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사제지연(師弟之緣) (2)
“사천당가? 그 독물들이 왜 본궁 구역을 얼쩡거려?”
핏빛의 화려한 적의(赤衣)를 입은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 못지않은 화려한 핏빛의 적의를 입은 중년미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문을 통해 알아본 결과 잔악혈군을 조사한다 하옵니다. 궁주님.”
“잔악(殘惡)을? 독물들이 미쳤나? 감히 본궁의 혈군을 조사해?”
적의(赤衣)를 즐겨 입는 집단은 간혹 있으나 이들처럼 핏빛의 시뻘건 적의를 입는 집단은 없다.
오직 한 곳. 혈궁(血宮)만이 혈의(血衣)를 입었다.
노인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고, 섬뜩한 기운이 주변을 압도했다.
그는 고수. 그것도 무시무시한 고수란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 노인은 무림십왕의 이제(二帝) 중 혈제이니 말이다.
“흐…음… 고정…하시옵소서. 궁주님.”
“…말하라. 왜 독물들이 잔악을 노리는 게냐.”
신음을 흘린 중년미부를 보자 그제야 혈제는 기운을 거두었다.
압도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중년미부가 대답했다.
“독심호리(毒心狐狸)가 암천혈우(暗天血雨)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다가 들통났다 합니다. 그를 도운 자가 본궁의 잔악혈군이라 생각하는 듯합니다.”
“멍청한 것들. 당한 놈이 병신이지…. 헌데 정말 잔악의 짓이라 생각하느냐, 환요(幻妖).”
중년미부는 잔악혈군과 함께 사대혈군인 환요혈군이었다.
중년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순(耳順)을 넘긴 노파다.
섭혼술과 색공의 대가로, 수많은 사내를 잡아먹어 젊음을 유지하는 요물이었다.
“잔악혈군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거 같사옵니다. 궁주님.”
“그렇지. 잔악이라면 그럴 만하지.”
잔인한 손속 때문에 미치광이로만 생각하지만, 의외로 모사꾼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잔악혈군이 혈궁의 사대혈군이 될 수 있던 건, 무위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환요혈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둬라. 정말 잔악의 소행이면 알아서 처리하겠지.”
상대는 독선의 사천당가이나 혈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내오존의 독선이라면 그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되는 거인인데도 말이다.
우내오존과 무림십왕을 나눈 기준은 화경의 극이나 아니냐가 아니다.
정확히는 의념기(意念氣)를 발휘할 수 있냐 없다였다.
의념기는 의지를 구현하는 힘이다.
화경의 상징인 강환이나 이기어검도 의념기에 비할 수 없다.
애초 의념기는 현경의 심검(心劍)에 닿은 입구와 같다.
우내오존과 무림십왕이 나뉜 이유다.
허나 혈제는 자신의 힘이 의념기보다 못하지 않다 생각하기 때문에 독선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결정이 나오자 환요혈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혈궁에서 혈제의 권위는 절대적인 탓이다.
스르륵~!
환요혈군의 화려한 혈의가 벗겨졌다.
이순이 넘은 노파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탄력적인 나신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혈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냐, 이리 오라.”
“예~ 궁주님.”
환요혈군은 혈제의 애첩이기도 했다.
사대혈군의 말석임에도 혈제의 총애를 받는 이유였다.
그렇게 끈적한 열기와 신음만 가득했다.
‘장난에 놀아나 주마…….’
* * *
“혀, 형님! 요, 용서해주십시오!”
녹의(綠衣)를 입은 중년 사내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다.
놀랍게도 그는 사천당가의 다음 대 장로로 내정된 검저유혼(劍低遊魂) 당자운이었다.
그런 그를 차가운 얼굴로 내려보는 자가 있었다.
“뻔뻔한 놈. 용서란 말이 나오더냐.”
“소, 소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당자원 그 새끼가 얼마나 음흉한 놈인지를!”
당자운이 사정하는 인물은 소가주인 당자명이었다.
죽은 당자원의 뒤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놀라운 게 밝혀졌다.
