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위장(僞裝)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
총군사 제갈중경은 이백이 떠난 자리를 보며 그가 남긴 여운을 느꼈다.
그런 총군사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공명심보다 제 사람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아이거늘…….”
결국 이백은 무당검선에 이어 총군사의 청에도 거절을 표했다.
자칫 건드려진 풀에 의해 놀란 뱀(打草驚蛇)이 물 수 있다.
그게 자신만이 아닐 수 있다.
그렇기에 이백은 거절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더 많아진 탓이다.
거절당한 것보다 거절당한 이백의 마음이 불편해졌을 게 미안했다.
이성적으로 유명한 총군사답지 않았다.
“아쉽군.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 필요했는데…….”
이백이 완전 무명(無名)이라 할 수 없지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여타 고수들에 비하면 시선에서 자유로운 게 사실이다.
무당검선도 그리고 총군사도 그를 청한 이유였다.
총군사가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총군사님, 우국현 부군사께서 오셨습니다.”
“우 부군사가? 모시게.”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총군사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 모가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하하, 우리 사이에 뭘 그리 격식을 차리는가. 이리 오시게.”
초로의 문사는 무림맹의 부군사(副軍師)였다.
무림맹에서 다루는 일은 무척이나 방대하다.
그중 군사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다.
그 모든 걸 총군사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총군사를 대신해 실무를 담당하는 소군사(小軍師)를 관리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부군사다.
우국현은 전국 각지에서 날아오는 전서를 담당하는 부군사다.
정보라는 게 사실 대단할 게 없다.
하찮은 사실 속에 숨겨진 진짜 정보를 캐내는 게 중하다.
그런 정보는 수많은 정보 중 극히 일부만 존재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의 손을 거치는 정보(전서)가 방대하다는 뜻이다.
매우 중요하고 방대한 업무이지만, 군사부 내의 중요도에서는 떨어지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우국현의 실권 역시 대단할 게 없다.
“흑지(黑紙)가 입수되었습니다.”
“뭐라! 이리 줘보게나!”
흑지라는 말에 총군사는 살짝 흥분했다.
전서의 등급은 백(白), 청(靑), 적(赤), 금(金)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전서는 백지와 청지이며, 적지부터는 중요도가 상당히 높다. 그리고 금지의 경우는 극비에 해당되어 소군사는 손도 댈 수 없다.
흑지는 중요도는 적지 이상이면서 검증이 안 된 정보다.
때에 따라선 금지 이상의 정보가 담겨 있을 때가 있기에 부군사인 우국현이 직접 가져온 것이다.
‘십병암귀로 추정되는 외팔이 노인이라…….’
검증이 안 된 흑지지만, 그 무게는 금지 못지않은 정보였다.
그렇기에 부군사인 우국현이 있는 자리에서 발설하지 않았다.
‘비영을 통해 파봐야겠…….’
총군사의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심장이 죄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부, 군사… 바게…….”
“그렇게 안 되지.”
괴로워하는 총군사를 내려보는 우국현의 얼굴에 냉소가 어려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총군사는 신산(神算)이라고 불리는 거인답게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자…네…….”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독이니, 포기하라고. 아, 호위들 역시 손을 썼으니 기대하지 말고.”
그는 무림맹 총군사인 동시에 전대 고수이기도 하다.
웬만한 독에 중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의 낌새를 놓칠 리가 없다.
그런 총군사가 중독되었다.
흑서에 매우 특별한 독을 발라둔 것이다.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죽어가는 총군사를 향해 우국현이 조소를 지었다.
“…….”
“그러게 왜 죽음을 재촉하는 거야? 그래도 외롭지는 않을 거야, 우국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키킥.”
우국현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우국현이 아니란 뜻일까?
우득, 우드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국현의 얼굴이 총군사 제갈중경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럼 돌아가 볼까.”
제갈중경으로 변한 우국현(?)이 집무실을 떠났다.
군사부를 벗어나는 동안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무림맹 총군사의 앞을 막겠는가.
그때였다.
“끄응… 백면독주(百面毒蛛)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나도 늙긴 늙었어. 비영, 뒤를 부탁하네.”
“존명.”
독살당할 줄 알았던 총군사 제갈중경이 깨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직후, 복면인이 그와 똑 닮은 누군가를 앉혔다.
누가 봐도 제갈중경의 시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맹은 발칵 뒤집혔다.
총군사의 죽음이라는 비보(悲報)로 인해.
* * *
“초, 총군사님께서!”
제갈천기는 이백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천향루로 갔다.
그곳에선 이미 취기 오른 소요자와 그를 시중드는 기녀들. 그리고 이백이 앉아 있었다.
이제 막 합류해 술잔을 들기 무섭게 비보를 듣게 되었다.
“내 이름으로 달아두게.”
“예, 소요자 님.”
취했던 소요자는 내공으로 취기를 태웠다.
한가하게 취해 있을 때가 아닌 탓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빠르게 무림맹. 그것도 군사부로 향했다.
허나 그들 앞을 막는 자들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누구도 출입을 금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버럭 화를 내는 소요자의 말에도 무사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호법님이라도… 아, 안 됩니다!”
