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경종(警鐘)
‘분명… 이곳에 있을 텐데…….’
검은 그림자가 어느 전각에 스며들었다.
얼마나 은밀한지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부를 살피는 수법이 얼마나 교묘한지, 누군가 손을 대었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헌데 그의 목적은 금품이 아닌지, 값비싸 보이는 물건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의 소행이 아닌가?’
헛다리 짚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설사 이번 일이 그의 소행이 아니라도 장부조차 없을 리 없어. 그간 벌인 일의 장부가…. 이곳이 아니라면 몰라도…….’
전각의 주인은 발이 넓은 인물이다. 인맥 관리는 필연적으로 돈이 든다.
가문의 위세만 빌리는 건 하수.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조절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검은 돈이 오가게 되고, 이를 관리할 장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헌데 그런 장부가 발견되지 않았다.
‘…비밀공간이 있단 뜻이겠지.’
고작 장부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와 어떤 거래를 했냐에 따라 장부의 가치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힘이 된다.
그러한 장부를 아무렇지 않게 보관할 리가 없다.
엄중히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 전각의 주인이 누구임을 생각하면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흔치 않다.
실제로 전각 주변에는 고수들이 감시하고 있다.
‘그럼 기관토목이겠지.’
기관토목(機關土木)으로 유명한 가문은 제갈세가이며, 남궁세가도 일가견이 있었다.
허나 두 가문만 뛰어난 게 아니다.
독과 암기로 가려졌지만, 의술과 제련술로도 유명한 사천당가.
이곳 어딘가에 기관토목으로 숨겨진 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의심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것이야말로 내 전문이지.’
복면인은 은밀한 몸놀림만이 아니라 기관토목술도 아는 눈치였다.
그는 주변을 훑더니, 무언가를 자세히 살폈다.
불상(佛像)이었다. 그 주변에 움직인 흔적이 있었다. 허나 너무 미세해 일부러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찾았다!’
복면인은 불상을 만지작거리더니 살짝 비틀었다.
탈칵!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 보니, 침상 아래에 공간이 생겨났다.
이를 본 그의 복면 너머 눈이 웃고 있었다.
‘그럼… 뭘 그리 숨기고 있나 보자고.’
* * *
‘그래, 그렇게 밀어붙이라고!’
소가주 당자명이 독비(毒秘) 당은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일견 그럴듯하기에 주변의 시선이 당은에게 몰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당은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즐겁게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잠영귀가 사공녀의 외가인 북천표국의 대표두임을 모르는 자가 있소!”
“그렇다고 해도…….”
나직하게 말하던 당자명이 언성을 높였다. 쐐기를 박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당은은 쉬이 반박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끝내라고!’
이 일로 흔들린 당자명의 입지가 회복될 수 있지만, 지금은 당은. 정확히는 당령의 입지를 흔들 필요가 있다.
특히 그녀의 의숙(義叔)이라는 자를 사천당가에서 끌어내야 한다.
헌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자가 있었다.
“여기들 있었군.”
“대, 대호법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팔순(八旬)은 훌쩍 지난 듯한 노인이었다.
사천당가의 대호법 천수(千手) 당문기였다.
그의 뒤에 중년 사내들이 서 있었다.
당은과 함께 당외삼비로 불리는 당혼과 당묵이었다.
‘미, 미친놈들! 저 노인네를 왜 불러온 거야!’
그는 독선의 이복형으로, 오래전에 일선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렇다 해서 이빨 빠진 호랑이는 아니다.
당가 제일 웃어른이며, 가주 독선을 설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니까.
“누가 뒷방 늙은이에게 재미있는 걸 두고 갔다네. 그래서 오랜만에 가주나 보러 왔지.”
“뒤, 뒷방 늙은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당문기를 보며 당자명은 손사래를 쳤다.
그가 당문기를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건, 단순히 웃어른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때는 당자명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헌데 어떤 사건으로 눈 밖에 나고 말았다.
당시 불같은 성미에 당자명을 반쯤 죽였고, 그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런 당문기가 오랜만에 방문했으니 조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요즘 금독(禁毒)의 관리라 허술한가?”
“그, 그럴 리가 있겠…….”
당자명은 부정했으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문기의 눈빛이 성난 호랑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그럼 이건 뭔가. 왜 이런 게 내게 보내졌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당자명과 달리 누군가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그는 옥병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미친! 저거 왜 저 늙은이의 손에 있는 거야!’
그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힘을 꾹 주며 간신히 참아냈다.
다행히 누구도 그런 그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당문기의 호통이 이어졌다.
“왜! 신선폐가 이 늙은이에게 보내졌냔 말이다!”
“……!!”
당자명의 눈이 커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당은을 바라봤다.
허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갤 저었다.
애초 당은 역시 이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당문기는 성난 얼굴로 외쳤다.
“왜냐고 묻지 않나, 당자원!”
“소, 소질은… 예?”
당황하던 당자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문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허나 당문기의 기선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로 향한 걸 깨달았다.
당자명 역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것에는 도망치려는 당자원이 보였다.
“당자원이, 대호법님께 인사드립니다.”
“이 늙은이가 몇 번이나 되묻게 할 텐가.”
