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십절흑제(十絶黑帝) (2)
“쿨럭… 우웩!”
쌓이고 쌓인 내상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역류한 피가 낭왕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전설이라고 불리는 무림십왕의 모습이라기에 너무 처참했다.
한쪽 팔을 잃으면 몸을 균형이 깨져, 예전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야 하건만 십병암귀는 더 강한 무위를 보여주었다.
귀물(鬼物)이라고 불리는 천인혈(千人血)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흐흐흐… 이제 세상이 제대로 보이느냐.”
십병암귀의 몰골도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무림십왕을 쓰러트린 걸 생각하면 양호하다 할 수 있었다.
이게 왕(王)과 제(帝)의 차이였다.
‘오왕일후(五王一后)은 서로 우열을 나눌 수 없고, 이제(二帝)가 천하를 호령하니 일황일선(一皇一仙)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것이 무림십왕에 대한 평이었다.
화경의 초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왕일후, 완숙한 경지에 오른 이제. 그리고 우내오존에 근접한 일황과 일선.
십병암귀가 무림십왕에 속하지 않으나 십절흑제(十絶黑帝)란 별호에 걸맞은 무위를 이루었다면, 애초 낭왕으로서는 쉽지 않은 싸움이었던 것이다.
물론 초입의 고수가 완숙한 고수를 이길 수 없는 건 아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허나 초입의 고수보다 완숙한 경지에 오른 고수가 더 강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을 속이고 있었군… 흑제가 살아 있… 쿨럭, 쿨럭…….”
“다… 지껄였으면 그만 뒈져라!”
십병암귀는 낭왕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엄지만 한 귀면(鬼面)이 허공을 갈랐다.
사파거두 악귀존자의 악귀환(惡鬼丸)이었다.
쇠구슬로 대신했던 암상의 악귀환과는 격이 달랐다.
낭왕은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죽음조차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마지막 의지였다.
퍽!
“지난번의 빚은… 지금 갚겠습니다. 낭왕 어른.”
“자…넨…….”
낭왕을 대신해 악귀환을 막아낸 자가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이백이다.
그의 재촉에 야군이 제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덕분에 더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넌… 으으하하하!!”
십병암귀는 이백을 보며 파안대소했다.
일견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는 어느 때보다 멀쩡했다.
이백이 왔다는 건, 영물 호랑이도 근처에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어딨느냐, 그 영물은… 본좌에게 받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고, 천하를 호령할 권력을 주마!”
“친구를 팔아 생을 연명할 생각은 없다. 십절흑제.”
“……!!”
이백의 말에 십병암귀의 눈이 커졌다.
낭왕의 입에서 흑제가 거론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헌데 그의 입에선 십절흑제라고 정확히 언급되었다.
허나 이백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 역시 하수인이면서 어찌 내게 그러한 힘을 주겠단 말인가.”
“감히…! 본좌는 하수인이 아니다!”
자존심을 상했는지 십병암귀… 아니, 십절흑제가 발끈해 악귀환을 펼쳤다.
이백은 피할 수 있으나 뒤에 있는 낭왕 때문에 손으로 잡아 보였다.
만악(慢鰐).
강기를 응집한 악귀환도 부술 정도로 만악의 악력은 대단했다.
몇 개월 사이, 그가 더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느꼈는지 십절흑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해졌군… 하지만 아직 본좌의 상대가 아니지.”
화경에서도 완숙한 경지에 오른 십절흑제이기에 화경조차 온전치 않은 이백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낭왕을 쓰러트리느냐 내공 소모가 상당한 탓이다.
이백 역시 그걸 눈치챘는지,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건, 두고 보며 알겠지!”
단숨에 거리를 좁힌 이백을 주먹을 휘둘렀다.
십절흑제는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낭왕의 칼로도 자신의 연혼갑을 베지 못했다.
하물며 화경에도 완전히 오르지 못한 이백의 권격 따위가 통할 리 없다.
‘팔다리를 부러트려 주…….’
마음 같아선 이백을 죽이고 싶지만, 철저히 굴복시켜 흑천회주를 대신하게 할 생각이다.
