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백면독주(百面毒蛛)
“끄으윽! 으윽!!”
흑무(黑霧)가 자욱한 가운데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온몸이 시뻘겋고 핏줄이 불끈불끈 서 있는 게 당장이라도 몸이 터질 거 같은 노인이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흐읍~!”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주변에 자욱하던 흑무가 노인에게 빨려 들어갔다.
더 이상 흑무가 보이지 않을 때, 노인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노인의 두 눈에서 검붉은 핏빛이 번쩍였다.
“과연… 천인혈(千人血)이군. 내상만이 아니라 내공까지 늘었어. 혈불(血佛) 그놈이 무슨 생각인 거지?”
십병암귀는 팔 하나를 잃기 이전보다 더 강력한 기세를 풍겼다.
한두 달로 회복할 내상이 아니거늘 귀물이라고 불리는 천인혈다웠다.
비록 도움을 받았지만, 십병암귀는 의심이 들었다.
군사 혈불은 같은 존재를 모시지만, 동시에 정적이기도 하다.
헌데 자신에게 도움을 줬다?
대계를 위함이라 했지만, 그 말만 믿기에 십병암귀는 순진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이 너무 많았다.
“곧 알 수 있겠지.”
분명 어떠한 수작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어떤 수작이든 해결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십병암귀가 석문을 바라보자 저절로 열렸다.
“주군! 회복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호법을 서고 있던 암귀들은 회복한 십병암귀를 향해 부복했다.
십병암귀는 그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회(會)는 어떻게 되었지.”
“귀갑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암영의 보고에 십병암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귀갑군(鬼甲軍)이라면 납득되지 않는 결과가 아니었다.
허나 더 나은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군장이라… 황산제일검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실제로 수세로 밀리다가 마지막 일격에 승패가 갈렸습니다.”
십병암귀는 천인혈을 흡수하느냐, 소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귀갑군의 상대가 황산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고 있다기보다는 황산파 이외에 귀갑군과 겨룰 곳이 없었다.
호북의 구화당은 망했고, 호남의 동정십팔채는 강소까지 낄 여력이 없으니까.
결국 소주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안휘의 황산파와 절강의 귀갑군의 싸움으로 결판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사가 손을 들어준 게 대군장이었군.”
십병암귀는 대군장의 승리에 혈법주가 관여했다고 확신했다.
무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십병암귀는 대군장보다 황산제일검의 승리를 예상했다.
소주(蘇州)가 탐나긴 하지만, 귀갑군에겐 항주(杭州)가 있다.
목을 매야 할 정도는 아니다.
허나 황산파는 다르다.
황산파의 부흥을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 정파 딱지를 버리고 흑도(黑道)와 손을 잡았다.
소주는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다.
실력 차이가 크지 않을 때, 결국 마음가짐으로 결정이 되는 법.
헌데 정작 승리한 쪽은 대군장과 귀갑군이다.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게 혈법주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소주로 갈… 아니다. 빚부터 갚아야지. 빚부터…….”
십병암귀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빛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늑대 놈은 어디에 있느냐.”
“호남 형주상단에 있습니다.”
암영의 대답에 십병암귀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자신과 일전(一戰)을 치른 지 수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형주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십병암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됐군. 한 번에 처리하면 되겠어.”
* * *
십병암귀가 형주로 향할 때, 이백은 백면독주의 뒤를 쫓았다.
‘하… 신중한 거야? 겁이 많은 거야?’
허창을 떠나 강소의 소주로 향하던 중 백면독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체변용술의 대가라 불리는 백면독주답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허나 그 어떤 역체변용술도 체향까지 속일 수는 없다.
호랑이는 후각이 매우 예민한 짐승이다.
평범한 호랑이도 아닌 설군의 후각을 속일 수는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백에겐 설군만 있는 게 아니다.
혜안(慧眼).
진위를 식별할 수 있는 눈이 그에게 있다.