외총관으로서 쌓은 인맥 중에는 정파만이 아니라 사파고수들도 여럿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명문정파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사파를 배척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원만한 관계를 통해 본가의 이익을 취하는 게 외총관의 본분이다.
하오문 향주와 인맥을 쌓은 것도 그런 이유다.
헌데 당자원은 선을 넘었다.
거대 사파인 혈궁의 네 기둥. 사대혈군의 일인과 줄이 닿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사천당가 내에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자원이 가내에도 손을 뻗었다는 게 알려졌다.
심문 과정에서 죽은 암우대의 부대주와 눈앞에 있는 당자운이 그러했다.
“그게 변명이 될 거라 생각하느냐.”
“견마지로하겠습니다! 제발…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형님!”
당자운은 애초 당자명의 사람은 아니었다.
허나 그와 당자원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헌데 당자원의 명을 받고 있었다니.
그를 보는 당자명의 얼굴이 싸늘한 게 당연했다.
“…무림맹에 절정급 고수를 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서, 설마… 절 보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암류에 대한 조사를 위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절정고수를 차출하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방계 중에서 선별할 예정이었으나 당자명은 지금 그를 지목했다.
대충이나마 언질을 받았던 당자운이기에 기겁하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당자명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의 대표로 다녀와라. 돌아온다면 네 자리는 보장해주마. 그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최대한의 자비다.”
“크윽! 알…겠습니다. 약조, 지켜주십시오.”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부한다고 해서 자신을 안 보낼 당자명이 아니었고,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대(大) 사천당가의 장로 자리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그걸 위해 당자원의 손을 잡았던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당자운은 쫓겨 나가듯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렇게 정적 하나를 정리했으나 당자명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당자명은 이를 갈았다.
가장 위협적인 경쟁상대였던 당자원이 사라졌고, 위축되었던 소가주의 권위로 회복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하에 당자명의 손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가내 감찰의 독안각(獨眼閣), 독과 해독제 연구의 독의각(毒醫閣), 정보수집의 녹풍단(綠風團) 등 각 부서의 수장이 교체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당자명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만한 명분이 있었지만, 당자명에겐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애초 그 의도가 자신을 겨냥한 걸 모르지 않으니까.
빠드득.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 * *
“으…윽!”
강우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에도 이백은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제 말만 했다.
“하체의 단련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열하나. 하체가 부실하면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익힌다고 한들,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열둘.”
“으윽…….”
한계에 달했는지, 강우혁의 몸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강우혁은 마보(馬步)와 비슷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마보가 말을 타는 듯한 자세는 취해 허벅지를 단련시키는 거라면, 이백이 가르친 건 마보 자세를 취했다가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자세를 취하는 반복 방식이었다.
바로 스쿼트였다.
반복을 통해 허벅지와 허리 등을 단련하는 훈련법이다.
마보와는 다르지만, 결코 쉬운 훈련법이 아니다.
“허리 펴고 열일곱. 무릎이 발끝은 넘지 않게 열여덟.”
초보자가 완벽한 자세를 취하며 100회를 실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헌데 강우혁은 100회씩 두 번 끝내고 다시 세 번째를 실시 중이다.
강우혁이 이를 악문 것으로 보아 과연 3세트를 완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함께 스쿼트를 한 강우희는 한 세트 완수하고 나가떨어졌으니까.
‘역시 끈기가 있어.’
스쿼트는 어른도 힘들어했다. 헌데 이리 잘 따라와 주니 이백은 내색하지 않을 뿐 내심 흡족했다.
하지만 칭찬하지는 않았다.
대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스쿼트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수련은 시작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첫날부터 강도가 약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보다 못한 당령이 끼어들었다.
“삼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첫날인데…….”
“심하다니? 첫날이라 사낭(砂囊:모래주머니)도 달지 않았는데.”
이백의 말에 강우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옆에 있던 당령은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그녈 향해 이백이 말했다.
“그보다 령이 너는 왜 이렇게 수련을 설렁설렁해? 그래서 언제 초절정지경에 오르고, 화경에 오르겠어?”
