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혈법주(血法主) (1)
“꼭이에요! 백이 삼촌이 돌아오면 사천으로 오라고 해주셔야 해요!”
당령은 교정정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이제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령 매, 걱정하지 마. 공자께 꼭 말씀드릴게.”
“언니만 믿을게요!”
검모궁은 형주와 가까운 사시(沙市)에 상회를 세웠다.
형주상련과 함께 무너진 상단과 상회가 여럿 있었고, 휘청이는 곳은 더 많았다.
형주와 가까운 사시는 특히 심했다.
와룡상단과 일월상단의 도움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형주상단이 도와주니, 사시에 상회를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건, 항운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한 전문 상회는 형주상단과 상권이 겹치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잡음이 있었으나 형주상단의 협력과 검모궁의 무력 앞에 무의미했다.
당령과 교정정은 형주와 사시를 오가며 친분을 쌓았다.
“할아버지! 아저씨들, 나중에 사천으로 놀러 오세요~!”
“오냐. 그리하마.”
낭왕은 부상이 상당히 호전했음에도 형주상단에 남았다.
끼니마다 맛 좋은 음식이 나오고, 질 좋은 옷을 내어주며 용돈(?)까지 찔러주었다.
그러니 굳이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리 퍼준다고 형주상단이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낭왕과 천랑들의 존재만으로 형주상단. 나아가 형주의 치안이 좋아졌고, 그들이 툭툭 던져주는 고언에 상단호위들의 수준 향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에 비하면 정말 싸게 먹힌 셈이다.
다만 그들이 남은 이유 중 하나였던 당령이 사천으로 돌아가니, 형주상단에 얼마나 더 지낼지는 알 수 없었다.
“언니, 자주 와서 할아버지와 말동무해주세요.”
“내가 감히 낭왕 님의 말동무가 될 수 없지만, 자주 인사드릴게.”
낭왕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당령이 특이한 것이지, 교정정이 사교성 없는 게 아니다.
낭인막의 수장이자 무림십왕의 낭왕이다.
그런 그에게 쉬이 말동무가 될 수 있겠는가.
인사를 마친 당령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걸린 깃발은 북천표국의 표국기가 아니었다.
[四川]
사천은 호북성의 옆에 위치한 성(省)이다.
사천성에 수많은 문파와 가문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깃발을 달 수 있는 가문은 오직 한 곳.
오대세가의 사천당가뿐이다.
마차는 사천당가 본가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마차를 보내고 당령을 불러들인 자는 사천무림의 절대자 독선(毒仙).
수없이 들어봤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조부였다.
그녀 역시 그런 조부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당령은 이백을 만나지 못했음에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삼촌, 령이 보러 오셔야 해요. 꼭!’
* * *
당령이 형주를 떠나고 있을 때, 강소 소주로 당도한 자가 있었다.
“과연 소주(蘇州)구나.”
이백은 번화된 소주를 보며 감탄했다.
발단된 미래를 아는 그지만,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호남의 장사, 하남의 정주, 감숙의 난주 등 여러 성도(省都)도 가봤지만 소주만큼 번화하고 살기 좋아 보이지 않았다.
풍족한 만큼 사치와 향락이 발달하는 건 당연했고, 이를 노리는 자들 역시 모여드는 게 당연했다.
강남흑도를 지배했던 흑천회가 직접 관리하던 땅이며, 지금은 귀갑군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감탄하는 이백에게 다가온 자가 있었다.
“이 대협이시지요. 개방의 철협개라 합니다.”
“이백이라 합니다. 개방의 호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년 걸인은 본인을 철협개(鐵俠丐)라 소개했다.
항룡개(亢龍丐)에게 밀려 후개(後丐)가 되지 못했으나 개방의 차기 장로로 내정된 인물이다.
현재는 개방의 전투부대 천강개(千强丐)를 이끌고 있었다.
“추풍신개 장로님께서 대협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추풍신개라면 이백도 안면이 있었다.