대계를 위해서 자신은 아직 뒤에 물러나 있어야 하니까.
허나 그의 생각은 이어질 수 없었다.
강렬한 고통에 의해 정신이 아찔해진 탓이다.
퍼억!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우직한 소의 발길질, 우우(愚牛)였다.
“큭! 이 새끼가… 커억!”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술(術)로 금강불괴에 근접했던 우우에 박살이 났다.
비록 연혼갑이 그보다 뛰어난 호신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멀쩡할 수는 없었다.
이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흡사 산탄총을 쏜 것처럼 권격을 거듭 날렸다.
우우와 교후를 접목한 초식, 군마(群馬)였다.
퍽! 퍼퍽! 퍽! 퍽!
여전히 연혼갑을 파쇄할 수는 없었지만, 충격을 전하는 건 가능했다.
“애…새끼 필요 없어! 죽여 주마!!”
무형(無形)의 창(槍)이 쇄도했다.
이백은 백수행공을 펼쳐, 몰아치는 교룡신창을 피했다.
교룡신창이 스칠 때마다 피가 화끈거릴 정도였으니 정통으로 맞아냈다면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십절흑제의 움직임이 유령 같아졌다.
서걱!
이백의 팔이 살짝 베였다.
“큭!”
“짧았군. 다음에…….”
움직이는 데 지장이 생길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조금 더 깊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십절흑제의 손에는 창 대신 검이 쥐어져 있었다.
유령보를 밟으며 흑성지검을 펼친 것이다.
유령보와 흑성지검의 연계는 흡사 공간을 넘은 듯한 빠름을 보여주었다.
위력만 본다면 교룡신창, 흑천마수 등 보다 떨어지지만, 애초 인간은 날카로운 날붙이에도 쉬이 죽는다.
자신과 같은 금강불괴가 아닌 이상 죽는 건, 변함이 없다.
푹! 서걱!
전력을 다해 피했지만, 이백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갔다.
아직 치명상까진 아니었지만, 잔 상처도 쌓이면 위험하다.
“이제 그만, 죽어라!”
충분히 괴롭혔으니 이제 그만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백의 몸에 늘어난 잔 상처는 그를 괴롭히기 위한 십절흑제의 수작이었던 것이다.
백수행공에 비견되는 유령보를 밟으며 펼친 흑성지검을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고 직감했다.
‘피할 수 없다면…….’
이백의 생각이 끝나기 전에 십절흑제의 검이 닿았다.
퍽!
십절흑제의 검은 이백의 가슴을 관통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 아니, 전신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던 탓이다.
[‘용린’을 창안했습니다.]
[칭호 ‘(예비)종사’(4/5)가 되었습니다]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내공이 소폭 상승합니다.]
[오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외가기공의 이해…….]
수없이 많은 빛의 편린들이 이백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흡사 용의 비늘처럼 보였다.
용린(龍鱗)을 본 십절흑제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건…….”
“고맙네. 네 덕분에 좋은 걸 깨우쳤어.”
용린은 십절흑제의 연혼갑에서 착안해 창안한 외가기공이다.
철포삼, 금종조처럼 육신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외문무공과 달리 기(氣)로써 육신을 보호하는 무공이 외가기공이다.
원혼(冤魂)이 얽히고설켜 있는 연혼갑을 보자, 이백은 강기의 조각을 용의 비늘처럼 교차하면 위력이 높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외가기공이 바로 용린이다.
“미친! 오냐, 누구의 방패가 더 단단한지 보자!”
십절흑제의 손이 검게 물들더니 몇 배나 커졌다.
흑천마수(黑天魔手). 그것도 흑천회주가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이백은 본능적으로 피하려다가 용린을 믿고 되받아치기로 했다.
그런 결정은 십절흑제의 심기가 더욱 건드렸다.
퍼퍽!
“크윽!”
“끄응!”
신음과 함께 두 사람 모두 튕겨 나갔다.
십절흑제의 손이 이백을 무참히 무너트릴 수 없었고, 이백 역시 그를 박살 내지는 못했다.
연혼갑과 용린 모두 외가기공으로서는 최고의 수준인 탓이다.