백면독주는 그야말로 천적을 만난 셈이다.
‘이번에는 사찰이네.’
벽면독주는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며칠에 한 번씩 어디론가 들렀다.
서원(書院)일 때도, 서관(書館)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혹시 모를 추적을 대비해 흔적을 끊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하니, 이젠 모를 수가 없었다.
[賢明寺]
현명사라는 작은 사찰이었다.
이백은 야군의 등에서 내리고 고삐를 잡았다.
말을 탄 채로 사찰의 경내에 들어가는 건 예가 아니다.
허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는 건 다르다.
사찰 안으로 들어가자 경내를 쓸고 있는 승려들이 보였다.
이백의 눈이 황금빛을 냈다.
혹 백면독주가 그새 승려로 모습을 바꿨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 중 백면독주는 없었다.
“아미타불… 본사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주님.”
“누굴 찾으러 왔습니다. 스님.”
빗자루질하던 승려 중 몇몇이 다가와 이백을 향해 합장했다.
그의 물음에 승려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본사에는 제자들 외에는 없는데…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조금 전에 황의(黃衣)를 입은 사내가 들어간 걸 봤습니다.”
승려들은 서로를 바라봤으나 모두 고갤 저었다.
누구도 백면독주를 못 봤다는 뜻이었다.
“아미타불…. 저희는 보지 못했으나…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백은 경내를 살피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이백이 있던 자리에 두 자루의 빗자루가 열 십(十)자를 그리며 훑고 지났다.
퍽!
“칫! 눈치챈 건가.”
“살기를 완벽하게 숨겼어야지. 그리고 스님치곤 몸이 너무 좋아.”
그들은 진짜 승려들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건, 혜안을 통해 이미 간파했다.
물론 승려라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게 아니다.
소림 이외에도 무승(武僧)은 얼마든지 존재하니 말이다.
허나 살기를 숨기고 있는 건, 말이 다르다.
“우리 현명사(眩冥寺)에 제 발로 들어온 네가 재수가 없다 생각해라.”
“역시 살수였군. 시간 아까우니 다들 나오라고 해라.”
이백의 말에 사찰 곳곳에서 수십여 명을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그들의 기척을 느낀 이백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은신술이 부족한 게 아니나 이백의 기감을 속이긴 어려웠다.
“이거… 오백 냥으로 부족하겠는데?”
“…….”
주지(住持)… 아니, 현명사주(眩冥寺主)는 손해 봤다는 듯 말을 툭 던졌다.
이백의 목에 건 청부금이 금자 오백 냥인 듯했다.
이백은 백면독주가 이미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함정을 팠다는 걸 깨달았다.
금자 오백 냥은 은자로 일만 냥.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다.
하지만 이백의 목숨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백면독주는 자신을 쫓는 자(이백)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고작 오백 냥 짜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라면 이런 귀찮은 작업이 아닌 직접 죽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백 냥으로 청부한 건, 이백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함도 동시에 현명사가 의뢰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오백 냥이라면 절정급의 목에 거는 청부액이다.
그 이상의 청부액을 제시하면 상대가 그 이상의 강자라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현명사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본사를 우롱한 새끼는 곧 처리하고, 그전에…….”
이백을 바라보는 현명사주의 눈빛에서 살광(殺光)이 번들거렸다.
“죽여라.”
그의 나직한 말과 함께 승려 차림의 살수들이 움직였다.
살수란 표적이 방심하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암살하는 존재다.
이리 대놓고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
“살(殺)!”
다들 살업을 걸은 지 제법되었는지, 살기를 드러내는 순간에 혈향(血香)이 풍겼다.
혈향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의미다.
후욱!
후훅!
이백의 사방(四方)을 점한 살수들의 도검이 쇄도했다.
간결하면서도 섬뜩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의 실력을 알려주었다.
허나 살수들의 도검은 이백에게 닿지 못했다.
퍽! 퍼퍽!
“……!”
“……!”
