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기싸움
인세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빛.
그 주변을 흑룡위가 지키고 있었다.
오직 무왕의 안위만 지키는 존재들이다.
그런 흑룡위가 빛을 지키는 건, 예신군주 주예빈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녀의 강력한 주장을 흑룡중장군 영훈은 꺾을 수 없단 뜻이다.
주예빈은 빛의 주변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가가는 언제쯤 나오실 수 있을지…….”
“부마(駙馬)께서 나오시면 보고드리겠습니다. 군주님께서 안에서 쉬십시오.”
중장군의 말에 주예빈은 얼굴을 붉혔다.
부마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준말로, 황녀나 군주(郡主)의 지아비를 일컫는 말인 탓이다.
빛은 일인삼수(一人三獸)만 허락되었다.
그중 일인(一人)이 바로 이백이었다.
주예빈이 흑룡위로 하여금 빛을 지키게 한 이유였다.
그때 한 걸인이 달려왔다.
외원의 외벽이 대부분 무너졌다고 한들, 형주상단의 장원 내인데 걸인이 달려오는 건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특이한 점은 걸인의 허리에 띠가 세 개 묶여 있다는 점이다.
그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흑룡위들이 도검을 쥐었다.
걸인은 움찔하더니 부복했다.
“형주 분타주 흑면개(黑面丐)가 군주 마마의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일어나도 좋다.”
주예빈의 허락이 떨어지자 흑면개는 조심스렇게 일어났다.
흑면개라고 불릴만하게 얼굴 피부색이 많이 어두운 편이었다.
그는 흑룡중장군의 매서운 눈빛에 움찔하고, 그 뒤에 있는 빛을 보며 호기심이 들었다.
정보집단인 개방도의 본능과 같았다.
그런 흑면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십절흑제라는 놈에 대해 소상히 알아봐라!”
“십절흑제… 아, 알아보겠습니다!”
흑면개가 개방의 분타주라지만, 십절흑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그의 존재는 이제 막 알려진 상황이다.
그렇기에 각 분타까지 하달되진 못한 상황이었다.
흑면개는 서슬퍼런 주예빈의 눈빛에 움찔하더니 쏜살같이 분타로 돌아갔다.
총타로 정보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원래 개방의 정보를 얻기 위해선 대가가 있어야 하지만, 주예빈은 왕족이고 걸왕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감히 가가를! 한놈도 살려두지 않겠어!!’
주예빈은 죽은 십절흑제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가 죽었지만, 배후까지 뿌리 뽑지 않는다면 이 분노가 사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주예빈은 분노를 터트리고 있을 때, 빛 속에선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우득! 우드득!
뼈가 부러지더니 더 단단하게 굳어지고.
근육이 찢어졌지만, 더 질겨졌으며.
피부가 갈라졌으나 더 깨끗한 새살이 돋아났다.
그러한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투살기(透殺技)로 인해 찢긴 내장기관은 신의(神醫)의 치료를 받아도 완치가 어렵다.
헌데 때마침 벌어진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찢겨진 내장기관 대신 아기보다 더 순수한 상태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이백이 다섯 번째 초식을 창안한 순간, 일대종사(一代宗師)의 칭호와 함께 부족했던 깨달음이 채워졌다.
그렇게 정기신(精氣神)이 조화를 이루자, 그에 이어 단숨에 합일(合一)까지 이루게 되었다.
화경(化境).
무림의 전설이라는 무림십왕과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실 환골탈태는 덤이었다.
헌데 덤은 이백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었다.
[‘신수 백호 설군’의 신격이 회복했습니다.]
[‘신수 백호 설군’의 신기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신수 백호 설군’의 육신이 재구성됩니다.]
황소보다 큰 거대한 백호(白虎) 설군.
이백이 벽을 넘으면서 드디어 설군도 잃었던 신격(神格)을 회복했고, 육신이 신격을 담을 수 있게 재구성되었다.
허나 아쉽게도 또 다른 영수들, 야군과 금군은 격의 상승을 이루지 못했다.
애초 일개 짐승이 단을 이루어 영수(靈獸)가 되는 것도 수백 년 이상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격을 얻어 신수(神獸)가 되는 건 천년의 도(道)를 쌓아야 가능하다.
이제 몸 안에 단(丹)을 이루고 영수가 된 야군이나 영수로서 공부가 얕은 금군이다.
이백과의 계약을 통해 얻은 힘만으로 회득할 정도로 신의 격(神格)은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영수 오추마 야군’의 영기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영수 오추마 야군’의 오성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영수 금모신원 금군’의 영기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영수 금모신원 금군’의 오성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영기(靈氣)가 늘어나자 내단(內丹)이 커지고, 오성(悟性)이 높아지자 사고(思考)의 폭이 넓어졌다.
본능이 앞서긴 하겠지만, 지성(知性)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신격까지 아니라지만, 나름의 격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백과 세 친구들은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 동안, 무림맹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 * *
“정체불명의 세력이라니… 확실한 정보인가?”
자색(紫色)의 도의(道衣)를 입은 노진인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물음에 복면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신빙성을 8할로 보고 있습니다. 맹주님.”
“8할! 허… 어찌 그러한 세력이 존재하다는 걸 아무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노진인의 정체는 무림맹주 검제(劍帝)였다.
