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사천행(四川行)
“…….”
마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조용하니 좋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왠지 모를 싸늘함 역시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마차 안에는 한 사내를 제외하곤 전부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행복감을 느낄 상황이건만, 이백은 왠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의 표정이 모호하자, 건너편에 앉은 여인이 물었다.
“백아, 왜 불편해?”
“아니, 나는…….”
이백의 건너편에 앉은 여인은 제갈세가의 제갈혜원이었다.
제갈세가에서도 독선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꾸렸다.
때마침 이백도 그곳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그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갈혜원은 제갈세가의 마차가 아닌 이백의 마차에 탑승해 그의 건너편을 차지했다.
“누가 끼지만 않았어도 가가께서 편히 가셨을 텐데 말이야.”
“…….”
이백이 괜찮다 말하려 했으나 끼어들어 그녀에게 핀잔을 놓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주예빈이었다.
웬만한 사내보다 그릇이 크다 알려진 그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여인보다 질투가 심했다.
허나 제갈혜원도 만만한 여인이 아니다.
“약혼자도 있으신 분이 이러시면 백이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뭐야!”
주예빈은 신창양가라고 불리는 양씨세가와 혼담이 있었다.
정확히 약혼한 사이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절 의사를 전달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옆에 이백이 있는 상황이기에 발끈하고 말았다.
자칫 분위기가 격해질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이백이 중재를 나섰다.
“두 사람 모두 그만했으면 좋겠소. 계속 이러면 난 다른 마차를 타겠소.”
“아, 아니 가가께서 그러실 필요는…….”
“군주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거지만, 그만할게.”
“뭐야!”
이 와중에도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이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차, 멈추게.”
“가, 가가 그게 아니라.”
“그, 그래 백아 그럴 필요는…….”
달리던 마차를 멈추었다.
당황한 그녀들은 이백을 만류하려 했지만, 그는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나직이 말했다.
“따라오지 마시오. 두 사람 모두…. 이도 무시한다면 먼저 떠나겠소. 교 소저, 다른 마차를 탑시다.”
“예? 아, 예…….”
교정정은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마차 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주예빈과 제갈혜원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럼에도 따라 나갈 수는 없었다.
경고한 그의 표정은 절대 허언이 아님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더 이상 안 좋은 인식을 줄 수는 없었다.
“군주님, 당분간은 협력하시지요.”
“협력? 본 군주가 왜?”
제갈혜원의 제안을 주예빈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럼에도 제갈혜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말했다.
“그럼 어부지리(漁父之利)로 교 여협만 점수를 따겠지요.”
“뭐!”
그녀의 말에 주예빈은 발끈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교정정만 그와 함께 마차를 옮기지 않았던가.
제갈혜원도 못마땅하지만, 교정정도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주예빈은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합전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녀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마차는 사천을 향하고 있었다.
* * *
“아가씨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령이 사천당가를 온 날부터 문턱이 닳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녈 찾아왔다.
대부분이 선친과 크고 작은 연을 맺었던 이들이었다.
당자성이 살아 있을 때, 꽤 인망이 좋았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들 대부분 권력에서는 거리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은 당자성의 자리를 당자명이 차지하며 그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탓이다.
반대로 당령이 구심점이 되어주길 바라는 눈치이기도 했다.
“이제 오셨으니 저희가 아가씨의 힘이…….”
“그만, 저는 선친께서 사셨던 집에 돌아왔지. 권력을 탐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다들 절 내세워 무언갈 얻으려 하는 거 같더군요. 그럴 생각이라면 생각을 바꾸세요.”
당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너무도 단호한 반응에 방문했던 이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들은 처음 말하는 것이지만, 당령은 며칠째 듣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태도를 바로하지 않는다면, 원치 않게 끌려다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니 저는 그런 생각이 아닙니다. 그저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나…….”
“무얼 바로 잡아야 한단 말입니까. 구환대주님.”
외당 예하 구환대(九幻隊)의 대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외당 소속인 만큼 권력은 미비하지만, 그래도 대주급인 만큼 절정고수다.
하지만 당령을 찾아온 자들 중 그보다 뛰어난 자만 다섯은 되었지만, 어느 한 명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혼 숙, 더 이상 인사를 받지 않겠다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친을 그리워해 찾아온 자들도 분명 있으나 아닌 자들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돌아온 건, 선친의 집이기에 그리고 조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마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 때문에 회의감이 들려던 참이었다.
당령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이들을 물리자 자리를 비워주었던 장철우가 돌아왔다.
그런 그를 보며 당령은 투정을 부렸다.
“괜히 왔나 봐요. 할아버지 팔순연만 끝나면 나가요. 아빠.”
“그러면 가주님께서 서운해하지 않겠니?”
장철우도 당가에서의 생활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당령의 의부 자격으로 대우를 받고는 있지만, 외인이라는 느낌을 은연중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령의 뜻대로 이대로 떠나는 것은 더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사천당가에서 그녈 놔줄지도 미지수다.
“할아버지도 제가 불편한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럼 나중에 가주님과 상의해 보거라. 하지만 그전에 신중히 생각하고…. 어쨌든 이곳은 너의 집이고 네 친부께서 사셨던 집이니 말이다.”
당령은 그의 당부에 고갤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러한 점 때문에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달 후에 떠나자는 건, 반쯤은 투정이었으니 말이다.
장철우는 당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거 같았다.
그녀의 머릴 쓰다듬는 게 허락된 자는 아직 둘 뿐이었다.
