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십절흑제(十絶黑帝) (1)
“교정정이… 군주님을 뵙습니다.”
주예빈의 정체를 알게 된 그녀는 깜짝 놀라 포권을 취했다.
그럼에도 주예빈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백… 가가를 아느냐.”
“백… 이 대협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교정정은 그를 백수 봉공이라고 칭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백수라는 호칭은 알려졌지만, 천문산장의 봉공이라는 사실은 굳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던 탓이다.
주예빈은 뭔가 미심쩍었으나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백 가가를 어찌 알지? 백 가가와는 어떤 사이고.”
“그건…….”
교정정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주예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특히 가슴이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몰랐다. 그게 질투라는 감정이라는 걸.
“서, 설마 백 가가와… 아니, 말하지 마!”
“…….”
말을 하라다고 했다가 혼자 버럭 화를 내더니, 이젠 말하지 말라니.
주예빈의 변화무쌍한 감정에 교정정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애초 왕부의 군주가 난데없이 이백을 백 가가라 칭하는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언제 왕부와 연을 맺으신 건지…….’
교정정의 얼굴이 씁쓸함이 어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예빈은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거 같은 표정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그녀의 고생은 눈물겨웠다.
무왕의 두문령(杜門令)에 예신각에 갇힌 주예빈은 흑룡위의 눈을 피해(?) 간신히 왕부를 빠져나왔다. 가까운 개방 분타를 통해 이백이 형주상단의 호법이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남과 호북이 인접한 성(省)이라고 하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녀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 가며 쉴새 없이 스무날 이상 달려 간신히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헌데 이백은 없고, 그를 아는 여우(?)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게 되었다.
“가가를 만나야 해… 백 가가를…. 그분은 어디 계시느냐!”
홀로 중얼거리던 주예빈은 현유에게 물었다.
그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갤 숙였다.
“그건… 말씀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이익!”
주예빈이 쥐고 있는 창이 떨려왔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허나 양민에게 화를 풀 주예빈이 아니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말 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개방… 근처 개방 분타가 어디에 있느냐!”
“개방 분타라면…….”
현유가 대답하려고 할 때, 낭왕이 끼어들었다.
“지금은 나가는 건 좋지 않다.”
“지금 본 군주를 방해하는…….”
왠지 모를 감정이 치밀어 올라 예민했던 주예빈은 자신을 방해하는 낭왕을 보며 쌍심지를 켰다. 허나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그녈 향해 군례를 취했다.
“낭왕의 말이 옳습니다. 군주님.”
“흑룡위가 군주 마마를 뵙습니다.”
“여, 영 숙이 여긴 어떻게…….”
검은 갑주의 사내들은 바로 흑룡중장군(黑龍中將軍)과 흑룡위였다.
주예빈의 호위를 위해 은밀하게 따르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본 주예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나 안 돌아가요! 그러니 끌고 갈 생각하지 말라고요!”
“마마를 호위하라는 명 말고는 하달받은 게 없사옵니다.”
자신을 끌고 가기 위해 온 줄 알았는데, 중장군이 이리 말하니 주예빈은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지, 되물었다.
“저, 정말… 나 안 끌고 가실 건가요? 영 숙.”
“전하와 왕비 마마, 대장군의 명이 아니라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냥 안 끌고 가겠다고 하면 의심스럽겠지만, 중장군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세 사람의 명령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이니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그때 낭왕은 자신의 거도(巨刀)를 뽑았다.
“쉽지 않겠군.”
“아니, 넌 죽어.”
난데없는 낭왕의 말에 어디선가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팔이 노인과 범상치 않은 복면인들이었다.
그를 향해 낭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팔 한 짝은 어디 두고 왔느냐, 십병암귀.”
“기르던 개에게 물렸지. 허나 걱정 마라. 널 죽이기엔 부족함이 없으니.”
두 사람은 웃고 있으나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소리장도(笑裏藏刀)였다.
낭왕은 뽑은 칼을 그에게 겨누며 말했다.
“부족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쾅! 콰쾅!
낭왕의 칼과 십병암귀의 손이 충돌할 때마다 굉음과 강렬한 후폭풍이 일어났다.
그것만으로 형주상단의 외원(外院) 외벽이 상당수 무너졌다.
허나 이런 그들에게 몸풀기에 불과하다.
“거참, 단단한 몸뚱이구나. 진천(振天)으로도 생채기 안 나는 걸 보면.”
“무식한 쇳덩이로 본좌를 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낭왕의 칼은 무식하게 크지만, 거대함에 어울린 위력은 진천이라는 도명(刀名)이 썩 잘 어울렸다.
그런 진천으로도 생채기를 내지 못한 건, 십병암귀가 익힌 연혼갑(練魂甲) 때문이다.
소림의 금강불괴신공을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가기공(外家氣功)이니 당연했다.
“그럼 뭐하나, 팔 한 짝 잃은 놈이.”
“이익!”
보도(寶刀)로 생채기를 내지 못했다고 우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의 팔이 잘렸다는 건, 결국 벨 방도가 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화가 난 십병암귀가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은 검게 물들어져 있었다.
십절(十絶)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흑천마수(黑天魔手)였다.
낭왕은 물러나며 진천삼도(振天三刀)를 펼쳤다.
쾅!
위~잉!
흑천마수의 위력에 낭왕의 칼이 떨려왔다.
다른 칼이었다면 이 한 수(一手)만으로 부러졌을 것이다.
서걱!
십병암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피해?”
“흑성루(黑星樓)의 흑성지검(黑星之劍)인가…. 이번에는 위험했군.”
십병암귀의 손에 반투명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무형마공으로 펼친 흑성지검이다.
흑천마수의 위력에 정신이 쏠렸을 때를 노린 수였으나 낭왕은 당황하지 않고 피해냈다.