으르렁거리는 당문기는 당장이라고 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당자원은 움찔했지만, 영문도 모른 척했다.
“소질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
“이게 함께 보내졌는데도 모르겠단 말이 나오나.”
“……!!”
당문기의 품에서 나온 건 한권의 서책이었다.
그것을 본 당자원의 눈이 커졌다.
결코 이 자리에 나와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문기는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재미있는 게 많이 적혀 있더구나.”
“오, 오해가 있을 거 같…….”
태연한 척하던 당자원의 평정심이 깨졌다.
당문기가 내민 건 장부였다. 그것도 그간 당자원이 외총관으로 인맥을 다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고간 자금이 적힌 비밀 장부였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해명하려 했지만, 그런 걸 끝까지 들어줄 당문기가 아니다.
당문기는 소가주를 향해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가주가 네게 가문을 맡겼으면 잘해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소질이 부족해서…….”
사과한 당자명의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 살기는 자신을 질책한 당문기를 향한 게 아니다.
당황하고 있는 당자원에게였다.
암우부대주의 일로 냉철함을 잃었지만, 당자명은 결코 멍청한 인물이 아니다.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파악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까.
‘개자식! 내 이 일을 그냥 넘어가나 보자!’
당자명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빛이 닿은 당자원은 움찔했다.
“소질이, 책임지고 이 일의 전말을 파헤치겠습니다!”
“아니, 이 일은 호법원에서 맡는다.”
“대호법님! 월권입니다! 가내 감찰은 독안각의 권한입니다! 아무리 대호법님이라도 이런 결정을 내리실 수 없습니다!”
오래전 당문기에게 죽도록 맞은 기억 때문에 두려워하던 당자명이지만, 소가주로서 더 이상 두려워만 해서 안 된다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허나 당문기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본가의 감찰각이 왜 독안각이라 불리는지 아는가.”
“그야…….”
“노부에겐 조부가 되시고, 네겐 증조부 되시는 전전대 가주이신 만류귀종(萬流歸宗) 당형준 님께서 당시 권력에 취한 감찰각주의 눈 하나를 뽑으시면서 개칭되었네. 독안각주가 소가주를 찾아간다고?”
“아, 아니 그게…….”
막강한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사천당가의 가내 감찰을 할 수 있다는 건 막강한 권력이다.
그렇기에 중립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헌데 다음 대 권력의 정점이 될 소가주에게 줄을 대고 있다?
독안각주로서는 결격사유다.
“당자원! 외총관의 직위를 해임한다!”
“대, 대호법님! 월권입… 컥!”
당자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날뛰었다. 헌데 비명과 함께 혼절하고 말았다.
천수(千手)라 불리는 당문기의 솜씨였다.
그의 명령은 끝나지 않았다.
“당혼! 이번 일을 책임지고 파헤쳐라!”
“당혼이, 대호법님의 명을 받듭니다!”
상황을 빠르게 정리되었다.
당문기를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나직하게 말했다.
“가주가 뒷짐 지고 있다 해서 눈까지 감고 있는 게 아니다.”
“…….”
그는 떠났으나 당자명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문기의 경고 속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아버님께서 움직이신 거구나!’
당문기를 움직인 게 바로 부친이자 가주인 독선이란 걸.
* * *
“자네가 원하는 대로 했는데, 괜찮겠는가.”
당문기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 자식이라도 본가를 망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형님.”
“독한 놈, 그러니 네가 가주인 것이겠지. 허니 내 아들놈을 부추긴 걸 알면서 그냥 넘어가는 게야.”
당문기와 함께 있는 노인은 사천당가의 가주 독선(毒仙) 당문후였다.
당문기가 오랜 칩거를 깨고, 오랜만에 가문에 돌아온 건 그의 아들 때문이다.
“허허, 부추기다니요. 벽이를 부추긴 건 천희라 들었습니다만?”
“모른 척하긴, 됐네.”
당자벽.
당문기의 아들이자 현(現) 비철각주다.
그는 당자원의 처소를 은밀하게 잠입해 숨겨져 있던 신선폐와 비밀 장부를 회수했고, 제 아비에게 전했다.
당자벽이 움직이게 한 건 그의 아들 당천희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다.
애초 당천희에게 당자원의 정보를 흘린 게 독선의 뜻이다.
즉, 이번 일은 독선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 생각으로 오긴 했는데… 어디까지 손댈 생각인가?”
독선은 당자원의 일만 해결하기 위해 당문기를 끌어들인 게 아니다.
그 정도 일이라면 굳이 칩거한 이복형까지 불러들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헌데 당문기를 불러들였다? 제대로 집안 단속을 하겠단 의지였다.
“조만간 가주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입니다. 그전에 대청소를 해야겠지요.”
“……!!”
당문기의 눈이 커졌다.
사천당가의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다른 무림세가를 생각하면 사실 늦은 게 사실이다.
팔순이라는 고령임에도 아직 가주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독선이 권력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주위를 넘겨줄. 그리고 넘겨받을 인물이 마땅치 않은 탓이다.
헌데 결국 독선이 결단을 내렸다.
‘이 애비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 보고 있거라.’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