취개의 일로 그를 만나러 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백은 철협개의 안내를 받아 소주 분타로 향했다.
“후학 이백이, 장로님께 인사드립니다.”
노화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추풍신개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백을 반겨주었다.
“되었네. 뭘 그리 격식을 차리는가. 이리와 앉게.”
“감사합니다.”
추풍신개의 말에 이백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소주에 와 있다는 건, 개방 역시 이곳을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했다. 흑천회주가 종적을 감춘 후 소주는 승냥이들이 전쟁터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흑도의 패권을 쥐게 될 테니, 개방으로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십병암귀라면 아직 찾아내지 못했네.”
“…들으셨겠지만, 무림맹의 총군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뵌 시간은 짧지만, 할아버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방의 장로인 추풍신개가 제갈중경의 죽음을 모를 리가 없다 생각하며 그간의 일을 밝혔다.
특히, 흉수로 추정되는 자의 안가에서 ‘소주로 가라’는 비문의 발견했다는 걸 알렸다.
이백의 설명에 추풍신개는 놀라워했다.
개방조차 모르는 정보였던 탓이다.
“십병암귀가 소주에 있다는 말이군.”
“그가 이곳에 없다고 해도 흉수의 세력이 이곳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건 맞을 겁니다.”
흉수(백면독주)와 십병암귀의 관계를 증명할 증거는 없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는 없으나 소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소주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흥미를 끄는 건 역시 전쟁의 결과다.
“역시 귀갑군을 눈여겨봐야겠군.”
“가능성이 높겠지요.”
귀갑군이 소주를 차지했지만, 흑천회처럼 강남흑도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비록 황산제일검이 패배해 물러났지만, 귀갑군에 굴복한 게 아니다.
게다가 호남의 동정십팔채 역시 건재하다.
그게 흑천회와 귀갑군의 차이이며, 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귀갑군을 눈여겨봐야지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선입견이 본질을 흐릴 수 있는 법이니까.
“본방이 유심히 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천강개가 무력집단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개방도다.
정보수집에도 능하다.
일천의 천강개 중 이번에 투입된 인원만 사백.
소주가 작은 땅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을 피하긴 어렵다.
비록 대답했으나 이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무리가 되더라도 한 번 더 시도해봐야겠어.’
* * *
“거지새끼들, 참으로 귀찮구나.”
적도의(赤道衣)를 입은 노도사의 얼굴에 짜증이 살짝 보였다.
얼마 전부터 소주를 들쑤시는 걸인들 때문이다.
소주 분타에 속한 개방도의 수는 오십이 갓 넘는다.
개방의 분타 중에서는 규모가 있는 편이다.
개방 역시 소주를 신경 쓰고 있단 의미였다.
헌데 얼마 전부터 수백의 걸인들이 소주 분타에 합류했다.
그것도 고수급으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다 걸왕까지 나타나면 곤란하니…….”
현재 소주에 활동하고 있는 개방의 병력은 대문파와 일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다.
중견급과 대문파를 가르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무림인의 수가 사오백 이상은 보유해야 한다.
그 정도의 무림인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만약 초절정고수를 보유했다면 인원은 상관없이 대문파급으로 분류된다.
현재 소주 분타에는 사백의 천강개와 초절정고수인 추풍신개가 있으니, 대문파급 병력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허세가 아니라면 적도의의 노도사는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도사의 정체는 바로 혈법주(血法主)였다.
“어차피 내 임무는 그게 아니니…. 얼마나 확보되었지.”
“현재 26명이며, 항주까지 합치면 70명입니다. 당주님.”
혈법주와 비슷한 복장의 중년인이 고갤 숙였다.
그는 혈법주가 맡고 있는 혈법당의 일원이다.
소주에 투입된 인원은 혈법주 한 명이 아니었다.
“개방이 움직였다. 꼬리가 밟히면 귀찮아지니, 슬슬 정리하라고 해.”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혈법주는 십병암귀의 예상대로 귀갑군 대군장의 편에 섰다.