한 명은 장철우고, 나머지 한 명은 바로 이백이다.
유모 역할을 맡은 당은도 그녀의 머릴 쓰다듬지는 않았다.
만약 독선이 그녀의 머릴 쓰다듬으려 한다면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으니 결국 두 사람뿐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당은은 조마조마했다.
‘이 정도라면 가주님께서 언짢아하시지는 않겠지? 밉보이면 안 되는데…….’
감히 엿듣는 자는 없지만, 벽에도 귀가 달렸을지 모를 곳이 사천당가다.
지금의 대화가 독선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해서 안 된다.
다행히 장철우가 만류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다.
그렇기에 독선이 장철우를 언짢게 여길 수도 있다.
독선에게 당씨 성을 허락받고, 호법의 지위까지 부여받았다.
그가 반대한다면 장철우와 좋은 인연을 쌓고 있다고 한들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독선은 사천당가의 지배자이며, 그녀를 포함한 당외삼비의 주인이니 말이다.
당은은 급히 끼어들어 화제를 바꾸었다
“공녀님, 가주님의 팔순연에 보일 장기는 생각해 보셨어요?”
“아, 그거요? 대충은요.”
주저함이 없는 당령의 대답에 그녀는 호기심이 들었다.
당령이 그간 익힌 절기는 상당히 많았다.
당외삼비의 절기는 물론 독선이 은밀하게 전한 절기 역시 익혔다.
그 외에도 외숙 적무산과 북천표국의 총표두, 대표두들 그리고 형주상단에서 만난 천랑들에게까지 지도를 받았다.
과연 그날 어떤 걸 보여줄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건…….”
당령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더욱 조바심이 들었다.
“그건?”
“비, 밀. 이에요~!”
그녀는 개구쟁이의 얼굴이 되어 비밀을 외쳤다.
그런 당령의 답변에 당은은 휘청였다.
“공녀님!”
“헤헤~ 그날의 즐거움을 위해 기다려주세요~!”
얄밉긴 하지만 오히려 사랑스러움이 더 컸다.
그래서인지 당은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할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드려야지~!’
* * *
“대체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혈불의 눈에서 혈광이 번들거렸다.
산동성 내 비밀안가들이 하나같이 발각되었고, 포섭된 자들 역시 하나둘씩 제거되었다.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수 없다.
제거된 자들 중에는 산동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까지 포함되었는데, 어찌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림맹 쪽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더냐.”
“추적대 편성을 위한 조율 중이긴 하지만 당장의 움직임은 없다 합니다.”
무림맹 내에도 그들의 눈과 귀가 있었다.
중원무림의 수호를 대의명분으로 삼은 무림맹이지만, 그 실상을 자파의 이익을 위한 욕망의 소용돌이 속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변절할 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군사전에서 귀신같이 그들을 찾아내고 포섭했다.
그렇다고 해도 기밀까지 전해졌다는 건, 변절자 중에는 무림맹에서도 나름 지위를 가진 자도 있다는 의미였다.
“무림맹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짓이지? 설마 이백이라는 놈은 아니겠지?”
“그는 현재 독선의 팔순연에 참석하기 위해 사천당가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혈불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총순찰 십절흑제의 죽음이 전해지면서 궁은 발칵 뒤집혔다.
전(前) 사도련주 흑제의 모든 걸 물려받은 자가 바로 십절흑제다. 그리고 동시에 궁(宮)의 수뇌부에 속한 자이기도 했다.
궁이 발칵 뒤집히는 건 당연했다.
그 결과 이백의 이름은 살생부에 등재되었다.
허나 십절흑제를 죽인 이백이다.
그를 죽이기 위해선 결국 궁의 수뇌부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대계를 앞둔 시점에서 섣부른 움직임은 궁의 존재를 수면 위로 올릴 수 있다.
이는 존야의 뜻에 반하는 일이니, 실질적인 척살은 보류 중이었다.
“사천당가의 ‘그자’에게 전해라. 놈을 죽이면 ‘그날’의 빚은 탕감해주겠다고.”
“허면 팔대금독(八大禁毒)의 수급은 어찌해야 할지.”
사천당가에서조차 사용을 금지한 여덟 가지 절독이 바로 팔대금독이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만큼 당가 밖으로 유출되기 어렵다.
반대로 팔대금독을 유출. 최소한 접근할 수 있단 말은 사천당가에서도 최상위에 속한 극소수란 뜻이다.
“그건 오독문의 오독(五毒)으로 대신하기로 하지.”
“존명!”
정파에 사천당가가 있다면 사파에는 오독문이 있고.
사천당가에 팔대금독이 있다면 오독문에는 오독이 있다.
남만 오독문의 근간이 되는 금관오공(金冠蜈蚣), 칠보추혼사(七步追魂蛇), 삼목혈섬(三目血蟾), 흑미갈(黑尾蠍), 화석척(火蜥蜴)의 다섯 독물(毒物)의 독이 바로 오독이다.
팔대야차(八大夜叉) 그리고 야차왕(夜叉王)의 제강을 위해선 강력한 독이 필요하다.
특히 야차왕의 경우 무형지독이 큰 역할을 한다.
허나 무형지독은 독의 종주라 불리는 사천당가와 오독문 모두 완성하지 못했다.
그 차선책이 사천당가의 팔대금독이었다.
헌데 그걸 포기하고, 조건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일이 생겨났다.
“총순찰의 복수를 할 의리는 없지만, 본궁의 대계를 방해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않겠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