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당령
‘이…분이 나의 조부이신 독선(毒仙)?’
눈앞의 노인을 본 당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던 탓이다.
선풍도골의 검선, 거대한 칼을 가볍게 다를 정도로 거구의 낭왕. 노구임에도 여전히 호남인 검왕 등 무림십왕은 절대고수의 풍모를 가졌다.
헌데 무림의 전설이라는 우내오존의 독선이라는 조부는 조금 달랐다.
“이 할애비가 너무 평범해 놀랐느냐?”
“아, 그, 저…….”
당황한 당령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하며 조부를 모욕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선은 다 안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행이구나. 네가 이 할애비를 무서워할까 걱정했단다.”
“예? 그럴 리가요. 제 할아버지인걸요.”
조부를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하긴 했지만,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허나 독선의 입장에선 달랐다.
독(毒)의 신선(神仙)이라 불리지만, 그의 손속은 절대 신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독심(毒心)은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독선이기에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그와 몸을 섞고 사는 부인과 자식들조차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니까.
‘성이 그 아이도 그래었지. 역시 성이의 핏줄이구나. 허허…….’
독선이 당자성을 가장 아낀 건, 그저 장남이기 때문이 아니다.
뛰어난 재능 때문만도 아니다.
경외하며 어려워하는 다른 자식들과 달리 자신을 아비로서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당자성이니, 마음이 더 가는 건 사람이니 당연했다.
그런 점을 똑 닮아 있는 손녀를 보니 독선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허허, 그렇군. 그래야 하지…….”
“…….”
의미 모를 조부의 중얼거림에 당령은 눈만 끔뻑였다.
그런 손녀를 본 독선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 할애비가 널 불러놓고 이상한 소리만 했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당령은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어여뻤다.
어느덧 그녀 역시 긴장감이 사라진 것이다.
아들을 닮은 성격과 며느리를 닮은 외모.
독선은 할애비로서 당령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널 이리 부른 건, 다음 달이 이 할애비 팔순이란다. 그날 널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구나.”
“아,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팔순을 축하해주는 손녀를 보며 독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한 달 후 팔순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녈 정식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당령은 그 의미를 모르는 듯싶으나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사천당 가주이자 우내오선의 독선. 그가 직접 자신의 손녀를 가문만이 아니라 무림명숙들에게 선포하는 자리다.
그 어떤 손주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니, 모두가 어떻게 느끼겠는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람이 몰리고, 동시에 당령을 시기하는 이들 역시 늘어날 것이다.
그걸 모를 독선이 아님에도 그러한 자리를 마련한 건, 당령이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독선은 그러한 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 할애비의 생일에는 네 사촌, 육촌들이 하나씩 장기를 보여준단다. 너도 한 가지를 준비해줬으며 좋겠구나.”
“예! 할아버니! 령이가 깜짝 놀랄 걸 준비할 테니, 기대하세요!”
당황할 줄 알았던 당령은 오히려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독선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고맙구나. 기대하고 있으마.”
“헤헤…….”
환하게 웃는 손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먼 길 오느냐, 힘들었을 텐데 그만 쉬거라. 조만간 부를 터이니.”
“예, 할아버지. 푹 쉬세요.”
축객령에 당령이 돌아갔으나 독선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경악했을 것이다.
“그 역시 성이의 아이구나. 성이도 저랬는데…. 안 그러는가. 각주.”
“죄송합니다. 가주님.”
독선의 말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독선의 앞에 부복했다.
당령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당자경이었다.
가주전 경비는 물론 가주의 신변과 관련된 모든 걸 담당하는 호천각.
독선을 암중에서 호위하는 것도 호천각주 당자경, 그의 임무였다.
허나 독선은 당령과 만나는 동안 모두 물렸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명을 거역하고 지척에 있었다.
불복은 문책감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음에도 말이다.
“되었다. 네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앞으로도 네가 령이를 챙기거라. 단, 겉으로는 티 나지 않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가주님.”
형제, 사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은 당자성이다.
그가 죽은 후 마음이 바뀐 자도 있으나 아닌 자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소가주 당자명이다.
당자경의 호의를 그를 비롯한 친(親) 소가주 성향의 이들이 어찌 생각하며, 행동하겠는가.
그러니 뒤에서 은밀하게 도우라 명한 것이다.
‘이겨내고 네가 누구의 여식이고 손녀인지 보여주거라. 그러면 이 할애비가…….’
* * *
“소녀는 진심이옵니다.”
이백은 주예빈에게 진솔한 대화를 청했다.
대화를 통해 그녀의 오해(?)를 풀고자 했다.
허나 주예빈의 태도는 무척이나 완고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 군주님께 그리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자신의 말을 쉬이 알아주지 않은 이백이 야속했다.
하지만 야속하다 해서 마음을 접기에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주예빈은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아바마마처럼 강인한 사내가 아니면 안 된다 생각했사옵니다.”
주휘는 무왕(武王)이라는 작호가 너무도 어울리는 사내다.
그런 아비를 보고 자란 주예빈에겐 사내란 그래야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녀는 아비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두각을 보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빨리 강해졌다. 동배의 사내 중에선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황제의 조카라는 배경. 아비의 무재와 어미의 미색까지 물려받은 재녀 중에 재녀다.
허나 자신보다 강하지 않으면 사내로 보지 않은 오만함까지.