살수들은 나가떨어지면서도 신음을 삼켰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살수들이란 의미였다.
그들을 보며 방방 떠는 존재가 있었다.
“우끼끼~! 우끼끼~!”
“푸르릉~!”
금군이 방방 뜨며 좋아하자 야군 역시 기분 좋게 울었다.
살수들을 나가떨어지게 만든 건, 바로 그들이었다.
권법의 고수를 보는 듯한 권격을 펼친 금군과 살수들의 가슴을 으깨버린 야군의 발길질.
영수(靈獸)가 괜히 영수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현명사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병신 같은 것들! 금수(禽獸) 하나 감당 못 해!”
그의 호통에 또 다른 살수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도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전원이 일급살수라는 의미였다.
일급 이상의 살수를 양성하는 건 돈과 시간이 막대하게 소모되는 일이다.
흔하고 흔한 수준의 살수 조직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현명사는 하남 십대살문 중 하나다.
허나 그들은 몰랐다.
금군과 야군은 그냥 짐승이 아닌 절정고수도 능히 때려눕힐 수 있는 영수라는 걸.
후욱!
슈욱!!
사방팔방에서 도검을 휘두르고, 그 뒤에선 화살과 비수를 쏟아냈다.
자칫 동료가 다칠 수 있는 무척 위험한 행동이지만, 이 모든 게 치밀한 계산 하에 짜여진 전술이다.
오직 이백에게만 향한 게 그 증거다.
“크아아앙!!”
언제 품에서 나왔는지 설군이 강렬하게 포효했다.
소림의 사자후가 이럴까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지옥훈련을 거친 살수들이건만 휘청거렸다.
“으윽!”
“컥!”
그때를 노려 야군과 금군이 움직였다.
이백이 움직일 것도 없이 세 영수는 힘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야군의 발길질이 닿는 부위는 가슴이며, 어깨며 모조리 으깨졌다.
게다가 금군은 얼마나 빠른지, 분신술을 부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의 활약 덕분에 수십이나 되었던 살수 중 한 명을 제외하곤 전원이 일어나지 못했다.
제외된 단 한 명은 현명사주였다.
“젠장! 저런 괴물들을 부리는 자가 있단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거늘! 지옥의 수라(修羅)라도 되더냐!”
“내… 친구들을 괴물이라 부르지 마라!”
이백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설군만이 아니라 야군과 금군 역시 이백에겐 소중한 친구들이다.
헌데 괴물이라 칭하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닥쳐! 괴물 새끼들… 큭!”
“닥쳐야 하는 건… 너다.”
하남 십대살문, 현명사를 이끄는 자답게 특급살수였다.
무림고수라도 가벼이 볼 수 없는 존재이지만, 상대는 무려 이백이다.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살수는 살수지왕(殺手之王) 정도일 것이다.
현명사주의 목에 혈선이 그어지더니 그의 머리가 떨어졌다.
베어진 목에서 피가 솟구치며 그의 신형이 무너졌다.
“날 엿 먹인 걸 후회하게 해주지.”
이백은 야군의 등에 탔다.
비록 백면독주를 놓쳤지만, 목적지가 소주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떠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죽은 살수 중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젠장… 뒈질 뻔했네. 대체 저 괴물 새끼는 뭐야?”
야군의 발길질을 맞고 어깨가 박살 났는지, 덜렁덜렁했다.
우득! 우드득!
허나 그건 역체변용술로 한 위장이었는지, 발살 났던 어깨는 멀쩡해졌다.
백면독주. 무림에선 잡학으로 취급하는 역체변용술을 그 어떤 절학보다 더 가치 있게 활용하고 있었다.
어느 의미로 그 역시 괴물이었다.
“빨리 소주로 가야…….”
“뒤를 밟는 것보다 입을 여는 게 낫겠어.”
고갤 돌린 백면독주의 눈이 커졌다.
결코 자신의 앞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사, 살…아 있었다고! 서, 설마!”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