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또 한 명의 가족
“알아봤느냐.”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의 물음에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내가 고개 숙였다.
“지난 열흘 간, 연무장에 출입하지 않았나 봅니다. 일공자님.”
“열흘이나? 그리도 꽁꽁 숨기겠다?”
일공자는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열흘이나 연무장에 출입하지 않았다는 건, 게으르다는 뜻이 아니라면 일부러 숨기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가주의 팔순연까지 보름이 조금 더 남았을 뿐인데, 그날 보일 장기를 수련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 말이다.
일공자는 나직하게 말했다.
“더 접근할 수는 없나, 삼조장.”
“죄송합니다. 일공자님. 삼비(三秘)께서 직접 살피셔서…….”
일공자의 물음에 삼조장이라 불린 사내는 불가능하다는 걸 피력했다.
그의 대답에 일공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주의 심복인 당외삼비(唐外三秘).
가주의 명 이외에 그 누구의 명도 받지 않는다. 소가주인 자신의 아비의 명조차.
그러한 사실이 일공자는 불쾌했다.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자명의 장남이자 사천당가의 일공자(一公子).
그게 바로 청년의 정체였다.
“천출(賤出) 따위가…….”
비록 당외삼비가 가주에게 당씨 성을 허락받고 호법위를 받았다지만, 사천당가의 혈족은 아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직계혈족. 그것도 종손(宗孫)이다.
당외삼비에게 방해를 받고, 그걸 항의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불쾌하기만 했다.
“우랑 정이는 어떤가?”
“이공자께선 삼양신장(三陽神掌)을, 삼공녀께서 금룡편법(金龍鞭法)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계십니다.”
이공자 당천우, 삼공녀 당희정.
당가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당천악과 함께 두각을 보이는 사촌들이었다.
조부이자 가주인 독선의 눈에 들기 위해선 그 두 사람보다 더 뛰어남을 증명해야 했다.
“녀석들답군.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바로 보고하게.”
“예, 일공자님.”
보고를 끝낸 암우삼조장(暗雨三組長)이 여기처럼 사라졌다.
당천악은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네깟 것들이 발버둥 쳐도 내 녹수(綠手)의 상대는 아니지.”
직계만 익힐 수 있는 도반삼양귀원공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삼양신장.
기병의 대표격인 채찍으로 펼치는 화려하면서도 위력적인 금룡편법.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천당가의 절기들이다.
허나 당천악은 녹피수투(綠皮手套)를 슬쩍 벗기며 득의했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수투가 벗겨지며 푸른 손이 보였다.
그건 독룡수(毒龍手)라는 무공을 익힌 부작용이다.
“내가 왜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고 독룡수를 익혔는데…….”
이날을 위해 독룡수를 익혔다.
암절(暗絶)이라고 불리는 아비의 암기술 대신 선택한 무공이다.
수십의 독과 약으로 배합한 특수약물에 손을 담가 흡수시킨다.
그 과정에서 손이 녹빛으로 변하게 된다. 대신 도검에도 베이지 않게 된다. 허나 그것만이라면 암절의 암기술을 포기하면서까지 익히지 않았을 것이다.
독룡수는 독공(毒功)이기도 하다.
독의 종가이며 독선의 가문임에도 의외로 독공을 익힌 자가 많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 용독술을 익히긴 했다. 하지만 독공을 익힌 건 아니다.
독공을 익히는 과정에 독사(毒死)되는 경우가 열의 여덟이고, 나머지 둘은 폐인이 된다.
허나 백의 하나. 독인(毒人)이 되어서 단기간에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물론 독선의 경우는 만의 하나에 해당하는 극악의 확률을 뚫은 특별한 경우다.
그러니 우내오존이라는 절대자가 될 수 있던 것이다.
“독공… 유일하게 독공을 익힌 날 가주께서 총애하지 않을 리 없지.”
가주의 손주들 중 유일하게 독공을 익힌 자신이다.
죽은 백부를 가장 총애한 이유가 뭔가. 그가 독공을 익혔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손이 흉물스럽게 변하는 것도 감수하면서 독룡수를 택한 걸 바로 대공자가 되기 위함이다.
“너희가 발악을 해도 대공자(大公子)의 자리는 바로 나, 당천악의 것이다.”
그의 눈빛에 광기가 번쩍였다.
당천악만이 아니다.
당천우와 당희정 등 대공자의 자리를 노리는 후기지수들은 서로 염탐하고, 독선의 눈에 들 준비를 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 당령은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 * *
“하합!!”
기합과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
푹! 푸푹!
나무에 박힌 건, 세 자루의 비수였다.
그 직후 두 자루의 비수가 더 꽂혔다.
한 번에 다섯 자루. 그것도 시간차로 도달하게 만든 건 상당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정작 다섯 자루의 비수를 던진 청년의 표정을 복잡해 보였다.
“후우…….”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안정된 순간, 눈을 뜨더니 다시 던졌다.
푹! 팅~ 푹!
나무에는 하나의 비수와 매우 얇은 세침이 박혔고, 버드나무잎을 닮은 비도는 바닥에 꽂혀 있었다.
세 가지를 동시에 던진 건 대단하지만, 목표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걸 아는지 청년의 얼굴은 어두웠다.
“젠장, 멍청한 놈! 병신! 머저리! 다들 익히 칠절수를 아직도 헤매냐!”
청년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퍽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자책하는 그를 향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누, 누구냐!”