“비켜!”
출입을 막기 위해 배치된 이들이지만, 무림맹의 호법인 소요자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도 예외 없소. 의심받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십시오.”
“이봐, 비영!”
비영은 총군사의 심복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군사부의 외부 출입은 물론 내부 역시 통제한 인물이었다.
이를 언짢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따르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는 반발하는 자를 누를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소요자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호법님.”
“자네! 후… 내 너무 흥분했군. 자네도 있는데…….”
소요자의 팔을 붙잡은 자는 제갈천기.
총군사 제갈중경의 장손이다.
그도 참고 있는데, 자신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아니었다.
제갈천기는 침착하게 비영에게 물었다.
“비영 님, 범인은… 색출되었습니까.”
“누구도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갈 소군사.”
아직 확실한 게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 역시 내포된 말이었다.
군사부 내부에는 문사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를 지키기 위한 고수들이 곳곳에 포진했고, 토목기관장치까지 설치되어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비가 잘 되어 있다.
헌데 총군사를 암살했다.
무림십왕의 살왕(殺王)이라도 움직였단 말인가.
“그럼 어떤 수법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갈 소군사, 누구도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했네.”
“비영!”
비영의 말은 제갈천기조차 의심하겠단 뜻이었다.
그의 지나친 말에 소요자가 발끈했다.
정작 제갈천기는 냉정을 유지하며 그의 팔을 다시 잡았다.
“아닙니다, 비영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무리 제가 손자라고 해도 용의선상에서 지워선 아닙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영 님.”
“이해해주어 고맙네.”
핏줄인 제갈천기조차 출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감찰단과 맹 내 고수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백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너희의 소행이더냐. 너희…! 그렇다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
불과 한 시진 전만 해도 멀쩡히 살아 있던 제갈중경의 비보에 이백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쩌면 유언일지 모를 마지막 청을 거절했다는 점 때문이다.
제갈중경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이백의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백은 조용히 사라졌다.
―형님,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일은 다음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곁에 있던 이백이 사라진 걸 깨달은 것이다.
허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라면 이유가 있을 거라 굳게 믿은 탓이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 * *
사라졌던 이백이 나타난 곳은 시가지에서 벗어난 숲이었다.
“아직… 허창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허창은 좁은 땅이 아니다.
한 시진 정도로 벗어나긴 어렵다.
무림고수가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면 말이 다르지만, 흉수가 그런 눈에 띄는 행동을 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가부좌를 튼 이백이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곁을 세 영물이 지켰다.
파다닥! 파다닥!
갑자기 여기저기서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십여 마리가 하늘 위로 오르더니, 어느새 수십 마리가 날갯짓하고 있었다.
백수통령술(百獸統領術)로 인해 수십 마리의 새가 그의 통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백은 통감술(通感術)로 수십 마리 새의 시야를 공유했다.
한 마리의 시야를 공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수라면 전혀 다르다.
하물며 이백은 수십 마리의 시야를 공유받았다.
뇌에 과부화가 걸릴 수 있기에 무리한 행위였다.
‘끙… 쉽지 않네.’
이백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으나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수십 마리의 새는 허창 상공 전역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수십의 시야를 통해 허창 전역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허나 밀려드는 대량의 정보는 뇌에 부담을 주었다.
주르륵.
이백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백수통령술과 통감술을 상단전에 영향을 받는다.
상단전이 발달할수록 통제할 수 있는 짐승의 수가 많아지고, 제어의 세밀함이 가능해진다.
비록 반쪽짜리지만 화경에 오른 덕분에 수십 마리의 새를 백수통령술로 부리는 건 가능했지만, 통감술로 시야를 공유받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아직…아니야, 아직…….’
순식간에 밀려드는 대량의 정보는 상당한 몸의 부담을 주었지만, 이백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설군에게서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설군의 신기(神氣)에는 못 미치지만, 야군과 금군에게도 영기(靈氣)가 흘러나왔다.
[‘신수 백호 설군’의 신기가 공명했습니다.]
[‘영수 오추마 야군’의 영기가 공명했습니다.]
[‘영수 금모신원 금군’의 영기가 공명했습니다.]
세 영수의 신기와 영기가 이백을 감쌌다.
그 덕분인지 지끈거림이 사라지고, 그 표정 역시 평온해졌다.
‘녀석들… 고맙다.’
세 영수의 지원 하에 이백은 허창 전역을 샅샅이 살필 수 있었다.
허나 쉬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애초에 흉수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신 무림맹이 위치한 허창에서 벗어나려는 수상한 자를 포착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게 쉬울 리가 없다.
허창이 작은 지역이 아니고, 무림맹의 존재로 인해 번성한 지역이다.
거하고 있는 수만 명 중 얼굴도 알지 못한 자를 찾아낸다는 게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젠장, 이대로 포기… 음?’
세 영수의 도움으로 강행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수십 마리의 시야를 공유받는 건 부담되는 행위였다.
더 이상은 무리라 생각하던 차에 말 그대로 수상한 자를 발견했다.
‘얼굴…이 바뀌었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