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의심(疑心)의 씨앗(種子)
“이게 웬일이래?”
왼쪽 가슴에 우(雨)라 적힌 녹의(綠衣)를 입은 사내들이 줄줄이 끌려가는 모습에 당가의 가솔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에서도 녹의 무복을 입은 자들은 흔치 않다.
그런 녹의 무복을 즐겨 있는 가문이 바로 사천당가다.
사천당가에서도 왼쪽 가슴에 우(雨)라는 글자를 적은 이들은 암우대(暗雨隊) 뿐이다.
다음 대 가주로 거의 확실한 소가주의 호위대답게 실력만큼이나 콧대 높은 이들이었다.
그런 암우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들 썩은 얼굴로 끌려가고 있었다.
“부대주께서 령 공녀님의 의부와 의숙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붙잡혔다는 말 못 들었는가?”
“그, 그런 일이 있었수? 아니, 왜?”
암우부대주의 일이 벌어진 지 몇 시진도 채 되지 않았으나 당가 내에 파다하게 알려졌다.
가솔 중 한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긴? 가주 어른 팔순연에서 령 공녀님이 대단했다 하잖아? 그에 비해 천악 공자님은…….”
“그럼 정말 소가주님께서…….”
“누가 확인도 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더냐!”
“아, 아닙니다. 유모님.”
노부인의 호통에 중년 가솔들은 움찔하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그녀는 당가의 자자 항렬과 천자 항렬, 2대에 걸친 혈족들의 어린 시절 돌봐준 유모다.
그러기 때문이지 일개 가솔이지만, 그 영향력이 웬만한 당가혈족보다 크다.
애초 그녀는 가주 부인의 시비로, 함께 당가로 와 벌써 오십여 년 째다.
그간 모은 재산도 상당해, 편히 여생을 보내도 되건만 여전히 당가에서 일을 했다.
“하… 명 도련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거늘…….”
그녀의 한숨과 상관없이 당자명의 입장은 무척이나 난처해져 있었다.
비록 암살미수 사건의 배후에 그가 있단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심증은 당자명을 향하고 있었다.
딱히 가주전에서 별다른 명이 하달된 것은 없으나 다들 당자명과 거리를 두며 사태를 추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분통이 터졌다.
그런 당자명을 놀리듯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니,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꺼져.”
불청객의 말에 당자명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긴 어려웠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제는 믿소. 솔직히 형님이 그자들을 죽여 득 볼 게 뭐가 있겠소? 안 그렇소?”
“…….”
당자원의 말에 조금이나마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당자원은 당자명의 살짝 벌어진 마음의 틈을 파고들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 일로 득을 볼 자의 소행일지 모르오.”
“자원, 네놈 말이더냐.”
뼈 있는 말에 당자원은 오히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자명은 내심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당자원은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했다.
“소제였다면 이리 말하겠소? 애초 소제가 부대주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나 있소?”
“모르지, 네놈이라면?”
당자명은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심증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자신을 제외하고 가주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외총관인 당자원이기 때문이다.
소가주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더 이상 가주 자리에 미련이 없다는 듯 외총관을 맡은 그다.
가내의 행정업무는 담당하는 내총관과 달리 외총관은 가외 업무를 주로 맡는다.
외부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직위지만, 반대로 가내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만큼 가주위(家主位)에서 멀어지게 된다.
허나 당자명은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음흉한 인물인지. 자신의 방심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외총관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가주위 서열이 더 높은 내총관, 호천각주 등 보다 당자원을 더 경계했다.
“소제는 오히려 자작극이 아닌가 싶소.”
“자작극?”
당자명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자원은 의심의 씨앗을 던졌다.
“안 그래도 악이 일로, 형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았소? 이때 형님의 수족을 잘라낼 심상으로 벌인 일이라면?”
“말도 안 되지만, 설사 네놈의 헛소리가 맞다고 한다면 부대주는 어찌 된 게냐.”
헛소리 그만하라는 표정이었지만, 완전히 끊어내지는 않았다.
당자명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당자원은 득의하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사실 그들의 자작극이라면 굳이 부대주를 포섭할 필요도 없소. 부대주를 유도해 제압만 하면 그만이오. 애초 부대주가 그들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도 모두 그들과 당은 그년의 주장 아니오?”
“천일취는 그렇다고 치고, 신선폐는?”
그럴듯했다.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라면 말 맞추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상황만 그럴듯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애초 부대주가 아니라 암우대의 누구라도 가능한 상황이다.
부대주는 그냥 재수 없이 걸려든 거라면?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다.
당은이 호법이지만, 팔대금독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역시 예상했는지 당자원은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쉽지 않지만, 구하지 못할 것도 없소. 흑시(黑市)라면 소량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겠소?”
“…흑시라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없는 것 빼고 전부 있다고 알려진 흑시다.
황실의 옥새는 없지만, 만든 장인도 구분 못 할 정도로 정교한 위조 옥새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사천당가의 소가주로서 부정하지만, 가문의 독과 암기 일부도 흑시에 풀려 있었다.
물론 팔대금독의 경우는 엄중히 관리되는 만큼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하지만, ‘혹시’라는 마음이 들긴 했다.
게다가 지금 그의 마음은 오히려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젠장, 놈들에게 당한 건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당자원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당자명이 어느 정도는 넘어갔다는 것을.
“원하시면 하오문 쪽에 알아보리다. 놈들이 흑시에 갔었는지.”
“…내가 알아볼 테니, 넌 신경 꺼라.”
하오문은 기본적으로 점조직으로 운영이 된다.