몇몇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귀갑군의 휘하에 항주가 있기 때문이다.
십병암귀가 회복할 때까지 소주의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고 통제하는 임무는 대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순찰령의 임무 중 하나가 재정 확보다.
십병암귀가 흑천회주를 조종해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는 이유였다.
그들이 확보하고 있는 재정이 암류의 대계(大計)를 준비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타 파벌의 간섭 없이 소계(小計)를 준비하기 위해선 그와 별개로 군사전만의 뒷주머니가 필요했다.
소주와 항주에는 많은 부호들이 방문한다. 그들을 괴뢰로 만들어 군사전의 뒷주머니로 만드는 게 혈법주의 진짜 임무였다.
괴뢰의 수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많으면 통제만 어렵다.
적지만 알짜배기를 골라야 한다.
나름 부호(富豪) 소리 듣는 자만 70명.
암류의 대계를 완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군사전의 뒷주머니로는 충분하다.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그분의 총애는 본전(本殿)의 것이다.”
혈법주의 눈가에 차가운 살소(殺笑)가 어렸다.
괴물들이 서로 총애받으려고 아우성거리게 만든 존야(尊爺).
중원무림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적을 두게 되었다.
* * *
“으…….”
넉넉한 체구의 중년인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붉은 도의를 입은 젊은 도사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옴 마니 밧메 훔!”
젊은 도사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중년인의 초점이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는 도사의 앞에 부복했다.
“미천한 종이 주인을 뵙습니다.”
“미천한 종아, 집으로 돌아가라. 평소와 같이 생활하며 본 법사(法師)의 명을 기다려라.”
혈법사의 오만한 말에 중년인은 자리에 일어나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바라본 혈법사는 흡사 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흡족해했다.
이로써 혈법당의 괴뢰가 하나 더 확보되었다.
“중원의 미천한 돼지들은 우릴 위해 봉사해야 하지, 암.”
혈법사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붉은 도의는 주변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건만, 누구도 혈법사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인식하지 못했다.
혈법당의 혈법사들이 익히는 술법의 하나인 변색룡(變色龍)의 술(術)이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혈법사들에게 필수 술법인 셈이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어디론가로 향했다.
수많은 기루, 도박장 등 화려한 거리와 달리 소주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은 조용한 거리가 나왔다.
소주라고 화려하기만 곳이 아니다.
학문에 정진하는 문사들이나 입신한 관리들이 거하는 조용한 거리도 있었다.
혈법사가 향한 곳은 그런 거리에 있는 장원 중 하나였다.
“늦었군.”
“헤헤… 중원의 미천한 돼지를 구제하느냐…….”
구제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괴뢰로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칭찬할 줄 알았던 초로의 혈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리하라는 당주님의 명을 전달받지 못했느냐!”
“그, 그게 아니오… 크윽!”
그 순간 반투명한 거대한 뱀이 젊은 혈법사의 전신을 옭아맸다.
물론 진짜 뱀은 아니다.
거망(巨蟒)의 환희(歡喜)라는 술법이다.
성취에 따라 술법에 걸린 자를 구속하는 위력이 달라지는데, 초로의 혈법사라면 적의 온몸을 으깨버릴 수도 있다.
환희라는 명칭이 붙은 건, 온몸이 으깨지는 고통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기 때문이다.
반투명한 거망은 입을 쩍 벌리며 당장이라고 젊은 혈법사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한 번 더 명을 어기고 멋대로 판단하면… 이번처럼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쿨럭… 가, 감사합니다. 수석 법사님.”
수석 혈법사의 말고 함께 젊은 혈법사를 옭아맸던 거망이 사라졌다.
혈법당의 상하관계는 그 어떤 집단보다 팍팍했다.
애초 당주의 명을 어긴 건 즉결처분 감이었으니, 오히려 운이 좋은 셈이다.
젊은 혈법사는 물론 수석 혈법사도 몰랐다. 그의 뒤를 따라온 자가 있다는 걸.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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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