“서, 설렁설렁이라니요!”
당령은 황당했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의 수련 강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강우혁이 마보를 취할 때부터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각이 지나고 삼각에 가까워질 동안 쉴 새 없이.
헌데 설렁설렁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이백은 그녈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푹! 푸푹!
당령은 한순간 몸이 무거워졌다.
이백의 소행이란 걸 깨달은 그녀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사, 삼촌!”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내공 때문에 수련이 제대로 되겠어?”
이백은 탄지공으로 당령의 내공을 제압했다.
내공이 심후하지 못했을 때도, 뛰어난 내공 수발능력 덕분에 내공 운용이 훌륭했던 당령이다.
대환단을 복용한 후 절정지경에 오른 지금은 내공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심후한 내공 덕분에 쉽게 지치지 않아 수련이 힘들지 않았다.
그래선 큰 도움이 안 된다.
한계까지… 아니, 한계를 넘어서야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헌데 당령의 뛰어난 재능이 지금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이다.
“하, 하지만…….”
“고작 지금에 만족할 생각이더냐.”
이백의 냉정한 말에 당령은 입을 다물었다.
방년의 나이로 절정지경에 오른 건 유례 없는 일이다.
구룡삼봉… 아니, 삼신룡도 이와 같지 못했다.
유일한 예외는 이백이지만, 그는 말 그대로 예외다.
절정지경도 대단하지만, 또래만 비교해서 안 된다.
이보다 더 높은 경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아…니요.”
“그럼 내공에 의지하지 마라. 강해지고 싶다면 의지를 갈고 닦아라.”
당령은 채찍을 휘둘렀다.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갑자기 묵직해진 채찍. 아니, 애초에 채찍은 무거웠다.
내공이 제압되기 전까진 내공 덕분에 채찍이 무겁지 않게 느꼈을 뿐이다.
그녀가 쥔 채찍은 가죽이 아니다.
특수한 약물에 담가 질기게 만든 잠사(蠶絲)와 철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철사(鐵絲)를 엮어 만든 채찍이다.
내공을 담아 휘두르면 바위든 나무든 찢겨진다.
평범한 사내라면 제대로 휘두르기도 힘들다.
외공을 수련해 근력이 강하거나 내공을 이용해야 한다.
헌데 방년의 여인이 내공도 제압된 채 휘두르려고 하니 쉬울 리가 없다.
휘~이~익! 퍼억!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강하게 충돌한 소리가 들렸다.
“후…우…….”
“쉬지 말고.”
내공이 제압되었다지만, 당령 역시 무림인이다.
육신 역시 단련되었기에 무거운 철편도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내공 없이 휘두르려니, 쉽지 않았다.
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빠드득…….”
어디선가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백은 여전히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휘~이익! 퍼억!
휘~이익! 퍼억!
당령은 철편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한번 한번 휘두르는 게 만만치 않았고, 휘두를수록 힘들었다.
‘그동안 수련을 한다고 했는데… 삼촌의 말씀대로 내가 설렁설렁 수련을 한 건가…….’
그간의 노력이 노력 같지 않아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 당령의 눈에 몸이 요동치고 있는 강우혁이 들어왔다.
벌써 삼각(三刻:45분)이 지났다.
오늘처럼 수련을 시작한 그것도, 고작 열 살짜리 소년도 버텨내고 있는데 이걸로 좌절감이 드는 자신이 우습고 비겁해 보였다.
당령의 눈빛이 바뀌었다.
철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휘~이익! 퍼억!
휘~이익! 퍽!
휘이익! 퍽!
허공을 가르는 철편의 파공음이 더 섬뜩해지고, 그 위력 역시 날카로워졌다.
휘두를 때마다 그 속도 역시 빨랐다.
이백은 그녈 바라보지 않았으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자극제가 되어 성장의 밑바탕이 되어주길 바랐고, 자신의 예상대로 되어갔다.
그때 이백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 …우혁아, 그만 쉬어도 좋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