각 지역은 향주(香主)가 관리하는데, 모든 향주는 하오문주의 관리를 받는다.
허나 누구도 하오문주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는 향주라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구조이다 보니 향주는 그리 대단한 지위는 아니지만, 동시에 꽤 영향력을 가진 지위이기도 하다.
폐쇄적인 사천무림의 특성상 개방을 배척까지는 아니지만, 그리 협조적인 편은 아니다.
그에 비해 하오문은 대가만 맞는다면 정사(正邪) 따윈 신경도 쓰지 않기에 오히려 거래를 한다.
애초 개방과 달리 하오문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도 한몫했다.
당자원은 외총관으로서 하오문 성도 향주와도 친분이 있었다.
헌데 그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당자명은 그에게 손을 떼라는 의미로 말했다.
“도와주겠다는데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가겠소.”
“배웅하지는 않지.”
“기대도 하지 않았소.”
떠나는 당자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병신 같은 새끼,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해서 내가 직접 움직이게 해?’
그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짜증을 속으로 삭이며 돌아갔다.
당자명에게 마음 속 의심의 씨앗은 심어졌을 뿐만 아니라 싹을 나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날 우습게 봤다면, 각오해야 할 게야.”
* * *
“애구구구…….”
늦잠을 잔 장철우는 숙취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밤 그는 이백과 함께 검남춘을 몇 병이나 마시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냥 검남춘도 아닌 천일취가 섞여 있어서 늦잠 정도로 깬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애초 이백이 내공으로 그의 취기를 대부분 몰아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 왔는가? 솔직히 좀 힘드네…. 그래도 젊음이 좋긴 좋군. 자넨 멀쩡해 보이니…….”
장철우의 말에 이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날 신선폐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취기까지 함께 배출되었다.
그러니 젊음과 상관없이 숙취가 있는 것이다.
“기다리십시오. 꿀물이라도 달라고 할 테니.”
“끄응… 부탁함세.”
거절하기에 속이 너무 좋지 못했다.
이백의 부름에 어린 소년이 들어왔다.
누이와 함께 당령에게 배정된 시동(侍童)이다.
전각 관리를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가솔이 있고, 저들 남매는 당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편이었다.
“부르셨나요.”
“우혁아, 형님께서 마실 꿀물을 가져다주렴.”
이백의 청에 소년은 고갤 숙이며 물러났다.
과묵한 게 어린 소년답지 않았다.
꿀물을 가지러 간 소년의 뒷모습을 보는 이백에게 장철우가 말했다.
“근골이 괜찮은 아이지? 시동조차 저리 재능이 있어 보이다니, 사천당가다워.”
“…….”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동으로 썩기에는 아까워 보였다.
사천당가쯤 되는 가문이 이를 모를 리가 없는데, 일개 시동을 둔 이유가 있다 싶어 이백은 관심을 거두었다.
“히힉~! 그러지 마, 꿀물 가져다드려야 해~!”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물그릇이 놓인 소반을 쥐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주변을 작은 원숭이가 어슬렁거리며 장난을 쳤다.
“어, 어… 안 돼!!”
결국 소녀는 소반을 놓치고 말았다.
소반이 망가지고 꿀물이 담긴 물그릇이 깨진다는 생각에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희야, 눈을 떠도 된다. 다치지는 않았니?”
“어? 아… 예,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가 떨어트린 소반과 꿀물이 담긴 물그릇이 이백의 손에 들려 있었다.
소녀가 놓치는 순간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끌어당긴 덕분에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백은 놀란 소녀를 진정시키는 와중에 원숭이를 나무랐다.
“금군(金君)아,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너 때문에 우희가 많이 놀랐잖아?”
“히…….”
혼이 난 금군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곤 기죽은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잖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오히려 금군을 두둔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그러니 금군이를 너무 혼내지는 말아주세요. 이 대협님.”
“우끼끼~!”
금군은 언제 기죽었냐는 듯 소녀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작고 귀여운 원숭이 금군의 애교에 소녀는 까르르거렸다.
그녀는 이백이 꿀물을 부탁한 강우혁의 누이 강우희였다.
주방에서 잔심부름하던 강우희가 그를 대신해 꿀물을 가져온 것이다.
“금군아, 나는 그만 가볼게.”
“우끼끼!”
금군은 무척이나 아쉬운 눈치였다.
강우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금군과 마냥 놀 수만은 없었기에 돌아갔다.
“형님 드시지요.”
“고맙네.”
장철우는 이백이 건넨 꿀물을 들이켰다.
따듯한 꿀물을 마시니, 숙취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거 같았다.
물론 이걸로 완전히 해결되긴 어려웠다.
“하아… 안 되겠네. 운기행공이라도 해야겠네.”
“그러십시오.”
장철우는 철위단(鐵衛團) 시절에 배운 이류무공이 전부였지만, 북천표국에 간 이후 표국주의 배려로 몇몇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이미 늦은 나이라 상승절학까지는 아니었지만, 호신 정도는 가능 수준의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긴 어려운지, 여전히 이류에 불과했다.
장철우가 운기행공에 들자 자연스럽게 이백이 그의 호법을 섰다.
그러면 조금 전의 일을 되새겼다.
‘금군이 장난기가 있긴 하지만 함부로 애교를 부리는 편이 아닌데…….’
짐승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자와 비호의를 가진 자를 구분할 수 있다.
하물며 영수인 금군이 강우희의 호의를 모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백이 아닌 자에게 무방비하게 애교를 부리는 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당혼 대협께 물어봐야겠군. 저 아이가 어떤 아인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