비록 목에 가벼운 검흔이 생겨났지만.
“하긴 이 정도로 뒈지면 재미없지.”
십병암귀의 손에는 검 대신 창이 쥐어져 있었다.
물론 그 역시 무형마공으로 구현한 창이었다.
창을 한 손으로 펼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건만, 십병암귀는 그걸 무시하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창술을 펼쳤다.
빠름은 흑성지검만 못하지만, 흉폭하긴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은 흡사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미쳐 날뛰는 거 같았다.
허나 거칠긴 낭왕도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쾅! 콰쾅!!
낭왕의 진천삼도는 처음부터 세 개의 도초만 존재했던 게 아니다.
생사고락을 넘기며 도초(刀初)를 줄여나갔고, 종래에 남은 게 진천삼도다.
사람들은 낭왕이 펼친 도법의 가공한 위력만 기억하지만, 그 속에 담긴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단순함 속에 담긴 변화는 알면서도 막기 어려운 법.
낭왕의 칼이 십병암귀의 창을 빗겨내며 파고들었다.
‘벤다!’
십병암귀의 연혼갑이 금강불괴를 연상케 한다지만, 낭왕 역시 베겠다는 필살(必殺)의 의지를 담았다.
신도합일(身刀合一).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튕겨 나갔다.
삼장(三丈) 거리까지 튕겨 난 낭왕은 칼에 의지하며 일어났다. 칼을 쥐지 않은 손을 자신의 옆구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큭!”
“아쉽군, 심장까지 부셨어야 했는데…….”
십병암귀의 입에서 조소가 걸려 있었다.
낭왕의 칼에 베이기 전에 그의 옆구리를 후려친 것이다.
그의 왼 주먹으로.
흑천회주에게 잃은 왼 주먹으로 낭왕을 가격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십병암귀의 왼쪽 어깨 아래에 반투명한 왼팔이 있었다.
무형마공으로 구현한 의수(義手)였다.
예상치 못한 권격에 낭왕의 갈비뼈는 완전히 아작 나고 말았다.
낭왕의 육신이 조금만 더 약했다면, 십병암귀의 말처럼 심장도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 심장을 노린 권격이지만, 무형마공의 의수라서 원하는 바까지는 이룰 수 없었다.
조소를 짓던 십병암귀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어깨가 붉게 물든 탓이다.
“제법이군.”
낭왕은 무형마공으로 구현된 의수에 당하면서 빗겨맞았을 뿐인데, 금강불괴나 다름없는 십병암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빗겨맞지 않았다면, 그라도 치명상을 입었을지 모른다.
낭왕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흑제(黑帝)와 어떤 관계지.”
낭왕은 그가 익힌 무공들의 연원을 눈치챈 듯싶었다.
사도련을 세웠으나 사존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거성(巨星), 흑제(黑帝).
그가 사파거두들의 공동전인이라는 건만 알려졌을 뿐, 정확히 누구의 진전을 이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것으론 귀신 같은 발놀림과 빛보다 빠른 검, 난폭한 창 그리고 골병들게 만드는 투술.
십병암귀가 펼친 무공 중 상당수가 흡사했다.
낭왕의 물음에 십병암귀의 눈빛이 흉폭하게 변했다.
“…죽을 놈이 알아서 뭐 하려고.”
* * *
“무, 물러나라!”
두 괴물의 싸움의 여파로 형주상단 내 전각들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 파편. 아니, 파편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큰 돌덩이들이 날아다녔다.
휘말렸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호위단장 연자광의 외침에 상단 식솔들은 뒤로 물러났다.
원랜 진즉에 대피했어야 했는데, 꿈쩍도 않는 주예빈의 눈치 때문에 버티고 있었다.
허나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에 물린 것이다.
그때 물러나던 호위단 무사들의 위로 큼지막한 돌덩이가 날아왔다.
“어, 어어!”
피하긴 늦었다. 범위 안에 있던 무사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서걱, 서걱, 서걱!
“괜찮으세요?”
“아… 가, 감사합니다!”
여인의 목소리에 눈을 뜬 그들은 검을 쥐고 있는 교정정이 보였다.
자신들에게 날아온 돌덩이를 그녀가 벤 걸 깨달은 것이다.
“위험하니 빨리 물러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교정정의 말이 아니라도 한시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 외에도 낭인막의 천랑들의 도움으로 인명피해는 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형주상단의 식솔들이 모두 물러나는 동안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이가 있었다.
피웅~ 콰직!
흑룡중장군이 쏜 화살에 날아오던 파편들이 파괴되었다.
“군주님의 옥체를 상할 일 없게 하라!”
“충!”
중장군이 부순 파편의 파편을 흑룡위들이 도검을 휘두르며 제거했다.
이 와중에도 괴물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주예빈이나 그녈 호위하기 위해 장애물을 베어내는 흑룡위.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수들의 싸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법.
교정정 역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인지, 교정정 역시 마냥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 욕심 때문에 화를 불러내고 말았다.
“이런! 흑룡위는 목숨으로 군주님을 보호하라!”
“저, 저는…….”
중장군의 명령에 흑룡위는 지체없이 주예빈을 가렸다.
그녀는 스스로 지킬 수 있다 외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기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음을 깨달은 탓이다.
흑룡위와 중장군은 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려 충격에 대비했다.
죽음마저 도외시하는 충심.
이들이기에 무왕이 자신의 곁을 허락한 것이다.
주예빈은 자신의 욕심이 이들을 사지로 몰았음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쫘아악!!
그때, 무언가 베이는… 아니, 찢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그건 두 괴물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기의 폭풍이 찢어진 소리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군주님.”
“가, 가가!!”
지쳐 보이는 이백이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