화산파 출신으로 자하신공과 매화검결을 대성한 거인이다.
그의 질책성 발언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8할이라니,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총군사께서 안 계시다지만…….”
“이참에 비각을 재편하는 것도 염두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그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급 인물들로, 무림맹과 사문의 가교역할을 위해 본맹에 상주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군사부(軍師府). 특히 비각(秘閣)의 역할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들 정도 위치에 있다면 정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리 없다.
그간은 총군사 제갈중경의 비호 때문에 넘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허나 그건 비영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작고(作故)하신 총군사께서 그간 은밀하게 조사하셨습니다. 맹주님.”
“총군사께서? 허… 어찌 이제야 보고하는 겐가. 비각주(秘閣主).”
무림맹은 단일세력인 마교와 다르고, 같은 연합체라도 사도련과 또 달랐다.
그들은 힘의 논리로 지배되지만, 무림맹은 명분과 합의를 통해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들, 무림맹주의 권위가 낮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중한 정보가 자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검제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전까지는 신빙성이 2할 이하라 맹주님과 장로님들께 보고드리기에 부족하다 판단하실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서 은밀히 조사 중 무림 내에 변절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무당칠자의 일성도장이 그 한 명이지요. 그 외에도 본맹 주요 맹우 문파에도 변절자들이 숨어 있다 판단 중입니다. 그러던 중 총군사님께서…….”
“무량수불… 빈도가 부족해, 총군사께 무거운 짐만 지워드렸군.”
무림맹의 주요 맹우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다.
즉, 비영은 ‘너희 사문에도 변절자가 있는데, 어디 비각을 넘보느냐’고 돌려 말한 것이다.
비록 제갈중경이라는 방패막이가 없어졌다고 해도 비영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몇몇 장로들은 발끈했지만, 맹주가 제때 흐름을 끊어 버린 탓에 그들은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럼 비각 및 군사부의 의견은 어떤가?”
“본맹 주요 맹우 문파의 감찰…….”
“불가(不可)!”
“가당치 않소.”
비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반발했다.
아무리 무림맹이 정파무림의 연합이라고 해도 결국 남이다.
사문을 남이 감찰하게 둘 장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어렵기에 각파에서 색출해주시면 그들을 통해 정보를 확보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희 비각에서 움직이면 오해를 하실 수 있으니 말입니다.”
“커험…….”
발끈했던 각파의 장로들은 비영의 말에 헛기침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정리되자 비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을 전담할 부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절정급이어야 합니다.”
“절정고수라니 과하지 않는가, 비각주.”
“우선 일류고수 정도로…….”
각파의 감찰이라는 패를 꺼냈다가 거둔 탓에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도 절정고수는 흔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긴 어려웠다. 아니, 싫다는 게 더 어울렸다.
앓는 소리를 하는 그들의 말에 비영은 단호히 말했다.
“흑백쌍괴, 십병암귀를 부린 세력입니다. 절정고수도 최소한으로 잡은 겁니다. 일류급이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본가에선 협력하겠습니다.”
“무량수불… 본파에도 협력하겠습니다.”
“본파 역시… 무량수불…….”
비영의 말에 가장 먼저 협력을 약속한 건 제갈세가의 장로였다.
전대 가주인 제갈중경이 그들에게 암살당했는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흑백쌍괴라는 말에 무당 역시 동의했고, 화산파 장로가 이어서 협력을 약속했다.
명색이 무림맹주가 화산파 원로인데, 화산파에서 협력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던 탓이다.
이쯤 되니 나머지 장로들 역시 반대할 명분이 부족했다.
그 이후로는 진행이 수월했다.
장로회의가 끝나고 하나둘씩 빠져나가자 대전에는 맹주와 비영만 남게 되었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맹주님.”
중원무림의 수호라는 미명 아래 만들어진 무림맹이지만, 실상은 자파의 이권을 위함이었다.
그러니 장로회의는 장로들과의 줄다리기였다.
그런 장로들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간은 제갈중경이 총군사를 맡고 있기에 어렵지 않게 조율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군사부의 부군사들이 있음에도 비영이 군사부를 대표로 장로회의에 참석한 이유였다.
“…‘그’는 잘 계시는가.”
“보안상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잘 계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비영의 말에 맹주의 얼굴에 씁쓸함이 엿보였다.
이 와중에도 자파의 이득을 위해 물어뜯는 장로들과 맹주이면서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회의감이 든 것이다.
“너무 큰 짐을 지어드렸어.”
“그분께서 오히려 고군분투하실 맹주님을 걱정하시며 잘 보좌하라 하셨습니다.”
비영의 말에 맹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정 힘든 건 자신이 아닌 ‘그’일 텐데 그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
“‘그’답구나. 장로들은 빈도가 어찌할 테니, 이쪽은 걱정 말라 전해주게.”
“감사합니다. 맹주님.”
장로들과의 기 싸움만 줄어도 군사부와 비각의 일이 줄어든다.
허나 그만큼 맹주의 부담이 커지겠지만, 그건 그가 감당할 몫이다.
군사부와 비각이 장로들까지 신경 쓰여 한다면 암류의 색출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영은 맹주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러나는 비영은 다짐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비각과 군사부는 내가… 지킨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