않게 만두와 소채볶음이 나왔다.
다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제자들을 보자, 이백은 만두 하나를 쥐었다.
“나도 먹을 테니, 걱정 말거라.”
“예, 사부님!”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이백도 흐뭇해졌다.
‘대설산은 많이 추울 테니, 잘 챙겨 입혀야겠어.’
* * *
“하아… 하아…….”
칠흑처럼 검은 말 위에 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감숙의 날씨가 많이 서늘한 편인데, 산 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탓이다.
“많이 추우냐.”
“아, 아니에요.”
이백의 물음에 강우희는 화들짝 놀랐다.
몹시 추웠으나 솔직하게 ‘그렇다’ 말할 수는 없었다.
허나 그녀의 마음을 모를 이백이 아니었다.
“이 사부가 때를 잘못 골랐구나. 날이 풀리면 올 것을…….”
“괘, 괜찮아요. 그렇지, 오빠?”
“맞습니다. 사부님.”
이백이 강씨 남매와 함께 오르고 있는 곳은 대설산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 마차를 맡긴 후, 야군의 등에 아이들을 태웠다.
야군은 몰라도 마차는 대설산에 오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탓이다.
대설산이라는 명칭답게 눈이 쌓여 있을 정도로 추웠다.
8년 전, 이백이 대설산 아래 살 적에는 이리 추운 시기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추울지 몰랐다는 게 실수였다.
“설군아, 아이들을 도와줄래?”
이백의 부탁에 그의 품에 있던 설군이 고갤 쏘옥 꺼냈다.
오돌오돌 떨고 있는 강우희를 본 설군이 폴짝 뛰어,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 순간, 놀랍게도 강씨 남매는 한결 추위가 가셨다.
신수(神獸)인 설군에게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그들은 이백은 머릴 긁적였다.
“거의 다 왔다. 저기란다.”
“아! 저기군요! 사부님의 사부님이 계셨던 곳이!”
이백이 이 추위를 뚫고 아이들과 대설산에 오른 이유는 바로 청랑동 때문이다.
청랑왕이 그의 사부라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으나 청랑왕의 유산을 얻은 입장이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백은 사문의 뿌리를 알려줄 겸 청랑동으로 향했다.
…라는 건 명분이었고, 사실은 이곳 대설산에서 얻을 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강우희가 소리쳤다.
“아! 청랑동! 저기 맞죠!”
[靑狼洞]
8년 전보다 훼손되어 있으나 동굴에 적힌 청랑동이라는 글자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청랑왕의 유산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무림인들이 혈전을 벌인 탓에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맞단다. …이곳에 오면서 알려주었듯 이 사부가 처음 무공을 얻은 곳이 바로 이곳이지.”
“헤헤~”
이백은 자신의 제자들인 강씨 남매에게 청랑왕에 대해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뿌리에 집착한다.
이는 피만이 아니다. 무공의 뿌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소속감을 통해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비록 이백은 자신이 청랑왕의 제자라고 생각하지만,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제자들을 데려온 것이다.
청랑동을 바라본 이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헌데… 선객(先客)이 있군.”
“예? 선객이요?”
강씨 남매가 기감수련을 했다고 하지만 고작 한두 달에 불과하다. 타인의 기운을 감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백은 달랐다. 그는 청랑동 안에 있는 누군가를 느꼈다.
허나 이백이 미간을 찌푸린 건 단순히 선객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선객들의 기운이 범부의 수준이 아닌 탓이다.
금군은 어느새 강씨 남매의 곁으로 가 있었다.
유사시 아이들을 지키라는 이백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수인 금군은 웬만한 고수도 능히 쓰러트릴 힘이 있기에 아이들의 호위로 부족하지 않았다.
“무량수불… 이곳에 오는 도우께서 계실 줄 몰랐네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