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심문(審問)
“……!!”
이백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탓이다.
이백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령…이가… 살아 있단 말입니까. 그 아이가 진정 살아 있단 말입니까!”
“물론이에요. 믿기지 않으시면 상단 식솔들에게 물어보셔요.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들 어찌 안단 말입니까?”
“한 달 전까지 이곳 형주상단에 지냈으니까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이백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장령이 살아 있단 것도 놀라운데, 얼마 전까지 형주상단에 지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장 협사께서도 공자를 뵙지 못한 걸 몹시 아쉬워하셨습니다.”
“형님…도 살아계셨군요.”
장령만이 아니라 사냥꾼 장씨 역시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8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교정정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했다.
“공자와 헤어진 그 날, 사천당가에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사천당가… 그들이 왜…….”
산골마을에서도 떨어져 사는 사냥꾼 부녀와 오대세가의 사천당가가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다.
그날 청랑왕의 비동이 발견되었다.
설마 자신 때문…은 아니란 생각했다.
청랑왕과 자신의 관계를 아는 건 제갈세가에서도 극소수뿐이니까.
그러한 이유로 잡혀 있었다면 얼마 전까지 형주상단에 와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그건 8년 전의 일.
비록 청랑왕이 전대 무림십왕이라지만, 독선이 가주로 있는 사천당가가 이리 목을 맬 정도는 아니다.
“령이가 당 가주님의 죽은 장남의 외동딸이라 합니다.”
“…!! 그게, 사실입니까!”
장령이 산골의 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귀태가 났고, 장씨에게 사연이 있다는 걸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 령이에게 직접 들었는걸요. 아, 그리고 소검후께 공자에 대해 듣고 찾아왔다 했습니다. 백전비무행 중 북천표국에도 방문하셨다가요.”
“소검후께서… 그런데 북천표국이라 하셨습니까?”
당 가주의 손녀라더니, 북천표국이라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천무림에서는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 외에 지역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정이었다.
특히 이백은 무림사에 정통한 편도 아니었다.
“북천표국의 북천검 적 대협께서 령이의 외숙이셔요.”
“아, 그렇군요.”
사천 십이대고수이자 초절정고수인 북천검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나 이백에겐 중요하진 않았다.
“한 달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공자를 뵙지 못한 걸 몹시 아쉬워하며, 오시면 꼭 당가로 오시라고 전해달라 부탁했습니다. 헌데 가주님의 팔순이란 서신까지 왔네요. 가실 거죠?”
“물론입니다. 당장… 곧 갈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었던 이백은 곁에 있는 주예빈을 보곤 말을 살짝 바꾸었다.
그녀의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그걸 느낀 주예빈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
“가가, 축하드려요. 조카분이 무사하셔서요.”
“감사합니다, 군주님.”
이미 이백을 향한 마음이 더욱 커진 탓에 자신을 떼어내려 한다고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백은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주예빈을 떼어내기도 어려웠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한들, 자신이 이곳 중원에 살아가고 그녀가 군주(郡主)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그건 자신이 화경에 오른 절대고수라도 다르지 않다.
“사천으로 가신다면 당연히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군주님, 그건…….”
그녀가 선수를 치자 이백은 난감했다.
그런 기색을 못 읽을 주예빈이 아니지만,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소녀에게도 기회를 주시어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회라는 말에 이백은 물론 교정정도 의아했다.
허나 주예빈은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가가께서 가장 아름답게 생각할 여인이 될 기회 말입니다.”
“……!!”
“……!!”
이백은 눈이 커졌고, 교정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녀야 앞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모르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이백은 달랐다.
자신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겠단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녀의 솔직하고 당당함이 사실 싫지 않았다.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전,현생을 통틀어 그러한 경험이 없었으니까.
“커험… 당 가주님의 팔순연입니다. 왕부(王府)분들이 방문하면 당황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 가주님 정도 되는 분의 생신아라면 관(官)의 인사들도 역시 방문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군주로서 방문하는 게 아니니까요.”
무왕의 생일에 하남무림의 문파에서 축하객을 보냈고, 반대로 무림맹주나 소림사 방장, 개방주 등에겐 무왕부에서도 축하객을 보냈다.
하물며 사천무림에 군림하는 독선의 생일이라면 고관들이 직접 방문할 것이다.
군주인 그녀가 방문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예빈은 예신군주로서 방문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 그럼…….”
“당연히 가가를 모시는 입장에서지요.”
마음 같아서 이백의 여인으로서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어서 모시는 입장이라고 돌려 칭했다.
물론 이백은 여전히 부담이 되었지만,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심정으로 교정정에게 물었다.
“교 소저도 가실 예정이십니까?”
“원래는 아니 되지만, 사부님께서 무림 큰 어른의 생신이니 다녀오라 하셨습니다.”
그녀가 이곳 호북에 와 있는 건, 사시에 세운 상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교정정 한 명 없다고 상회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사천당가와 좋은 연을 맺는 게 검모궁 입장에서도 좋다.
특히 독선의 손녀와의 연은 유지하는 건, 임무로 봐도 될 정도다.
미색이 뛰어난 교정정이 동행한다는 말에 주예빈의 심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따로 가야 한다 말할 수는 없었다.
투기를 부리는 여인을 좋아하는 사내는 없기 때문이다.
애초 주예빈은 그러한 여인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에 빠진 여인이 평소와 다를 뿐이다.
“그럼 다 같이 가면 되겠군요.”
이백은 마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예빈과 둘이 가는 건 부담스러웠다.
이리도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이 좋다는데 싫을 리 없다.
하지만 부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예빈은 그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저 돈이 좋은 집안의 여인도 아니다.