허나 밀린 곳은 이백이었다.
용린은 연혼갑이 밀리지 않지만, 이백의 경지가 아직 십절흑제의 수준까지 오르지 못한 탓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퍽! 퍼퍽! 퍽! 퍽!
난데없이 난타극이 벌어졌다.
치고받고 잡고 꺾고 베었다.
허나 금강불괴를 방불케 하는 외가기공들은 치명상만은 면하게 만들어주었다.
“헉… 헉… 헉…….”
“헉… 헉… 헉…….”
숨도 쉬지 않고 벌어진 난타극이 벌어졌었기 때문인지, 서로 떨어진 지금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낭왕을 상대로 지친 십절흑제도 쓰러트리지 못했다.
온전한 상태였다면… 이란 생각에 아찔했다.
“아직 끝… 우웩!!”
“하아… 이제야 반응이 오다니, 괴물 새끼…….”
다시 움직이려던 이백의 입에서 피와 함께 정체불명의 고기 조각이 나왔다.
인간은 하나의 고통만 느낄 수 있다.
무지막지한 난타극에 의해 이백은 자신의 속에 엉망이 되었단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투살기(透殺技). 암권이 익힌 흑살기(黑殺氣)의 원형이 되는 박투다.
겉은 물론 몸속까지 이중으로 충격이 발생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백은 눈치채는 게 너무 늦고 말았다.
“끝을… 컥!”
“크아앙!!”
십절흑제는 투살기로 이백의 머리를 노렸다.
성가신 용린 때문에 그의 뇌를 노린 것이다.
뇌를 다치면 누구도 살 수 없으니까.
허나 잊으면 안 되었다.
이백에겐 수호신이 있다는 걸.
형주상단을 보호하고 있던 설군이 나타났다.
설군의 발톱에 십절흑제의 가슴이 붉은 조흔(爪痕)이 생겨났다.
연혼갑조차 베고 그의 육신에 직접적으로 상처를 낸 것이다.
“끄으… 괴물 새끼가 왜 이리 강해진 거야!”
“크으으…….”
이백의 성장은 그와 계약한 영수들 역시 성장하게 만든다.
설군이 더 강해진 건 당연했다.
설군과 십절흑제는 서로 죽일 듯 노려봤다.
“크아앙!!”
먼저 움직인 건 설군이었다.
서걱!
번쩍이는 순간 십절흑제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괴, 괴물 새끼가!”
서걱! 서걱! 서걱!
설군이 움직일 때마다 십절흑제의 몸에 상처가 생겨났다.
비록 연혼갑조차 베고 그의 육신에 상처를 냈지만, 연혼갑이 파쇄된 건 아니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이 될 공격이었지만, 상처로 그친 이유였다.
다시 움직이려던 설군이 멈칫하더니 으르렁거렸다.
“젠장… 아파죽겠네. 저항하지 말고 이리 와. 이 새끼 뒈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네놈…큭!”
십절흑제는 설군에게 당하는 와중에도 이백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투살기로 인해 내장이 엉망이 된 이백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저항도 할 수 없다.
그가 붙잡히니 설군도 십절흑제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설군에겐 계약자 이백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십절흑제의 눈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설군의 내단이라면 오늘의 치욕은 잊어줄 수 있다.
물론 이백과 설군을 살려주겠단 뜻은 아니었다.
후욱~!
퍽!
무언가 날아와 십절흑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허나 연혼갑을 뚫고 타격을 줄 순 없었다.
“어떤 새끼… 컥!”
“나다, 치사한 새끼야.”
푸욱!
십절흑제의 뒤통수를 가격한 건, 낭왕이 던진 진천도였다.
타격을 줄 순 없었지만, 한순간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를 십절흑제의 가슴이 반으로 갈렸다.
이백의 손이 그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고호’을 창안했습니다.]
[칭호 ‘(예비)종사’(5/5)가 되었습니다]
[칭호 ‘일대종사’를 회득했습니다.]
그 순간 이백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이에 공명하듯 설군에서도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에…엔…….’
십절흑제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더니,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이백은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