놀란 청년은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유엽비도를 던졌다.
허나 유엽비도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닿지 못한 채 빗겨나갔다.
그런 유엽비도는 한 여인의 두 손가락에 잡혀 있었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에요?”
“미, 미안… 무공수련을 엿보는 건 금지사항인 걸 몰라!”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하던 청년은 아차 하더니 발끈했다.
타인의 무공수련을 엿보는 건 생사결(生死決)감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사문이 다를 때지요. 칠절수는 저도 익혔으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너…도 익혔다고? 본 적이 없는데… 본가 사람이야?”
칠절수(七絶手)는 사천당가에서도 직계만 익히는 금나수이자 암기술이다.
허나 직계혈족만 수십이 넘는다. 그러니 생소한 절기는 아니다.
수십 명이라지만, 본가에서 이십여 년을 살면서 눈앞의 여인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의 물음에 여인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저 몰라요?”
“몰라. 알아야 해? 너 누군데?”
“저 당령이라고 해요. 그쪽은 누구예요? 칠절수를 익혔으면 사촌이나 육촌인 거 같은데…….”
“아! 네가 당령이구나! 난 당천희. 사공자(四公子)라 불리고… 아버지께서 비철각주(秘鐵閣主)셔.”
비철각은 호천각과 함께 내당에 속하는 집단이다.
당가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은 암기를 포함한 무기는 당가타의 철방에서 공급된다.
허나 비전이 속한 특수한 암기와 장치들은 철저히 보호된 상태로 진행된다.
이를 맡은 곳이 바로 비철각이며 내당에 속한 이유다.
현 비철각주는 당천희의 아비이며 가주의 조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당천희는 직계에 속할 수 있던 것이다.
“아, 비철각… 그럼 철련공을?”
“아니, 아버님은 날 철장(鐵匠)으로 키우고 싶지 않으셔. 그보다 아까 손가락이라니 무슨 말이야?”
정식명칭은 대력철련공(大力鐵鍊功)으로, 비철각의 외공(外功)이자 동공(動功)이다.
경지에 오르면 도검불침이 되니 절학이라 부를 만하다.
실제로 현(現) 비각주는 도검불침을 넘어 검기불침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허나 그래봤자 평생 본가 밖으로 나가지 못한 철창에 갇힌 새 신세일 뿐이다.
그렇기에 비철각주는 아들을 철장으로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 그거? 비도, 우모침과 달리 유엽비도가 통제되지 않은 건, 손가락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당령의 말에 당천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말이기 때문이다.
허나 당령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암기를 힘으로만 던지는 게 아님은 알고 있지요?”
“손목이 중요하지.”
단순히 세게 던진다고 빠르고 강하게 날아가는 게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두 번은 가능해도 그 이상은 어렵다.
손목의 튕기는 힘을 잘 사용하면 훨씬 적은 힘으로 빠르게 던질 수 있다.
“맞아요. 손목만 잘 사용해도 적은 힘으로 암기를 효율적으로 던질 수 있어요. 하지만 미묘한 움직임까지 조절하기 위해선 손가락의 감각이 중요해요.”
“…….”
당천희는 그녀의 말을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그를 보며 당령은 유엽비도 하나를 쥐었다.
“잘 봐요. 암기는… 특히, 유엽비도는 이렇게 던지는 거예요.”
당령은 손목을 튕기듯 가볍게 던졌다.
그럼에도 유엽비도는 기묘하게 움직이며 날아가 나무에 꽂혔다.
너무도 쉽게 보였다.
“…….”
당천희는 말없이 유엽비도를 쥐더니 따라 던졌다.
휘이~익!
당령이 던전 유엽비도와 얼추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 듯싶지만, 나무를 빗겨갔다.
그것을 본 당천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말했잖아요. 손가락 감각이 중요하다고요. 유엽비도가 손가락을 떠날 때, 손가락이 도면(刀面)을 건드려서 통제하는 거예요.”
“도면을?”
당천희의 되물음에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유엽비도가 손가락에서 벗어나는 순간, 손가락에 도면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건드리느냐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져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기에 제가 알려드릴… 음?”
“손가락 감각… 도면을… 건드려…….”
당령의 설명을 듣던 당천희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물어놓고 웬 딴청이냐고 말할 수 있지만, 당령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당천희에게 매우 중요한 시점이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옆에 당령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싶었다.
당령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동도 없던 당천희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 자루의 유엽비도가 그의 손을 떠났다.
푹! 푸푹! 푹! 푹! 푸푹!
나무에 꽂힌 유엽비도는 한 자루지만, 흔적은 일곱 개가 보였다.
“칠절…귀원(七絶歸元).”
“와~! 멋져요!”
칠절귀원. 천수암왕(千手暗王)의 독문 암기술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당령은 사심없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그런 그녈 보며 당천희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령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러세요. 저는 희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특별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혈족들과 달리 그에겐 그런 게 없다는 걸 느낀 당령은 고갤 끄덕였다.
이로써 사천당가에 진짜 가족이 한 명 더 생겨났다.
“령아, 오라비가 된 기념으로 선물을 줄게.”
“선물이요? 와~! 뭐에요!”
선물이라는 말에 당령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런 그녈 보며 당천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며칠 만 기다려줘.”
“며칠이요? 으음… 알겠어요.”
당천희가 말한 선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존재하게 될 선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비가 그를 철장으로 키우지 않으려 했지만, 물려받은 피는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최고의… 최고의 선물을 만들어줄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