무려 왕(王)의 여식.
신분이 존재한 세상에서 그녀의 위치는 너무도 존귀하다.
그렇기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백 역시 화경고수.
무림십왕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의 입장도 왕(王)과 다름이 없다.
정작 이백은 그러한 걸 자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야군이라면 사천의 성도까지 닷새면 충분하다. 그보다 더 빠를 수 있다.
허나 동행이 있다면 야군이 전력을 다해 달릴 수 없다.
결국 보고 싶은 장씨 부녀를 만나는 걸 조금 더 뒤에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는 몰랐다.
사천으로 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에겐 차라리 십절흑제와 싸우는 것보다 힘들 줄은.
* * *
“쿨럭… 모, 모른다! 모른다고… 으아악!!”
피투성이가 된 혈인(血人)이 비명을 질렀다.
허나 복면인은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볼 뿐이었다.
“저, 정말 무, 무슨 말인지 모른… 으아악!!”
“…….”
혈인은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하지만 복면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고통만 선사할 뿐이었다.
지속되는 고문은 당하는 입장도 가하는 입장도 지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허나 복면인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더욱 심적 부담을 주었다.
“주, 죽여…줘… 제…발…….”
“백면독주가 죽기 전에 알려주더군.”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때는 아직 아니란 뜻이다. 죽여달라는 말이 나올 때가 진짜 심문의 시간이다.
복면인은 한 가지 비밀을 전하자 혈인의 눈이 커졌다.
백면독주(白面毒主).
무림맹 총군사 제갈중경을 독살했다고 알려진 사파의 고수다.
그렇다고 사도련 소속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사를 떠나 많은 거물을 독살해 뒷배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그놈…도…….”
“말하면 편안하게 해주겠다. 태산거검.”
태산거검(泰山巨劍).
황보세가, 산동악가와 함께 산동무림을 대표하는 오악검파의 태산파(泰山派)의 장문인이다.
검신(劍身)이 좁은 게 일반적이지만, 태산파의 검학은 도법만큼 위력을 중시하다 보니 그들의 검신은 넓은 편이었다.
거검으로 펼치는 태산파의 검학은 태산압정(泰山壓頂)이란 말이 뭔지 알 수 있게 한다고 알려졌다.
그런 태산거검이 혈인의 정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복면인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그럼 태산파의 명예는 지켜주마.”
“젠…장…….”
태산파의 명예. 그는 절망에 빠졌다.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사문의 명예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태산파의 장문인이니까.
오악검파의 장문인조차 암류의 변절자였던 것이다.
복면인은 백면독주의 입을 통해 태산거검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발설하지 못하고 죽었다.
금제가 걸렸단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복면인은 태산거검을 심문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이대로 정보가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소만…. 묵…뢰도…….”
“…….”
복면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묵뢰도(墨雷刀).
그 역시 태산거검에 비교해서 결코 비중이 떨어지는 인물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산동악가주의 친형이자, 악가도법의 대가다.
중원도객 중 열 손가락에 꼽힌다고 알려질 정도다.
“이, 이제… 약조…를 지켜…주시오. 본…파의 명예…만은…….”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복면인의 말에 태산거검은 화가 났다.
“약조와! 다르지 않나! 쿨럭…….”
“약조는 지킨다. 아는 걸 모두 말해. 고작 묵뢰도 하나로 만족할 줄 아느냐.”
태산파의 명예를 지켜주겠단 약조는 지킬 생각이다.
허나 그렇다고 곱게 안식을 줄 생각은 없다.
알고 있는 모든 걸 밝히고 중원을 배신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더, 더 이상 없소! 아, 아는 게…….”
“너희가 점조직이라도 네가 보고 하는 자가 있을 텐데?”
태산거검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이 와중에 뭘 숨기냐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아닌 사문에 보복이 갈 수 있던 탓에 모든 걸 발설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집요했다.
“십병…암…귀…. 그가 총…순찰이오. 그것…이… 전부요. 정…말이오.”
“…….”
십병암귀의 명을 받고 있다면 태산거검은 총순찰 휘하 순찰(巡察)이란 의미였다.
무당파의 차기 수뇌부인 무당칠자의 일성도장에 이어 오악검파의 장문인까지 순찰이라니.
애초 일성도장을 무당칠자로, 태산거검을 태산파 장문인으로 만든 게 암류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이…제… 약…조를…….”
“네가 속한 곳은 호법원(護法院)과 다른 거 같군. 소속은?”
태산거검의 눈이 커졌다.
복면인이 호법원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
“소속은 어디냐.”
“순찰…령(巡察令).”
“호법원, 순찰령 외의 집단은 뭐가 있지.”
복면인은 모조리 알아내겠단 심정인지, 다음 질문을 했다.
태산거검은 이를 악물었다.
“군사…전(軍師殿)과 장…로원(長老院)…. 여, 여기까지요.”
군사전, 장로원, 호법원, 순찰령까지. 상당히 규모의 집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복면인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이다. 너희 세력의 명칭이 뭐지.”
“…….”
이번만은 태산거검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백면독주도 같았다.
암류의 명칭을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히려는 순간 금제로 인해 절명하고 말았다.
“좋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태산파의 장로들이 너의 변절을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약조를! 지키지… 않을… 우웩!”
격노한 탓에 태산거검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런 그를 향해 복면인은 냉소를 지었다.
“약조는 태산파의 명예였지, 네놈의 명예는 아니었다.”
“개… 같…….”
욕설을 뱉던 태산거검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하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아쉽지만 아직 단서가 끊긴 건 아니었다.
“다음은 묵뢰도를 통해 알아내야겠군.”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