사내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구문제독부, 장군가 등 무신가(武臣家)의 후기지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전장을 던졌으나 어느 한 명 그녀의 창을 견뎌낸 자가 없었다.
혼기가 아주 가득찼음에도 자신의 곁을 준 사내가 없는 이유다.
식을 대로 식은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든 사내가 바로 이백이었다.
“강하기 때문이라면 꼭 제가 아니라도…….”
“처음에‘는’이라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이백의 강함은 그녀의 심장이 뛰게 만든 계기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그래봤자, 계집이지’, ‘내게 애원하게 해주마’ 등 같은 시선을 보인 후기지수들.
상관의 여식으로 조심스럽게만 봐주는 장수들.
오직 이백만은 맑고 깊은 눈으로, 자신을 무인으로 봐주었다.
주예빈이 원하는 게 바로 그러한 마음이었다.
“…….”
“제가 미운가요?”
교정정이나 제갈혜원 등 주변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았던 탓에 눈이 높아지긴 했으나 주예빈이 절대 미운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허면 어찌 이리 소녀를 밀어만 내십니까.”
평소 꾸미고 다니지 않았지만, 나름 미색에 자신이 있던 주예빈이다.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후기지수들의 눈빛이 불쾌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도 조금은 그러했으면 좋겠단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군주님을 밀어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아름답다와 사랑한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
그 순간 주예빈은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사내란 어리나 늙으나 결국 어여쁜 여인을 좋아한다.
그건 누구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웅은 호색하다고, 아비 역시 혈기왕성한 시절 호색하고 방탕하게 놀았다 들었다. 게다가 미색으로 유명한 자신의 어미를 비(妃)로 삼지 않았던가.
헌데 이백의 말은 너무도 달랐다.
주예빈은 그가 거짓말로 자신을 우롱한다 생각했는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거짓말 마십시오, 어느 사내가 박색한 여인을 좋아한단 말입니까!”
“오해를 하신 거 같습니다. 저는 박색한 여인을 좋다 한 적이 없습니다.”
고갤 젓는 이백을 보며 이제 와 발뺌 한다 생각한 주예빈이 발끈했다.
“가가께서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미인을 좋아합니다. 허나 미인이라 사랑한다는 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르시겠지만, 혜원. 제갈혜원이란 친우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 소저라는 분 역시 미색이 뛰어나시지만, 연심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외모로 호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사랑의 우선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그제야 주예빈의 흥분이 살짝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제갈혜원은 본 적이 없지만, 교정정은 본 적이 있었다.
같은 여인으로서 경계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연심을 품은 적이 없다 하니, 기쁘면서도 동시에 답답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다.
말은 저리해도 미색을 안 보는 사내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제갈혜원에게 연심을 품지 않은 건 야군의 일로 작은 오해(?)가 있던 탓에 그러한 감정을 가질 수 없었고, 교정정의 경우는 목숨빚 때문이다.
여인으로만 그녀들을 바라보았다면 마음이 달랐을지 모른다.
허나 그러한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뭐가 우선적인 조건이옵니까.”
“아…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에 주예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을 싫어한다는 말처럼 거짓말이 없으니까.
허나 이백의 말에서 이어진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예전에 누가 그러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그때 ‘아~’ 하며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거 같습니다. 하하, 그러니 저는 거짓말을 한 겁니다. 저 역시 제가 사랑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
주예빈은 다시 말을 잃었다.
두근! 두근!
그 순간 주예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백에게 들릴까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한번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
몽롱해진 주예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이백에게 향했고 손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당황한 이백은 피하지 못한 채, 몸이 굳어졌다.
전,현생 통틀어 모쏠인 탓에 여인의 이러한 행동에 몸이 굳은 탓이다.
그때였다.
우연인지, 노린 것인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교정정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교, 교 소저 들어오십시오.”
그의 허락에 주예빈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손을 내리며 동시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이 열리며 교정정이 안에 들어왔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금남(禁男)의 검모궁 출신이니, 사내는 물론 남녀 간의 기묘함에 미흡한 게 당연했다.
“제가 잘못 들어왔나요?”
“아, 아닙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당가에 가실 건지 여쭈려고 왔습니다.”
“당가? 오대세가의 사천당가 말씀이십니까?”
난데없이 사천당가에 갈 건지 묻는 교정정을 보며 이백은 갸웃거렸다.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교정정이 갸웃거렸다.
“예, 한 달 후에 가주님의 팔순연이 있으니 꼭 와달라는 령이의 서신이 왔습니다.”
“독선 어른께서 팔순이시군요. 저는 당가와 연이 없어서…….”
사천당가답게 전서구를 키웠고, 그중에는 특급전서를 나르는 전서응도 존재했기에 연락을 받는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 연이 없다니요, 령이 아… 모르겠군요. 령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살아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백은 교정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장령의 진짜 이름이 당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알았다면 진즉에 찾아갔을 테니 말이다.
곁에 있던 주예빈은 자꾸 언급되는 여인의 이름에 기분이 좋지 못했는지, 끼어들었다.
“가가께서 모른다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공자께서 모를 수 없는 아이라 하는 말입니다.”
싸늘한 주예빈의 말에도 교정정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꼭 말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이백에게 사천당가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말이다.
교정정은 이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의 조카인 장령이 바로 사천당가의 당령이에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